외교 역량 :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
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허남린 선생님
임진왜란 시기 전후의 동아시아에 있어 외교다운 외교를 추진한 왕조가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뿐이었다. 조선은 외교를 통해 왕조를 유지해야 하는 나라였다. 중국이나 일본의 사정에 비교하여 보면 그 이유는 뚜렷해진다. 군사력과 영토의 보전이라는 양자의 함수관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외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중세 일본이나 명나라 중국은 임진왜란의 시기, 외교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밀고 당기는 교섭으로 성립되는 외교를 할 수 있는 기반 혹은 역량을 갖고 있었는지, 그 전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중세 일본은 한 마디로 외교가 필요 없는 나라였다. 당시 일본은 전국이 무력 군사(사무라이) 집단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들은 갈라져서 죽어라 하고 서로 싸웠다. 싸우는 목적은 다양했다. 이웃 세력의 침입을 막고 살아남기 위한 것에서부터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웃을 치는 공격에 이르기까지, 그 모양은 복잡했다. 큰 세력이 수십 개, 작은 세력이 수백 개 존재했으니 그 싸움의 양상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아놓은 투쟁의 도가니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3세기에 몽고족의 원나라가 조선과 송을 복속한 후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맥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잠시의 혼란이 규수 북부지역에 있었지만, 외부가 유발한 그 혼란은 곧 가셨다. 그 후 외침의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에서 나라를 산산조각으로 갈라놓고 그들은 자신들끼리 죽어라 하고 싸웠다.
전근대의 일본은 바다의 덕택으로 안전지대에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바다가 나라의 둘도 없는 영토의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험난한 바다를 건너 일본을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바다를 건너 대량의 군사를 동원하고, 이들을 위한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면서 다른 나라를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줄 모르고 조선을 쳤던 히데요시는 목적 하나 건지지 못하고 죽고, 자신이 세운 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조선 침략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동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 이웃을 치는 전쟁이 가능하게 된 것은 군사와 물자를 손쉽게 그리고 대량으로 나를 수 있는 증기선이 등장하는 19세기에 와서 였다. 서양에서 시작된 증기선의 위력에 무릎을 꿇고, 이의 맵고 서러운 맛을 톡톡히 본 일본은 이를 갈며 증기선을 기축으로 한 해군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켰다. 이러한 힘으로 일본은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치고 후에 중국을 쳤다. 그로부터 국제관계는 복잡해지고 각국 간의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증기선이 침략전쟁을 유발했고, 근대의 외교를 탄생시켰다.
그러한 근대에 이르기 전의 일본은 자신들의 국경의 안전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이나 조선에 증기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놔두어도 국경이 안전한데, 영토의 보전을 위해 일본은 외국과 무슨 외교로 외국의 침입을 막을 필요가 없었다. 무역이나 하고 장사나 하면 그것으로 장땡이었다. 이러한 통상도 스스로 오고자 하는 외국의 상인들을 철저하게 통제해 가면서 이익을 챙겼다. 바다가 지켜주는 국경은 전근대 일본에 있어 외교를 불필요한 기능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일본은 외교 전략을 세우고, 외교에 대한 지식을 기르고, 외교관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없었다. 때로 외국에서 보내오는 사절이 오면 이들을 응대하는 정도의 기술이면 충분했다. 국토방위를 위한 외교 역량에 대한 근본 수요가 없었기에, 외교 역량의 공급도 애써 창출하거나 육성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수 세기의 통치 구조는 임진왜란의 시기까지 지속이 됐고, 침략이 뜻대로 되어가지 않으면서 외교 역량의 필요가 갑자기 생겼지만 이를 금방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다른 주변국들을 졸로 봤다.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위협을 느낄 때에도 그 나라의 지도자나 관료들은 우선은 외부자를 아래로 보고 대하는 각도에서 현안을 처리하고자 했다. 이는 무엇보다 명나라가 주변의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덩치가 크고, 인구가 많고, 물질적으로 풍요함에 연유했다. 어느 주변국과 비교해도 명나라는 거대한 공룡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의 정상에 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황제들은 하늘을 찌를 듯 기고만장한 존재였다. 하늘을 등에 업은 천자는 안하무인이었고, 그러한 천자의 눈에 주변국은 모두 조그마한 좁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이는 중국이 폭압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면 도저히 질서가 잡히지 않고 통치가 될 수 없는 복잡하고 거대한 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소불위의 강권을 휘두르고 그 강권에 눌려 인민들이 숨을 죽여야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는 거대한 왕조로 맥을 이어 온 대륙의 권력 전통과 통치 구조의 본질이었다.
