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통(疝痛)을 깨다, 대돈(大敦)
“천지는 불인(不仁)하다.”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지는 만물을 무심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차별 없는 마음으로 만물을 대하는 것. 노자는 이 마음의 경지를 불인하다고 표현했다. 노자의 말대로 천지는 무심하고 불인하다. 봄이면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가 가을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죽음의 문턱 앞으로 내몬다. 생(生)과 사(死),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데 차별이란 없다. 만물은 이 생멸의 리듬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루에도 생멸이 있다. 오늘 하루를 살았으면 죽어야 한다. 활동과 휴식, 깨어 있음과 잠. 그것의 순환. 이 끝없이 반복되는 생멸의 리듬으로부터 생사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천지의 마음이자 불인의 지혜다.
천지는 불인하다. 하지만 몸은??
한의학에서 불인(不仁)이란 마비를 뜻한다. 마비란 무엇인가.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 그게 마비의 상태다. 한의학은 이 상태를 병으로 규정한다. 왜일까. 노자의 자연철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한의학이 왜 불인의 상태를 병으로 규정했을까. 이유는 불인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에 있다. 천지가 불인하다는 것은 생사의 어느 국면에도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 변화의 리듬에 어떤 것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 핵심은 유동성과 네트워크다.
하지만 몸에서 나타나는 불인의 메커니즘은 이와는 정반대다. 몸에서 불인의 상태는 외부와 통하는 구석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내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을 때 생겨난다. 네트워크가 끊어진 상태의 몸에선 당연히 고립과 정체가 반복된다. 변화를 거부하고 한 국면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가 지속되면 서서히 몸의 통로들이 막혀버린다. 이 통로들이 완전히 막혀버려 고립된 존재가 되는 것이 마비이자 불인이니 병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 이 불인(不仁)의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있다. 최근 실연을 당했다. 한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던 애인에게서 불쑥 이별통보를 받았다. 몇 번이고 매달려봤지만 여자는 가차 없이 거절했다. 여자의 연락이 없는 동안 남자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분노. 감정들이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거기다 이별통보까지. 남자는 술에 의지했다. 그리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와 잠든 이후 남자의 몸에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배꼽 아래로부터 고환까지 땅기는 증상이 일어나더니 명치까지 통증이 전해져왔다. 또한 손발이 푸른색으로 변하더니 목구멍이 가렵고 눈이 아프고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도 들지 못하고 정신은 혼미하고 잠들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증상과 소변이 계속해서 마렵고 싸려고 해도 찔끔찔끔 나오는 증상들이 반복됐다. 그의 나이 서른. 연애 한 번으로 몸은 노쇠한 노인처럼 되어버렸다.
아, 참. 처량하다. 이별통보 하나에 이렇게 몸이 무너지다니. 드라마 같으면 심한 독감과 함께 애인이 돌아오는 서사가 펼쳐졌을 법도 한데 현실은 참 불인하다. 곧 그의 식구들은 그를 들쳐 업고 의사에게 달려갔다. 의사 왈. “이는 근심하고 분노하여 얻은 병인데, 한습풍우(寒濕風雨)가 그 틈을 타고 들어와 간산(肝疝)이 된 것이다.” 마음의 병에다가 차갑고 습하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비까지 쫄딱 맞은 탓에 간산(肝疝)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의사는 일단 맺힌 것부터 풀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다. 맺힌 것? 정체된 분노와 근심! 그것이 몸에 이런 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이 남자의 병, 간산(肝疝)이란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그런 병에 걸리게 된 것일까.
산(疝), 길을 막다
남자의 병명, 간산(肝疝)은 산(疝)이 간경에서 생겨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산(疝)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부터 살펴보자. “산증(疝證)은 아랫배가 산처럼 단단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정행규, 『특강 동의보감』, 동의보감 출판사, 2007, p.815) 산(疝)이라는 글자에 뫼 산(山)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딱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아랫배에 산(山)만한 것들이 생겨나서 굳어버린 것. 에이, 무슨 몸에 산이 있을 수 있어 하겠지만 이걸 보면 납득이 될 거다. “그것이 술잔만 하기도 하고, 팔뚝만 하기도 하고, 복숭아나 자두만 하기도 하고, 쟁반만 하기도 하다.”(허준, 『동의보감』, 「외형편·전음」, 법인문화사, 2012, p.876)
혹시 산증??
