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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장·주·걸·쓰

[임신톡톡]아이 밸 때 쓰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거든, 어찌 이 아까운 이 보배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7. 24.


무정한 남녀의 무정한 이야기


섹스와 임신은 별개?


남자의 정액이 묽으면 비록 성생활을 해도 혈해가 허하여 정액이 힘없이 사정되어 자궁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므로 임신이 잘되지 않는다. 평상시에 성생활을 조절하지 못해서 정액을 너무 많이 배설하였으면 반드시 정액을 보하고 겸해서 ‘마음을 안정’하여 성욕이 동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정액이 충실할 때 성생활을 하면 임신을 하게 된다.


─ 『동의보감』, 부인편


남성은 더 많은 섹스를 할수록 여성은 더 강한 오르가즘을 느낄수록 몸이 젊어진다는 통계를 신뢰한다...정확한 기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트레스 감소 효과일 수도 있고, 심혈관계의 노화를 예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섹스 자체의 치료 효과도 중요하지만 그를 통한 관계 형성과 정서적 만족감 또한 중요하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섹스는 단순히 좋다.


내 몸 사용설명서』,마이크로 이젠, p231, 232


여기 섹스에 대한 두 개의 글이 있다. 하나는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섹스에 대한 관점이고 나머지는『동의보감』적인 견해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현대의학적인 관점부터 살펴보자. 핵심은 다다익선! 섹스를 하면 할수록 심신이 건강해진다는 말씀. 그것에 반해 『동의보감』은 그렇게 하다간 정은 묽어지고 정액은 부족해져서 임신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섹스에 대한 견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현대의학에서 섹스는 쾌락을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동의보감』에서 섹스는 생명 탄생을 위한 소중한 행위로 간주한다. 이런 견해차는 어디서 오는 걸까. 


동의보감에서 섹스는 생명탄생을 위한 소중한 행위이다.


현대 의학적 견해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무책임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섹스는 스트레스를 푸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습관이 생겨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섹시를 강조하다가 섹시한 사람만 보면 성욕이 동하는 걸 누가 책임질 것인가. 또한 섹스가 정서적으로 만족감을 준다면 정서적 만족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걸까. 다다익선 섹스 발언은 그만큼 센 윤리 없이는 쉽게 말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의학적 뒷받침이 있기에 온 세계가 섹시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다. 헌데 궁금해지지 않는가. 이렇게 온 지구가 섹시를 원하는데 그만큼 불임도 많다는 사실. 그렇다. 모두 알다시피 섹스는 임신과는 아주 무관한 쾌락 활동이다. 이렇게 살다가 임신을 원하면 불임클리닉으로 직행한다. 아이를 내가 원하면 만들 수 있는 가공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완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임신은 그냥 아이를 뚝딱 하나 낳는 문제가 아니다. 우주적 생명활동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 생명 창조의 씨앗이 ‘정’에서 출발한다. 『동의보감』에서 정은 섹스를 할수록 생성되는 단순한 단백질 합성물이 아니다. 생명 창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이다. 그러니까 임신이란 생명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걸 깨닫는 기회인 것이다. 어떤가. 임신이 우주의 생생불식 하는 장에 동참하는 활동이라는 거. 여기서 섹스는 생명 활동을 갉아먹는 최대의 적으로 등장한다. 쾌락은 우주적 리듬을 거부하는 죽음의 레이스인 것이다. 안다. 아직은 동의하기 어렵다는 거. 하지만 몸의 원리를 이해하다 보면 저절로 우주적 비전을 가진 나로 변신할지도. 섹스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것인지, 우주적 생명을 창조하는 행위로 이해할 것인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정, 생명의 씨앗