중국과의 교류나 접촉을 원하는 나라에게는 명나라는 그 접촉방식과 교류의 절차를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이러한 요구가 싫으면 오지 말라는 뜻이었고, 실제로 오지 않는 것이 왕조의 유지에 최선이라는 전제도 있었다. 따라서 접촉을 원하고 교류를 희망하면 누구든 명나라가 정한 방식에 따라야 했다. 이들 방식은 황제의 절대적 위상과 권위를 드높이는 의미 구조로 짜여져 있었다. 외교는 중국에 있어 다른 기능 보다 황권을 드높여 주는 도구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태도는 외국의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침범하지 않는 한 국경은 자신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실제로 명나라의 국경을 일거에 대거 침입할 수 있는 외부 세력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침입이라고 해야 부족하고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 약탈을 목적으로 국경 근처를 침탈하는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명의 왕조를 정복하겠다고 벼를 수 있는 세력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명은 다른 나라와 무슨 외교를 통해 국경의 안전을 담보해야 할 필요가 크게 없었다.
역으로 명을 둘러싼 외국들은 명의 군사침입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명나라가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국경을 넘어 침입해 온다면 그것은 왕조의 생존이 날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때문에 이들 이웃 나라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명과의 외교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명나라는 머리를 조아리며 찾아오는 외국 손님을 앉아서 받는 것이 외교라면 외교의 근간이었다. 외국 손님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대하는 절차는 모두 명이 주도적으로 정하면 그만이었다. 그 외에 필요하거나 아쉬운 것은 오는 나라의 사절들이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중국 관원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면 그 대화를 위해 통역자도 스스로 준비해 데려와야 했고, 무슨 문서로 의견을 개진하기를 원하면 즉석에서 격식에 맞는 글을 지을 수 있는 문관을 준비해 보내야 했다. 앉아서 위엄을 부리는 외교는 스스로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 거의 없었다. 명나라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른 외교의 수요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이나 중국은 외교의 국가적 수요가 작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무슨 문제를 교섭하고 줄다리기하는 국가 대 국가의 외교에 대한 역량을 크게 기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와는 달랐다.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밖에서 이를 침탈할 수 있는 세력에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군사력이 누구보다 강하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조선은 그러한 군사력이 없었다. 때문에 외교는 왕조 보존의 전략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왕조의 유지를 위해 조선은 외교에 능한 관료의 층이 두꺼워야 했고, 전략에 온갖 머리를 짜내야 했고, 유능한 통역자들이 항상 대기해 있어야 했고, 국왕은 외교문제에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의 보전 없이는 자기 왕조가 있을 수 없었고, 때문에 외교가 국가 운영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각 나라의 생존 구조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갖고, 세 나라는 임진왜란을 통해 동시에 서로를 만났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조선, 일본, 중국의 생존구조를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으로 끌고 갔다. 군사충돌이 좌충우돌 전개되면서 점점 꼬여가는 상황의 돌파를 위해 이들 국가들은 어떠한 전략을 세우고, 상대에 공작을 걸고,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 생존을 모색했는가?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외교라는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도 임진왜란 이해의 큰 축을 이룬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 한 문제씩 풀어나가기로 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일단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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