아니 무슨 아랫배에 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고 술잔에 복숭아, 심지어 쟁반만한 것들이 생겨난단 말인가. 사실 이거 보고 좀 뜨악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주먹만 한 자궁근종부터 수박만한 자궁의 물혹까지. 이런 자궁질환들 또한 산증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저건 비유도 과장도 아니다. 그냥 현실이다. 오 마이 갓! 이쯤 되면 산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질병인지 좀 감이 온다.
그런데 이런 산증에 걸리면 좀 볼썽사납다. 아니 병에 걸리면 다 그렇기도 한 것이지만 이 산들은 좀 은밀하게 처리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소변을 못 가리거나(遺尿), 소변이 안 나오거나(癃閉), 발기부전(陰痿), 소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胞痺), 정(精)이 새거나(精滑), 소변이 탁한 것(白淫)은 다 남자에게 생기는 산증(疝症)이다. 피가 말라서 월경이 없어진 것, 허리와 무릎이 달아오르는 것, 다리를 절고 목이 마르는 것, 소변이 안 나오거나(癃閉), 아랫배에 덩어리가 생겨 고정되어 있거나 이동하는 것, 전음(前陰)이 돌출되는 것, 후음(後陰)에 치핵(痔核)이 돋는 것은 다 여자에게 생기는 산증이다.
─ 허준, 『동의보감』, 「내경편·소변」, 법인문화사, 2012, p.508
소중한 정이 흘러나가고 소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자궁에 문제가 생기고 생식기가 돌출되고 치질이 생기고. 아휴, 말만 들어도 보통 문제가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산증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소다. 곧 생식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다는 것. 그게 문제다. 한의학에서 생식기는 전음(前陰)이라고 부르고 항문은 후음(後陰)이라고 부른다. 은밀한 곳(陰)에 있다 하여 전음, 후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은밀한 곳은 몸의 노폐물을 내보내는 중요한 통로다. 소변과 대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곳. 헌데 산증은 이 통로에 문제를 야기한다. 오줌이 나가지 않는 상태, 똥을 누지 못하는 상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럼 산(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산증은 기본적으로 한(寒) 때문에 생긴다. 한기가 아랫배에 침범해서 땅기면서 아픈 증상. 그게 산통(疝痛)이다. 애를 낳는 산통(産痛)과는 다르니 유의하시길.^^ 한(寒)은 겨울의 기운이다. 겨울은 음의 계절이자 수렴의 기운이 지배하는 시절이다. 따라서 천지가 얼고 몸 또한 곳곳이 뭉치는 계절이 겨울이다. 이런 계절의 기운인 한(寒)이 아랫배에 들어오면 산(山)을 만들어낸다. 뭉치고 정체시켜서 쌓아올린 얼음산. 흔히 ‘냉’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한산(寒疝)의 일종이다.
주단계 왈 : 산통은 몸의 수분이 화열에 의해 끓어 오를 때 발생하는 습이 한기에 의해 굳어버리는 게 원인이다.
재밌는 것은 주단계라는 의사의 조언이다. 그는 산통을 습열(濕熱)이 경맥에 몰렸다가 오래된 데다가 바깥에서 한기가 들어와서 굳어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만약 한(寒) 때문이라면 얼음 위를 걷거나 물을 건너다니는 사람들은 다 산통에 걸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 듣고 보니 그렇다. 단지 외인(外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단계는 여기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럼 그가 지목한 산통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대체로 크게 성을 내면 간(肝)에서 화(火)가 일어나고, 지나치게 술에 취해서 배부르게 먹으면 위(胃)에서 화(火)가 일어나며, 방사가 지나치면 신(腎)에서 화(火)가 일어난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모기(母氣)가 자기(子氣)를 허약하게 하므로 비습(脾濕)이 성해지는 것이다.”