지구와 다른 행성들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는 물이다. 지구, 혹은 가이아는 물에서 창조되어 물을 통해 유지된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행성의 70%는 물에 덮여 있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모든 생명은 물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몸은 약 75%가량이 물로 되어 있고, 삶을 위해 물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물의 행성에 사는 물의 생물들인 셈이며, 물은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은, 그리고 지구의 생명과 건강은 전적으로 물에 달려 있다. 물은 흐르고 흘러, 현재의 모든 생명과, 미래의 생명의 씨앗과, 과거 생명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물은 삶과 죽음, 존재와 무, 건강과 질병의 중재자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주고 지탱해주는 이 물질과의 유대를 어느덧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의 치유력』, 찰리 라이리,  p13


오늘 탐구할 내용은 생명의 씨앗인 정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현대과학 이야기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현대과학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조건 중 필수불가결한 것이 물이다. 물이 없으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사막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아니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사막이 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수분이 없는 곳에는 박테리아조차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생명이 존재하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 원시 지구의 생명체는 모두 바다에서 탄생하였다. 임신 중에 태아가 ‘양수’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인간도 수중생물의 후손임을 말해주는 징표이다. 태양계에서 외계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실 물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태양계 밖 행성에 물이 있다면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구에서도 물이 사라지면 생명체의 소멸은 시간문제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동의보감』에서 정은 물에 가까운 개념이다. 물에 비견되는 정이 마르고 없어지면 생명은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하여 정은 내 몸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수와도 같다.


사람한테 정은 가장 귀중하면서도 매우 적다. 사람 몸에는 정이 통틀어 1되 6홉이 있다. 16세 남자가 아직 정액을 내보내기 전에 양은 1되다. 정액이 쌓여서 그득하게 되면 3되까지 되나 허손되거나 내보내서 적어지면 1되도 못 된다. 정과 기가 서로 보충해 주는데, 기가 모이면 정이 그득하게 되고, 정이 그득하면 기가 왕성해진다. 매일 먹는 음식의 영양분이 정으로 되기 때문에 쌀 미(米)자와 푸를 청(靑)자를 합쳐서 정(精)자를 만든 것이다. 16세가 되면 정액이 나오게 된다. 보통 한번 성생활을 하면 반 홉가량 잃는데 잃기만 하고 보태주지 않으면 정액이 줄어들고 몸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성욕을 조절하지 않으면 정이 소모된다. 정이 소모되면 기가 쇠약해지고, 기가 쇠약해지면 병이 생기면 몸이 위험하게 된다. 참으로 정이라는 것은 사람 몸에서 가장 중요한 보배라고 한다.


동의보감, 양생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의 양은 1되 6홉! 정에는 선천적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정과 후천적으로 음식을 먹어 보충되는 정이 있다. 선천의 정은 진정(眞精)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후천적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절대 보충할 수 없다. 이런 선천의 정의 소진은 병은 물론이고 죽음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다. 진정을 가장 고갈 시키는 것은 쾌락이다. 그러니 정을 갉아 먹는 쾌락을 타파하는 것이 양생의 핵심인 것이다. 서양의학적인 섹스의 권장은 『동의보감』 입장에서 보면 죽음을 재촉하는 일인 것이다.


정은 생명의 영액이다.


『동의보감』의 핵심어를 대라면 단연 ‘정의 보존’이 될 것이다. 왜 그렇게 정을 중시하는가. 정은 단순히 정액이 아니라 피가 변화된 것이다. 『동의보감』은 피와 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욕이 동하면 피가 명문에 와서 몸의 순환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정액으로 빠져나가는 거라고. 한마디로 정액이 피라는 것이다. 성생활이 피를 계속 쏟아내는 행위라고 생각해보라.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생명창조에 동참하려면 맑고 신선한 정의 확보가 제일로 중요하다.



임신, 마음의 안정이 먼저! 


