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소설, 등장인물소개로 맛보기 10
별일없이 산다, 쓴다
맛볼 소설 : 이태준, 「장마」, 『조광』, 1936년 10월
시놉시스
1930년대 성북동에 사는 주인공 나는 2주간 계속되는 장마에 집 안에만 있게 되자 아내와 말다툼이 잦아지고, 전날 싸움의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한 아내의 모습에 오래간만에 외출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있는 곰보 남편과 곱추 아내의 가게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자신이 아내를 소개받던 시절을 떠올리며 걷던 나의 코앞에서 한 번도 제때 타 본 적 없는 버스가 오늘도 꽁무니를 보이며 출발해 버린다. 딱히 갈 곳을 정하지 않았던 나는 방향과 상관없이 먼저 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안국동에서 전차로 갈아탄 후 1년간 근무했던 조선중앙일보사에 들른다. 편집국에서 바쁜 사람들 틈에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며 동경 신문을 뒤적이다 출판부로 내려가니, 출판국 직원이 ‘바다’라는 제목으로 수필 하나를 써 달라고 원고지와 펜을 내민다. 신문사를 나선 나는 말동무가 그리워 친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조광사(朝光社)에 들를까 하다 모두 일하느라 바쁠 것이 뻔한 노릇이라 다방 ‘낙랑’으로 발길을 돌린다. ‘낙랑’의 주인 이군을 만나려 했으나 그는 자리에 없었고, 나는 일전에 이군이 연애 상담하던 일을 떠올리며 문득 친구라고 생각한 이군에 대해 정작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러면서 지금 만나는 대다수의 친구들이 “자주 만나니까 인사하고 자주 인사하니까 손도 잡고 흔들게 되고 하는 것뿐이지 더 무슨 애틋한, 그리워해야 할 인연이나 정분”이 없지 않은가라는 자문을 하며 어릴 적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지난 봄 어릴 적 친구인 학순이에게 온 편지에 답장을 못한 것이 생각나면서 후회가 되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며 답장을 하기 위해 서점에 들른다. 그곳에서 나는 뜻밖에 중학 동창인 강군을 만난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듯한 강군은 나에게 ‘런치’를 사주며 대뜸 “자네는 문학가니까 연애나 결혼이나 그런 방면에 나보다 대가”일 줄 안다며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친구지간이니 하는 말이라고 한다. 런치에 못 먹는 맥주를 두어 컵이나 들이켠 나는 강군의 “내 어려운 살림살이는 안 시킬 걸세”라는 소개팅 청탁의 말이 자신은 아내에게 어려운 살림을 시키는 남편이다, 라는 자각으로 돌아온다. 아내가 좋아하는 돼지족을 산 나는, 어릴 적 친구 학순이 보내 달라던 나의 책 『달밤』을 사서 부친 후 성북동 집으로 향한다.
잇 파트(it part)
- “아직 열한점, 그러나 ‘낙랑’이나 ‘명치제과’쯤 가면, 사무적 소속을 갖지 않은 이상이나 구보 같은 이는 혹 나보다 더 무성한 수염으로 커피잔을 앞에 놓고, 무료히 앉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서면 마치 나를 기다리기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반가이 맞아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즘 자기들이 읽은 작품 중에서 어느 하나를 나에게 읽기를 권하는 것을 비롯하여 나의 곰팡이 슨 창작욕을 자극해 주는 이야기까지 해줄는지도 모른다.”
무용가 최승희가 개화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 당시 카페에는 작가, 미술가 등 예술가들이 모여들곤 했다.
- “애초부터 결혼을 문제삼아 가지고 조양이 우리 두 사람을 맞대놓았다. …… 나는 이발을 하고 양복에 먼지를 털어 입고 구두를 닦아 신고 나갔다. ‘그러나 결혼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데, 사랑을 언제 해 가지고 결혼에 도달할 건가? 이렇게 미리부터 결혼을 조건으로 하고 만나는 데는 순수한 사랑이 얼크러질 리가 없다. 이건, 아무리 서로 마음에 들어 활동사진에 나오는 것 같은 러브 신을 가져본다 하더라도 어데까지 결혼하기 위한 선보기의 발전이지 로맨스일 리는 없다.’”