좀 어렵지만 원리를 이해하면 한결 쉽다. 산통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위에서 보셨던 습열(濕熱). 이 인용문은 그 습열이 몸에서 발생하는 원리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크게 화내고, 술 마시고 섹스하는 것. 그것이 오장육부를 아주 화(火)끈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또한 그 불은 몸에 습(濕)을 성하게 만든다. 쉽게 생각하면 된다. 물을 끓일 때 나는 수증기. 그게 습(濕)이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이다. 그 물이 불에 의해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상태이기에 습(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습열이 똘똘 뭉쳐서 아랫배 부근에 몰려 있다가 밖에서 한사(寒邪)를 받으면 산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다는 것. 이게 단계가 본 산통의 원인이었다. 모든 병은 그렇다. 내인(內因)과 외인(外因)이 서로 함께 작동해야 병이라는 사건이 펼쳐진다. 하여, 병의 주체는 나이면서 또한 천지다. 이 둘이 함께 작동해야만 병이라는 또 다른 생명이 만들어진다.
산통의 대표적인 증상 가운데 하나인 임증(淋症:소변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증상)도 같은 원리에 의해서 생겨난다.
임증은 다 열증에 속하는데, 간혹 냉증에 속하는 것도 있다. 심신(心腎)의 기가 울체되어 소장과 방광의 기능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성을 내거나 성생활을 심하게 하거나 오줌을 오래 참거나 술과 고기를 지나치게 먹은 것 등으로 인해 습열이 흘러 내려가 간경(肝經)을 침범하여 요도가 막히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열림(熱淋)이나 혈림(血淋)이 되었다가 오래되면 화기가 타들어서 사림(沙淋)이나 석림(石淋)으로 되는 것이 마치 약탕관을 오랫동안 쓰면 거친 모래 같은 앙금이 끼는 것과 같다.
─ 허준, 『동의보감』, 「내경편·소변」, 법인문화사, 2012, p.498
다는 알아들을 수 없더라도 우리가 흔히 요로결석이라고 하는 것이 이 임증의 심각한 증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발견할 수 있다. 오줌에 모래가 섞여 나온다는 사림(沙淋)과 돌이 요도를 막아서 찔끔찔끔 오줌이 나온다는 석림(石淋). 이것들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보다시피 성을 내거나 성생활을 심하게 하고 술과 고기를 들이붓는 생활에 있다. 감정과 욕망이 내 안의 통로를 막는 유형의 장치로 둔갑한다는 뜻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그것이 몸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감정과 욕망은 무형의 흐름이다. 그것이 동일한 방식으로 혹은 패턴으로 반복될 때 그것은 유형의 병으로 전환된다. 곧 마음의 흐름이 몸의 유형적 구성물을 만들어내는 원초적 힘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대표적인 증상이 이처럼 요도가 막혀버리는 증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산병의 세계는 참 어마무지하다. 이 산병들은 다시 7가지로 나뉘는데 아주 판소리 한마당 저리가라다. 한산(寒疝)은 음낭이 차갑고 돌처럼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음경이 발기되지 않는다. 습지에 오래 앉아 있거나 찬바람을 쏘여서 생긴다. 수산(水疝)은 음낭이 붓고 아픈 것이다. 술에 취해서 성생활을 하고 과로로 땀이 났을 때 풍한습(風寒濕)을 만나면 생긴다. 근산(筋疝)은 음경이 붓는 것인데 정액 같은 흰 오줌을 누기도 한다. 대체로 빈번한 성생활 때문에 생긴다. 혈산(血疝)은 오이 같은 것이 아랫배에 생기는 것인데 무더위에서 참지 못하고 성생활을 즐긴 탓에 생겨난다.
몸속에 오이가!!!