앞에서 정이 무엇인지 이해가 됐을 것이다. 이번엔 정의 확보에 대해 고민할 차례이다. 누구나 알듯 과도한 섹스는 금물이다. 또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이라고 『동의보감』은 말한다. (첫 인용문 참조) 정을 보존하는데 왜 이런 도 닦는 얘기가 나오는 걸까. 마음의 안정과 정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문제는 몸의 원리를 탐구해야 해결할 수 있다. 정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정은 신장이라는 집에 살고 있다. 우리 몸은 관계의 산물이므로 신장이 단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없다. 불과 물의 관계처럼 물은 불을 통해 불은 물을 통해 자기실현을 한다. 신장의 정도 심장을 통해 능력을 발휘한다. 하여 심장과 신장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심장 안의 물을 군화라고 부른다. 신장은 좌신과 우신으로 나뉘는데 우신을 명문이라고 한다. 명문은 생명의 문이라는 뜻으로 정을 양수기처럼 끌어 올려서 에너지로 변환시킨다. 정은 생명 에너지의 정수로 그 자체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것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을 오른쪽 신장에 있는 명문에서 한다. 이때 생기는 것을 ‘상화’라고 한다. 상화는 심장과 신장을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한다. 자, 정리해보자. 두 개의 화가 생겼다. 심장 안의 물 ‘군화’와 심장과 신장의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상화’가 그것이다. 


상화의 망동을 조절해야 정을 보존할 수 있다.


심장의 화인 군화는 신장에 뿌리를 내린 화로 음양의 균형을 이뤄 혈의 형태로 전신의 기초대사를 담당한다. 반면 상화는 잉여의 불로 기초대사 외의 인간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든다. 정리하자면 군화가 기초대사를 담당한다면 내가 사람들과 만나고 감정 활동이 일어나는 건 상화의 몫이란 말이다. 즉, 명문의 활동은 심신의 조화를 통해 일상을 잘 영위하는 데 있다. 원리가 그러하니 상화가 동하면 연결된 신장의 정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마음의 안정이란 상화의 망동을 조절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어떤 때 마음이 흔들리고 상화가 망동하는 것일까.


양생에는 다섯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명예와 돈을 멀리하지 못하는 것이 첫째 어려움이며, 감정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 둘째 어려움이며,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지 못하는 것이 셋째 어려움이며, 맛있는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넷째 어려움이며, 신이 허약하고 정이 흩어지는 것이 다섯 번째 어려움이다. 이 다섯 가지를 마음속에서 없앨 수 있다면 믿음이 날로 더해 가고 도와 덕이 날로 온전해지며, 선을 빌지 않아도 복이 있게 되고 장수를 바라지 않아도 저절로 오래 살게 되니, 이것이 양생의 요점이다.


신형문, 섭양요결


마음의 안정을 하려면 명예와 돈, 여색 등 쾌락을 위한 것들과 멀어져야 한다.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상화가 망동할 수밖에 없다. 생명의 정수인 신장의 정은 상화 망동으로 금방 고갈되니 심과 신의 기가 허해질 수밖에. 이것은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여자는 정액이 없지만 몸의 모든 진액은 정의 연장으로 상화가 망동하면 온몸의 진액이 마른다. 예컨대 아이에게 집착하거나 명품 가방에 대한 욕망, 아무튼 모든 욕망을 향한 집착이 상화를 망동케 하고 몸의 진액을 졸인다. 생각해보라! 집착이 생길 때 입이 바짝바짝 타고 피가 마르지 않던가. 노심초사가 바로 상화 망동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왜 『동의보감』에서 마음의 안정을 하라는지 이해가 좀 될 것이다. 과도한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정이 충만해지고 온몸에 진액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다.


현대인이 겪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물질의 과도한 집착에서 생긴다. 이것을 꽉 잡고 버릴 마음이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 현대인은 그것을 쾌락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이것들을 쾌락으로 해소하려는 전제를 바꾸지 않는 한마음의 안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정이 충만해야 가능한 임신 또한 현대인과는 점점 멀어질 뿐이다. 결국 임신을 하려면 쾌락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나를 유혹하는 온갖 욕망에서 자유로워는 일인 것이다.



