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소설, 등장인물소개로 맛보기 ⑨
따라지 세입자들과
따라지 집주인의 한판 승부
― 김유정의 「따라지」
* 따라지 :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나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
| ||
맛볼 소설 : 김유정, 「따라지」, 『조광』, 1937년 2월 |
시놉시스
1930년대 사직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사직골 꼭대기에는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초가집에 방 3개를 세놓고 사는 중늙은이 주인 내외가 있다. 그런데 세든 사람들이 모두 처지가 변변찮아 한 달치 월세를 세 달에 걸쳐 야금야금 주는 등 월세를 제때 제대로 받은 일이 없다. 과부 누이가 공장에 나가 돈을 벌고 남동생은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있는 건넛방의 남매, 폐병 걸린 늙은 아비와 버스 안내양을 하는 딸이 사는 아래채 방의 부녀, 그 방 바로 옆방에 살며 카페 여급으로 일하는 친구 사이인 영애와 아키코 등이 이 초가의 세입자들. 불량(?) 세입자들 때문에 속이 타던 어느 날, 주인마누라는 세입자들을 내쫓기로 작정을 하고 덩치 큰 조카를 불러 이제 조카가 방을 써야겠으니 나가라고 닦달한다. 그녀의 첫번째 타깃은 가장 만만한 남매네. 남동생만 있는 방에 조카를 들여보내 집기를 꺼내는 찰라, 꼬박꼬박 쥐어박는 소리로 대들어 가장 애물단지인 아키코가 “남의 세간을 마음대로 꺼내냐”며 나서고, 이어서 주인마누라와 영애가 맞붙다가 덩치가 월등히 작은 주인마누라가 영애 힘에 밀려 픽 쓰러지고, 이에 조카가 영애의 뺨을 치고, 이에 아래채의 폐병 든 할아범이 지팡이를 들고 계집애 뺨을 때리냐며 나서서, 결국 세 사람이 조카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지팡이로 때리고 하며 아수라장이 된다. 이러다 사람 잡겠다고 생각한 주인마누라는 순사를 부르러 집을 나서는데……….
영애와 아키코는 이런 느낌의 동무가 아니었을까?
잇 신(it scene)
- 카페 여급으로 친구 사이인 영애와 아키코. 둘이 함께 사는 방은 두 사람이 자도 어깨가 붙을 만큼 좁아서, 한 사람이 손님을 데리고 오면 다른 한 사람은 나가서 자야 한다(손님을 데려오는 쪽이 나가 자는 사람에게 숙박비를 주는 시스템). 그런데 매번 손님을 데려오는 쪽은 예쁘장한 아키코. 살집 좋은 영애에겐 좀처럼 손님이 없는데, 그런 영애가 모처럼 손님을 끌고 온 날, 하필이면 옆방의 폐병쟁이 아비와 그 딸이 소리 질러 가며 다툰다. "늙은이보구 담밸 끊으라는 게 죽으라는 게지 뭐야!" 하면서 벽에 머리를 찧으며 어린애같이 울어 대는 옆방 아비의 소리에 손님이 비틀비틀 방 밖으로 나가며 되는 대로 구두짝을 끌고 "요담에 또 오지"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가버리고, 결국 방 안에 홀로 누워 옆방 아비를 악담하는 영애의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장면.
- 주인마누라가 조카를 불러 누이와 지내는 청년에게 방을 비우라며 마음대로 청년의 세간을 밖으로 빼내자 마음대로 남의 물건을 치냐며 나서는 아키코. 평소 아키코의 서슬에 눌려 찍 소리 못하던 주인마누라는 조카를 믿고 이번에는 “아키코 니 걱정이나 하라”며 대차게 나서는데, 이걸 본 아키코의 친구 영애가 그런 모습이 아니꼬워 팔을 뒤로 확 잡아챈다. 덩치 차이가 워낙 큰지라, 주인마누라가 영애의 힘에 밀려 제 풀에 비틀비틀 돌더니 벽에 가 쿵 하고 쓰러지고는 아이고 소리를 내는 장면.