또한 정욕이 생겼는데도 내보내지 못하면 몸속에 이 오이가 자란다.(오 마이 갓!) 기산(氣疝)은 아랫배에서부터 음낭까지 붓고 아픈 것을 말한다. 심하게 성을 내거나 울부짖어서 생긴다. 참 고약하다.^^ 호산(狐疝)은 누우면 아랫배로 갔다가 일어나 걸으면 음낭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산증을 뜻한다. 여우(狐)가 밤에는 굴에 있다가 낮에는 나오는 것을 빗대서 이름도 이렇게 지었다. 호산은 한습(寒濕)이 내려간 것인데 흔히 담병(痰病)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퇴산(㿗疝)은 음낭이 됫박만 해지는 끔찍한 산으로 지대가 낮은 곳의 습(濕)에 의해서 생긴다. 간혹 여자들의 자궁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도 이 퇴산의 일종이다.
휴~, 이렇게 많은 산(疝)의 세계가 있을 줄이야! 그럼 이런 산통은 대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것일까. 보다시피 산병의 원인은 주원인은 습열(濕熱)이다. 그것도 하초로 몰려 있는 습열. 일단 이것을 흩어주는 것이 급선무다. 습열을 흩어버리는데 가장 좋은 것은 바람의 기운이다. 바람으로 열을 식히고 습(濕)을 말려버리는 것. 산통을 간산(肝疝)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간경에 습열이 몰려서 생긴 것이 산(疝)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고치려면 간경을 써야 한다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그런데 왜 산을 치료하기 위해서 간경의 도움이 필요한 것일까. 그건 바람과 관련되어 있다.
몸을 감고 오르는 나무, 간경(肝經)
간경은 하초로부터 상초로 올라간다. 즉 다리로부터 몸통을 향해서 올라간다는 뜻이다. 간경의 이 흐름 때문에 간(肝)은 하초에 배속된다. 갈비뼈 밑에 있는 간이 어떻게 다리에 있다는 말이냐고, 그건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그건 단지 과학이 증명한 장소성에 불과하다. 한의학에서 간은 다르다. 그것은 기능적 연관성을 가진 것들의 집합이다. 다른 장부들도 마찬가지다. 어디에 있는가라는 장소성이 아니라 몸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가에 의해서 분류하는 것. 그렇기에 우리에겐 아주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상식을 내려놓아야 우리는 하초에 있는 간을 만나게 된다. 전제를 바꿔야 간 아니 몸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이다. 아무튼! 간은 하초에 있다.^^
헌데 재밌는 것은 이 간경이 생식기를 지나 아랫배를 통과해서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그 혈자리들의 위치를 선으로 쭉 이어보면 놀랍게도 지그재그다. 마치 나무가 돌면서 위로 자라나듯이 간경도 우리 몸을 둘둘 말 듯이 타고 올라간다. 이런 간경을 보고 하늘로 승천하는 용(龍)을 떠올려주신다면 아주 땡큐다. 그렇다. 간경은 나무, 용, 바람 등과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간경이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도 이것이다. 궐음은 풍목(風木)의 기운이다. 풍목이란 바람이 나무를 키우는 계절의 날씨라는 뜻이다. 곧 새싹들이 눈을 틔우고 땅을 뚫고 나오는 계절의 기운이 풍목이다. 그러니까 간경은 봄날의 기운으로 가득 찬 경맥인 셈이다. 간경은 그 대지(陰)의 기운을 받아 하늘(陽)로 뻗어 올라가는 나무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다.^^ 대신 그 봄의 파노라마를 좀 더 감상해보자.