- “안국동(安國洞)서 전차로 갈아탔다. 안국정(安國町)이지만 아직 안국동이래야 말이 되는 것 같다. 이 동(洞)이나 리(里)를 깡그리 정화(町化)시킨 데 대해서는 적지 않은 불평을 품는다. 그렇게 비즈니스의 능률만 본위로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그릇된 나치스의 수입이다. 더구나 우리 성북동을 성북정이라 불러보면 ‘이주사’라고 불러야 할 어른을 ‘리상’이라고 남실거리는 격이다.”
- “런치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이 사람이 금세 ‘세상일은 다 낚시질이데그려’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이것도 나의 낚시질인지 모른다. 내가 미끼를 먹는 셈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암만해두 인물부터 좀 있어야겠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옳지, 낚시질 시작이로구나> 하고, ‘글세…….’ 하였을 뿐이다. 생각하면 낚시질이란 반드시 어부 편에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고기가 미끼만 곧잘 따먹어 낼 수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가 비싼 것을 시키는 대로, 그가 권하는 대로 내 양껏 잘 먹고 소화해 볼 생각이 생긴다.”
등장인물
▶ 나
소설가. 조선중앙일보사에 1년간 근무했고, 지금은 그곳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구인회 활동을 하며 만나는 작가들과 친하게(?) 지낸다.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나날, 아내와 말다툼이 잦아지자, 집을 나선다.
* 나의 한마디 : “아닌 게 아니라 가끔 연애욕이 일어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식욕일지도 모른다. 또 얼마를 해보든지 늘 새로운 것이어서 포만될 줄 모르는 것도 이것일지 모른다.”
▶ 아내
황해도 출신으로, 음악을 전공했다. ‘나’와도 알고 아내와도 아는 조양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당시 조양이 나에게 아내를 설명한 말은 이랬다. “첫째 가정이 점잖고, 고생을 못해봤으나 무어든 처지대로 감당해 나갈 만한 타협심이 있고, 신여성이라도 모던과는 반대요, 음악을 전공하나 무대에 야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취미에 그칠 뿐이요 인물은 미인은 아니나 보시면 서로 만족하실 줄 압니다.” 장마가 길어져 빨래를 해도 마르지가 않는데, 딸아이가 비 오는 밖에 나가 놀아 하루에 옷을 네 벌씩이나 벗어 놓자 아이를 쥐어박으며 혼냈다. 그런데 집구석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아무 일도 안 거들어 주던 남편이 아이들이란 밖에 나가 놀아야 감기 같은 것에 저항력도 생기고 하는데 옷을 말릴 수 없다는 이유로 감금하려 들고 구타까지 하니 무슨 몰상식, 무책임한 짓이냐고 하자, 아내의 화가 폭발한다.
* 아내의 한마디 : “그러게 아이들이 하루에 옷을 몇 벌을 말아놓든지 달리지 않게 왜 옷을 여러 벌 사다 놓지 못하고, 또 젖은 옷도 썩을 새 없이 말릴 만한 그런 설비 완전한 집을 왜 지언 놓지 못하면서 큰소리만 탕탕 하고 앉았는 건 남편이나 애비된 자로서 무슨 몰상식, 무책임한 짓이냐?”