- 조카가 세입자들에게 죽게 생겼다며 순사를 데리고 온 주인마누라. 하지만 순사는 이미 그녀에게 너무 자주 아키코 욕을 들었고, 또 허풍이 심하다는 걸 알기에 이번에만 가본다, 다음에 또 오면 당신을 잡아갈 거다, 라고 못을 박고 함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집은 깨끗이 치워져 있을 뿐 아니라, 너무 평온하고, 조카도 멀쩡히 마루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 이에 주인마누라가 분해서 자기를 골탕먹이려고들 이러는 거라며 가슴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
- 주인마누라 등쌀에 일단 파출소로 간다는 순사와 걸어 나온 뒤 사직원 마당에서 순사를 놔두고 저 혼자 “담에 또 봅시다”라며 산 쪽으로 향하는 아키코. 남자 아이들이 한켠에서 활발히 공을 차는 모습을 보며 자기도 남자가 됐더라면 ‘풋볼’을 차볼걸 하고 후회하다가, 산을 한바퀴 돌아 집에 내려가서는 이번에 주인마누라의 장독 위에 요강을 버리리라 결심하는 아키코의 모습.
등장인물
▶ 주인마누라(아키코가 붙인 별명 : 구렁이)
세입자들로부터 세를 제대로 못 받아 악이 오른 쉰일곱의 중늙은이. 남편인 주인 영감에게 세를 받아 달라고 하면 영감은 자꾸 마누라에게 미뤄 골치 아픈 세입자들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주인마누라의 몫. 아키코에게 유독 약하다. 그나마 영애는 뭐라고 하면 대답이라도 하는데, 아키코는 방세를 내라고 해도 입을 꼭 다물고 안차게도(겁이 없고 야무짐) 대답이 없고, 계속 조르면 도리어 화를 버럭 내며 누가 돈 있는데도 안 내냐고, 좀 기다리라고 큰소리다. 아키코와 영애가 주인마누라를 두고 부르는 별명이 구렁이다. 주인마누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세간도 마루로 빼서 방을 비워 세를 들인 보람도 없이, 찔끔찔끔 세를 내는 세입자들이 여간 얄밉지가 않다. 작정을 하고 조카를 불러서 가장 만만한 남매네 방부터 빼려는 날, 또 아키코가 나서서 야단이다. 세입자들에게 조카가 죽게 생겨서 순사를 불러오는데도 순사는 도리어 다신 오지 말라고 주인마누라에게만 타박이다.
* 주인마누라의 한마디 : (이번은 할 수 없지만 다음에 또 오면 안 된다는 순사의 말에) "네. 다시 갈 리 있겠습니까. 그저 이번에 그 아키코란 년만 흠씬 버릇을 가르쳐 주십시오. 늙은이 보구 욕을 않나요, 사람을 치질 않나요! 그리고 아직 핏대도 다 안 마른 년이 서방이 몇인지 알 수가 없어요."
▶ 아키코
사직골 초가집의 세입자. 올해 열아홉 살로 여자고등보통하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지금은 카페에서 일한다. 예쁘장하여 아키코를 찾는 손님이 많은 편. 방이 너무 좁아 손님을 데려오는 날에는 룸메이트인 영애가 나가서 자야 하는 게 마음이 좀 안 좋다. 건너방에 사는 남매네의 남동생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다. 가끔 낮에 사직원 산에 오르면 소나무 줄기에 등을 대고 먼 하늘만 바라고 서있는 그, 일하고 온 누이에게 잔소리 들으며 얻어먹고 살고 있는 그가 착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옛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착하고 바보 같았다던 톨스토이 이야기가 생각나, 남몰래 그에게 '톨스토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이런 아키코의 마음을 모르고 가끔 아키코가 손님에게 받은 연애편지에 답장 좀 쓰는 걸 도와 달라고 찾아가면 "전 그런 거 못 씁니다", 연애도 안 해봤냐고 물으면 "전 그런 거 모릅니다" 하는 게 대답의 전부다. 순둥이 같은 톨스토이를 유독 못살게 구는 주인마누라가 싫어서 세숫물도 일부러 안마루 끝에 확 끼얹는 등 앙숙으로 지낸다. 주인마누라가 조카를 불러 톨스토이를 괴롭히자 조카에게 달려들어 그의 어깻죽지를 뒤로 물고 늘어지며 놔주질 않아 주인마누라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 아키코의 한마디 : (순사와 헤어진 뒤 산을 한 바퀴 돌아 내려가서는 주인마누라 장독 위에 요강을 버리리라 결심하면서) "망할 년! 이번에 봐라. 내 장독 위에 오줌까지 갈길 테니!"