하늘에서 바람[風]이 되고, 땅에서는 나무[木]가 되며, 몸에서는 힘줄[筋]이 되고, 오장에서는 간(肝)이 되며, 오색(五色)에서는 푸른색이 되고, 오음(五音)에서는 각음(角音)이 되며, 사람 소리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되고, 인체의 동작에서는 쥐는 것이 되며, 구규(九竅)에서는 눈이 되고, 오미(五味)에서는 신맛이 되며, 정지(情志)에서는 성내는 것이 된다. 그 진액은 눈물이 되고, 그 영화(榮華)는 손톱에 드러나며, 그 냄새는 누린내가 되고, 그 괘(卦)는 진괘(震卦)가 되며, 그 곡식은 흑미자(참깨)가 되고, 그 가축은 개가 되며, 오충(五蟲)에서는 모충(毛蟲)이 되고, 그 수는 8이 되며, 그 과실은 자두가 되고, 그 채소는 부추가 된다. 그 경맥은 족궐음경이 된다.
─ 허준, 『동의보감』, 「내경편·간」, 법인문화사, 2012, p.395
천지우주로부터 내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 감정, 냄새까지 하나의 계열로 연결되는 멋진 서사. 사실 처음에 나도 그냥 그런 갑다 했다. 헌데 요샌 아주 다르게 읽힌다. 내가 소우주라면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내 안에서도 벌어진다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봄엔 내 안의 우주도 봄이다. 이 우주의 봄과 내 몸의 봄기운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바로 간(肝)이라는 게 핵심이다. 『동의보감』에선 아예 간을 새싹 모양으로 그려놓았을 정도다. 그 그림만 보면 간이 어떤 기운이 모여 만들어진 것인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새싹 모양의 간은 실제로는 핏덩어리다. 혹시 생간을 본 적 있다면 그것을 떠올려보라. 그런데 왜 간은 피, 즉 혈(血)로 만들어진 장부일까. 이 또한 우주의 이치와 맞물려 있다.
봄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물[水]에서 불[火]로 가는 길목에서 나무[木]가 매개역할을 하고 있는 것. 그게 봄이다. 음양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 시기에 음에서 양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즉, 봄이란 겨울의 음기를 양기로 전환함으로써 생동-약동의 기운을 얻는 계절인 셈이다. 씨앗에서 새싹이 나고 그것이 나무로 자라는 과정을 보면 쉽게 납득이 될 거다. 이런 우주의 이치를 그대로 몸에 구현한 것이 간(肝)의 형상(形象)이다. 간의 형체(形)는 음에 해당하는 혈(血)로 가득 차 있고 간은 이 음기를 바탕으로 양기를 발산하는 기운(象)을 낸다. 용이 바다에서 승천하는 것, 나무가 대지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빨아들여 위로 올리는 것. 몸에서 이 작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간은 혈(血)의 바다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간을 혈해(血海)라고도 부르고 몸을 누이면 피가 모두 간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진술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목은 음과 양, 겨울과 여름을 매개한다.
간은 그 음적 토대를 바탕으로 땅도 뚫고 올라갈 수 있는 승발의 기운을 낸다. 이 힘으로 막힌 곳을 뚫는 것은 물론 소화기능을 활성화시키고 감정이 울체되어서 생기는 증상들을 해소한다. 곧 순환을 거부하는 것들, 정체되고 응체되려는 것들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봄바람이 이 간기(肝氣)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아랫배에 자리 잡은 산(疝)을 뚫고 올라가서 그것을 흩어버릴 수 있는 것도 이 봄의 기운에 의해서다. 이를 한의학에선 소설(疎泄)이라고 부른다. 막힌 곳을 뚫어서 통하게 하는 것. 몸의 봄을 구현하는 것. 여기에 핏덩어리 간의 기운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아랫배가 습열로 막히고 그것이 굳어져서 생기는 산통엔 반드시 간경을 써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바람의 기운으로 습열을 말리고 나무의 기운으로 산(疝)을 깨는 것. 그럼 간경의 혈자리들 가운데 숨통이 꽉 막힌 하초를 뻥 뚫어주는 혈자리는 어떤 혈자리일까. 바로 대돈이다.