임신, 쾌락의 노예에서 창조의 주체로


정액을 간직하면서 헛되이 쓰지 말아야 한다. 정을 보배처럼 아끼면 오래 살 수 있다.


황정경


『동의보감』은 정만큼 인간에게 귀중한 보배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배란 과시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과시 욕망조차 『동의보감』에서는 정을 소모하는 행위이다. 순환의 의지가 결여된 상화는 정을 점점 마르게 하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은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간직해야 한다. 인정욕망이 삶의 동력인 현대인에게는 너무 낯선 보배개념일 수밖에 없다. 자랑하지 못하는 걸 뭣 하러 간직하나 싶은. 우리는 정말 몸에 대해 무지하다. 몸을 상하게 하는 활동만 너무나 열심히 하는 중이니 말이다. 
 

정이 부족하면 내 몸은 사막화가 된다. 어떤 생명도 키울 수 없는 불모지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풀 한 포기도 키우지 못하는 신체라니. 정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인간은 원래 120살까지 살 수 있다. 하지만 몸을 함부로 쓰기 때문에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여기서 120살에 주목하면 『동의보감』의 지혜는 증발해 버린다. 물리적인 시간은 사실 중요치가 않다. 어떤 변화에도 삶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의 확보가 중요하다. 이런 균형력이 정에서 나온다. 세월호는 스스로 조율하는 힘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배가 뒤집힌 근원적인 원인은 평형수를 1/4밖에 채우지 않고 과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평형력을 무시하고 능력이나 스펙으로 치장하기에 급급한 우리들의 탐진치의 과적은 존재의 균형을 무너트린다. 『동의보감』에서 명대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비결은 ‘정을 잘 간직하는 것’에 있다. 정을 잘 간직하는 것은 세월호의 평형수를 채우는 일과도 같다. 또한 세월호 사건은 삶의 균형을 잡는 ‘정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환기시킨다. 그런 삶의 균형 잡기가 생명 탄생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삶의 균형을 잡아야 정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제 임신을 위해 내 몸을 병원에 맡기는 짓은 그만하자. 내 스케줄에 맞춰 후딱 낳아버리겠다는 오만한 마음도 내려놓자. 우리 몸은 아이를 낳는 공장이 아니다. 내 몸을 아이를 낳는 기능물로 취급하고 싶은가. 우리는 몸의 주체이자 우주 탄생의 주체이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정의 확보에 있다. 사소한 일에서도 균형을 잡으며 나를 통찰하는 것에서 삶의 균형은 물론이고 임신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동의보감』엔 별의별 노래가 다 담겨있다. ‘정 타령’이라고 들어봤나?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한 선현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이다.


음양의 수양에는 정액이 보배일세. 중요한 이 보배를 고이고이 간직하소. 남의 몸에 들어가면 사람이 생겨나고, 자기 몸에 간직하면 자기 몸이 든든하리, 아이 밸 때 쓰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거든, 어찌 아까운 이 보배를 헛되이 버리는가. 함부로 막 버려 허튼 생각 자주 하면, 몸 약하고 쉬이 늙어 제 목숨 다 못 살리.


경송


아이를 만들기 위해 쓰는 정도 내 몸의 기운을 소모하는 행위란다. 생명 창조에 기여할 때 빼고는 정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 정의 윤리학이 펼쳐진다.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정 타령을 부르고 또 불러서 몸에 새기려는 의지. 임신은 우주적 생성 활동이다. 정은 그 씨앗이다. 그 씨앗인 정을 쾌락을 위해 소모하는 우리의 모습을 깊이 통찰할 때이다. 자기 몸과 소통하는 곳에서 성욕의 제어가 가능해지고, 성의 윤리가 만들어진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정을 생명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다. 이런 윤리를 담은 정이 생성된다면 우주의 리듬에 동참하는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지 않겠는가. 


박장금(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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