▶ 영애
아키코의 룸메이트. 옆방의 딸을 버스 안내양으로 돈 벌게 하고 앓아누워 있는 영감을 몹시 싫어한다. 영애 자신의 아버지가 영애를 카페에 팔아넘긴 사연이 있어 원래부터 탐탁지 않게 영감을 보았는데, 모처럼 영애가 집에 손님을 데리고 온 날 영감이 딸과 다투며 소리를 지르고 벽에 머리를 부딪고 하며 소란을 피워 손님이 내뺀 일도 있어 이래저래 영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살집이 있는 편이라 한때 살을 빼는 데 아편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듬뿍 먹었다가 꼬박 이틀을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생한 적이 있다. 아키코를 샘내기도 하고 잘 삐치기도 하지만 결정적일 땐 늘 아키코의 편에 서주는 친구다.
▶ 건너방 남매 중 남동생(아키코가 붙인 별명 : 톨스토이)
하루 종일 집에서 멍하니 앉아 지내는 청년. 주인마누라 눈에는 나이가 새파란 녀석이 누이 벌이로 지내면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키코의 눈에는 소설을 쓰는 착하고 순한 청년. 일 나갔다 돌아오는 누님에게 매일 구박을 받고, 집주인 마누라의 월세 내라는 성화에도 시달린다. 어쩌다 누님이 공장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날이면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릇을 집어 던지며 악을 쓰고 욕을 해대는데, 그럴 때도 "누님, 다 내가 잘못했수, 그만두" 하고 달래기만 할 뿐 한 번도 누님에게 대든적이 없다. 작년 가을, 누님의 성화가 연일 심하게 계속될 때 10일 가까이 집을 나간 일이 있었는데, 그게 그의 반항이라면 반항의 전부다.
* 남동생의 한마디 : (월세 내라는 주인마누라의 말에) "돈은 우리 누님이 쓰는데요. 누님이 오거든 말씀하십시오."
아키코의 눈에 '톨스토이'는 이렇게 보였을지도..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 톨스토이의 '비서' 역할을 맡았던 제임스 맥어보이
▶ 건너방 남매 중 누나
경무과 제복공장에 다니며 남동생을 걷어 먹이고 있다. 급한 성질에 늘 입을 꼭 다물고 세상의 낙이 없는 표정이다. 퇴근하면 우선 빈 도시락을 쟁그렁 하고 방앞에 던진 후에 불평거리를 찾아 남동생에게 폭풍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어쩌다 공장에서 일이 늦다고 감독에게 쥐어박히거나 재봉침에 엄지손톱이 박혀 반쯤 죽어 오는 날에는 급한 설질에 더욱 불이 붙어 미친 사람처럼 아우를 들들 볶는다. 하지만 한 번도 아우의 저녁밥을 거른 적이 없고, 남동생이 없어졌을 때는 공장까지 며칠씩 빠지고 밥도 굶으며 울며불며 동생을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아흐레 만에 남대문 밖 동무 집에서 남동생을 찾아와서는 기뻐서 또 한참을 울었다. 물론 다음날부터 동생 타박은 다시 시작되었다.
* 누나의 한마디 : (퇴근 후 동생에게) "밥을 얻어먹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늘 부처님같이 방구석에 꽉 앉았기만 하면 고만이냐?"