봄날의 숲, 대돈
대돈(大敦)은 족궐음간경의 정혈(井穴)이다. 복습 삼아 문제. 음경맥의 정혈은 오행상 어떤 기운일까. 답은 목(木)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대돈은 완전 숲이다. 궐음풍목의 목(木)과 간의 목(木), 거기다 대돈 고유의 오행 목(木)까지 합쳐져서 나무들이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 몸에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은 엄지발가락인지도 모른다. 봄이 되면 밖으로 뛰어 나오는 아이들. 그 뛰고 달리는 힘. 그게 엄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대돈은 이 뛰어오르는 목의 기운으로 막힌 것을 뚫는 소설의 대명사다. 그러니 막힌 것부터 뚫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진단한 의사의 처방(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첫 대목에 있었음...)에 가장 적합한 혈자리가 대돈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대돈혈은 그 효과가 무척이나 빨리 나타나는 혈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가령 소화가 잘되지 않는 경우 다른 혈자리가 아니라 대돈만 찔러줘도 금방 효과를 보기도 한다. 또 중풍으로 갑자기 기혈이 막혀서 쓰러진 경우에도 대돈의 뚫는 힘을 이용하면 그 상황을 급반전시킬 수도 있다. 정신줄을 놓고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도 대돈을 찔러주면 곧 정신이 수습된다고 하니 꼭 기억해두자. 트리플 목(木)으로 막힌 곳을 뚫는 혈자리, 대돈!
그럼 이 소중한 혈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대돈은 “엄지발가락의 발톱 끝 외측에서 부추잎만큼 떨어진 곳의 털이 있는 가운데 있다.”(『동의보감』) 이걸 보고는 쉽게 알아들을 수도 설명을 할 수 없으니 그림을 참조하시는 편이 더 속 시원하실 게다.^^ 재밌는 것은 이 위치적 특성 때문에 대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대돈의 돈(敦)은 두텁다는 뜻이다. 그러니 대돈이란 제일로(大) 두텁다(敦)는 뜻이다. 몸에서 제일 두터운 엄지발가락을 뜻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 엄지발가락의 두터운 모습이 대돈이라는 이름을 갖게 했던 것이다. 사실 돈(敦)은 고대에 사용하던 큰 그릇을 뜻하는 글자였다. 여기에 먹을 것을 담아 보관하거나 먹을 것을 담아 찌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먹을 것, 음식. 그게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간(肝)과 연결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간은 음식으로부터 만들어진 혈(血)을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이기 때문이다. “무릇 음기가 아래로 모이면 아주 넓고 후하기 때문에 대돈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혈이 거대하게 모이는 그릇, 간과 대돈. 대돈은 또한 “큰 경기(經氣)가 돈독하고 후하게 생기는 근본혈”로 불린다. 간에서 양기가 승천하듯이 대돈에서 또한 양기가 일어나 경맥을 채운다. 자, 이제 좀 느껴지시는지. 봄날의 숲처럼 파릇파릇한 기운이 서려있는 엄지발가락의 대돈이.(난 왜 돼지고기가 떠오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처음에 등장했던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살았다. 의사가 3개월을 전력으로 치료해서 이전의 상태로 만들어 놨다. 초죽음이 되어 있던 남자를 단 3개월 만에 다시 사람 몰골로 바꿔놓았다는 게 참 놀랍다. 더구나 불과 얼마 사이에 노인이 되어버린 남자 또한 놀랍기 그지없다. 물론 그를 병들게 한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치료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알겠다. 생명은 유동성과 네트워크라는 천지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 자신을 구성했다. 이 원리를 벗어나자마자 몸은 막히고 정체되고 고립된다. 남자에게 실연은 고립과 정체를 가져다줬다. 그것이 병이 된 것은 물론이다. 허나 그 병이 의사와 가족과 약물과 침과 뜸과 우주를 몸으로 불러들였다. 병이 만든 관계, 그것이 생명력을 되살리는 입구가 되어준 것이다. 병이 가져다준 생명력. 봄에 병든 자들이여, 기억하라. 그 병이란 마음을 열라는 몸의 농성이다. 마음을 열면 몸이 우주와 통하고 몸이 열리면 마음이 우주적 비전에 가 닿는다.
류시성(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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