▶ 곰보 남편과 곱추 아내
주인공이 사는 성북동 집 아래쪽 고갯마루턱에 빙수가게를 하는 부처(夫妻). 다른 사람들은 안주인을 표준으로 곱추 가게라 부르는데, 나는 곰보 가게라고 한다. 곱추 아내는 눈 코 입이 모두 자그마해 그렇지 그만하면 예쁘다고 할 수 있는 상이라 곱추만 아니었다면, 곰보 남편으로서는 올려다보지도 못할 짝이다.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종종 둘은 서로 “저 따위가” “요것이” 하는 쇠된 소리를 내며 싸우고 하지만, 주인공 나는 이들을 보며 “비는 오고 물건은 팔리지 않고 먹을 것은 달린다 하더라도 남편과 단둘이 들어앉아 약이니 띠니 하고 무슨 내기였든지 화투장이나 제끼는 재미도, 어찌 생각하면 걱정거리 많은 이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생활”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 이군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다방 ‘낙랑’의 주인. 주인공 나와는 동경 유학 때 사귄 사이다. 나는 이군을 ‘눈물의 기사’라 부르는데, 공연한 일에도 ‘아하!’ 하고 감탄만 한번 하면 이군의 눈에는 곧 눈물이 차버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군이 나를 낙랑 이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자기가 연애를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상대는 서울 청년들이 누구나 흠모하는 평판 높은 미인이라고. 그런데 자기는 이미 처자식이 있으니 어쩌면 좋으냐며 눈물이 글썽글썽해 고민을 늘어놓았다. 나는 연애를 단념하라고 했지만 죽어도 단념할 수 없다던 이군은 그 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만났을 때 한쪽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말은 생인손을 앓아 잘라 버렸다지만, 연애 사건 때문에 단지(斷指)한 것임을 나는 직감한다.
* 이군의 한마디 : “아직 우린 순결하네. 끝까지 정신적으로만 사랑해 나갈 순 없을까?”
▶ 강군
주인공이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 때의 동창. 번지르르한 레인코트에 양복 저고리 깃에는 일장기 배지를 척 꽂고 있던 그는 황해도 어느 해변의 간척지 사업을 좀 했다면서 총독부에 줄이 있다는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세상일은 다 낚시질이데그려. 미끼가 든단 말이세”라는 남긴다. 주인공이 여학교에 관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자신은 지금 독신이라며 예쁜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 독신이 된 뒤로 화류계 여성들과만 상종하게 되니 몸도 이전보다 괴롭고 살림꼴도 말이 아니라며 두 번 세 번 주인공에게 소개팅을 부탁하고 헤어진다.
* 강군의 한마디 : “(xx군은) 며칠 안 있으면 도지사가 되어 나갈 걸세. 그런 사람들도 당당한 재산가 영양들만 소개하지만 자네 소개가 원일세.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쪽 뽑은 신여성 하나 천해 주게. 내 어려운 살림은 안 시킬 걸세.”
▶ 학순이
주인공의 어린 시절 친구. 대운동회 때 주인공과 이인삼각(二人三脚) 짝이 되어 1등을 한 다음부터 더 친하게 놀았던 친구. 주인공이 서울에 와서 사귄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 친구는 그의 조부모가 어떤 사람들이고,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고, 집 안 풍경은 어떤지 누구네 마당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까지 다 아는 사이. 지난 봄 학순은 주인공에게 편지를 보내, 어느 잡지책에서 주인공이 『달밤』이란 소설책을 낸 걸 보았다면서 자신이 얘기책을 좋아하는 줄 잘 알면서 왜 책을 보내 주지 않느냐고, 그런데 책 이름이 ‘추월색’이나 ‘강상명월’처럼 운치가 없지 않냐고 하면서, 하여간 주인공의 책이 연애소설일 테니(『달밤』은 연애 소설과 거리가 먼 소설책임) 읽어보고 싶다며 한 권 부쳐 달라고, 또 한 가지 돈은 못 부치지만 ‘고불통 물부리’(담배 파이프 같은 것) 싼 거 하나를 같이 부쳐 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가 농촌에만 묻혀 있으니 자신의 창작집을 『추월색』 같은 이야기책에 비겨 말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나 불쾌했고, 어차피 그의 기대에 전혀 맞는 책이 아니므로 답장은 물론 책도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다 장마가 이어지던 이 날, 주인공 나는 강군과 헤어진 후 우선 고불통은 다른 날 사 보내기로 하고, 자신의 책 『달밤』을 먼저 학순에게 부친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이태준은 이들(김소운 제외)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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