▶ 폐병 앓는 아래채 아비(아키코가 붙인 별명 : 김마카)
폐병에 걸려 종일 이불을 쓰고 끙끙 소리를 내며 누워 있다. 이사온 날부터 뒷간에 피똥을 싸며 이 앓는 소리로 쩔쩔매는데, 그 신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인마누라는 사지가 으스러지는 것 같다. 주인마누라가 월세를 내라고 하면 "내 시방 죽는 몸이오, 가만있수" 하고, 더 닦달하면 눈을 부릅뜨고 "내가 죽는데 어째 또 방세는 낸단 말이오!" 하며 악이 받친 소리를 질러 댄다. 폐병인데도 담배를 못 끊어 이 때문에 간혹 딸과 싸움이 일어난다. 하지만 딸의 비위를 보통 맞추려 애쓰면서 아침마다 딸의 도시락을 꼭 헌 잡지 사이에 포개서 싸주는 일을 한다. 주인마누라 조카와 아키코네가 싸움이 붙었을 때 지팡이를 짚고 나와 함께 그들 편에서 조카를 응징(?)한다. 김마카는 노란 참외를 뜻하는 일본어 긴마카로, 얼굴이 누렇게 떴기 때문에 아키코와 영애가 붙인 별명이다.
▶ 버스걸
버스 안내양 일을 하는 아래채 폐병 걸린 아비의 딸. 주인마누라에게 처음 세를 들 때 아버지가 감기라고 속여서 들어왔는데, 지금도 감기가 쇠어서(심해져서) 그런 거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아침에 출근할 때 버스 안내양으로 보이기보다는 고등보통학교 학생처럼 보이고 싶어 아버지에게 헌 잡지 사이에 도시락을 넣고 책보처럼 싸달라고 한다. 멋 부리는데도 관심이 많아 아키코에게 머리칼을 언니처럼 잘라 달라고 찾아간 일도 있다. 아키코는 자신에게 관심을 안 보이는 톨스토이가 혹시 버스걸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잠시 의심한 적이 있다.
▶ 조카
주인마누라가 툭하면 독학으로 부청에까지 출세를 한 굉장한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던 인물. 그러나 아키코가 보아하니, 경성부의 사환 정도인 듯한 외모다. 주인마누라의 부탁으로 세입자들을 쫓으려 왔다가 도리어 된통 당하고 만다.
▶ 순사
툭하면 찾아와 아키코를 혼내 달라는 주인마누라 때문에 귀찮다. 처음엔 흥미로웠으나 이젠 너무 많이 들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순사가 보기에는 귀여운 구석이 많은 아키코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주인마누라가 이해가 안 간다. 조카가 죽는다고 찾아온 주인마누라와 집에 가보니, 역시 멀쩡한 상황. 하지만 딴은 그릇도 좀 깨져 있고, 문도 좀 부서져 있어서, 이것이 능글맞은 주인마누라가 극성스러워 그리된 일인 줄은 아나, 귀찮게 굴까봐 누가 그랬냐고 물으니 아키코가 자기 혼자 그랬다며 나선다. 그래서 아키코를 파출소까지 데려갈 생각은 없이 일단 데리고 나온다. "네가 주인마누라를 깨물고 사람을 죽이고 그런다며? 그리구 요전에도 카페서 네가 손님을 쳤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니?" 하며 이유를 묻자 아키코는 자긴 그런 거 모른다고 하고는 멋대로 사직원 문간쯤에서 담에 보자며 가버린다.
사진의 오른쪽즈음 멀리 보이는 곳이 사직골(지금의 사직동)이다.
'지난 연재 ▽ > 한국근대소설극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일없이 산다, 쓴다 ― 이태준의 「장마」 (0) | 2014.10.17 |
---|---|
[근대소설극장] 삶은 진창이다, 그래도 나는 살 것이다! ― 한설야의 「이녕」 (0) | 2014.07.04 |
[근대소설극장] "요사이 젊은 사람들은 반쪽 병신이다" - 송영의 「월파선생」 (0) | 2014.06.20 |
[근대소설극장]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의 세상, 현덕의 「남생이」 (0) | 2014.06.13 |
[근대소설극장] 말할 수 없는 비밀, 이효석의 「산협」 (0) | 2014.05.09 |
[근대소설극장] “뽕밭에는 한 번밖에 안 갔다. 어쩔 테냐?!” (2) | 2014.04.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