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비추는 햇살
강가에 나무(마산 토박이)
그날도 어둠이 장막처럼 온 집안을 휘두르고 있었다. 큰댁에서 내려오신 할머니는 큰방 마루에 앉아 당신 무릎에 나를 앉히시더니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올려주셨다. 가볍고 보드라운 데다 포슬거리던 그것은 마당에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발과 날개, 부리가 솟아 나와 삐약삐약거리며 온종일 잰걸음으로 걸어 다닐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쥐어주신 것은 다름 아닌 카스테라였다. 귀한 것을 받들듯 공손히 두 손 위에 올려놓은 채, 한입 베어 물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여섯 살 어린 마음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삶은 이렇게 환하고 보드라우며 가볍고 따뜻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의 감각 같은 것이 처음으로 찾아든 날이었다.
한 번도 집을 떠나 계신 적이 없으셨던 할머니가 부천 큰댁에서 얼마간의 생활을 마무리하시고 중풍 든 할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신 그날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누구보다 부성애가 강한 아버지셨지만 어떻게든 이 어린 것들을 혼자서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은 때때로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았다. 잠시 고아원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까, 좋은 가정에 입양 보내는 게 맞을까, 차라리 다 같이 죽어버리는 게 나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드는 생각들로 괴로워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어린 우리라고 모를 리 없었다. 아버지의 근심이 구름이 되고, 괴로운 탄식이 빗물처럼 마음으로 흘러들 때마다 정말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렵던 날들, 할머니가 내 손에 올려주신 것은 달콤한 빵이 아닌 내 삶을 따스하게 비춰 줄 고마운 해님이었다. 그렇게 다시,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태어나 엄마보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나는, 할머니가 떠먹여 주시는 밥을 먹고 자라 어린이가 되었다. 이 말인즉슨, 나도 이제 사람 노릇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할아버지의 식사 시간, 할아버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할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직, 몸이 작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막중한 사명감을 지니고 꼼짝하지 않은 채 내가 온몸으로 할아버지를 받치고 있는 동안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밥과 반찬을 떠먹이셨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은 할머니가 천지신명께 기도하시는 날, 나는 시종 복사가 되어 정화수가 올려진 교자상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할머니를 따라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할머니가 멈추어 서시면 거기에 조심스레 상을 내려놓고는, 할머니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비손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족들을 위한 염원이 담긴 할머니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귓가에 닿을 때마다, 내 기도를 살짝 얹어보기도 했다. 계모임 날 저녁이면 유독 밤길을 무서워하시던 할머니를 모시고 창동으로 갔고, 누구네 아들딸 결혼식이 있는 날에는 할머니와 버스를 타고 예식장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사람들은 선뜻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할머니는 혼자 편안히 앉으셔도 될 것을 항상 당신 다리 사이나 무릎 위에 어떻게든 나를 꼭 앉히셨다. 충실했던 수행비서에 대한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였다.
그렇게 할머니 뒤를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녔지만, 딱 하나 싫은 것이 있었다. 라면 봉지를 들고 가서 두부를 사 오는 심부름이었다. 비닐봉지는 가게에서 주는 것이고 거기에 두부를 넣어 온다 해서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할머니는 싫다는 내 손에 기어코 라면 봉지를 들려 보내셨다. 그때마다 뾰로통해진 나는 누가 라면 봉지를 보기라도 할 새라 잽싸게 뛰어 다녀왔다. 목욕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흘러넘치는 물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셨고, 누가 물을 펑펑 쓰기라도 하면 그 헤픔을 몹시 안타까워하셨다. 할머니에겐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었다. 비닐봉지 한 장, 물 한 방울을 그 자체로 귀히 여기신 것이다. 그건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택시를 타게 되는 날이면 우리 셋째 아들도 택시 운전수라며 몹시 반가워하셨고,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이 많다시며 당신 자식처럼 측은해 하시고 안쓰러워하셨다.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좀처럼 밖을 다니지 않으신 할머니는 집안일에 무척 부지런하셨다. 아침상 준비와 설거지 같은 아침 집안일이 마무리 되면, 그제야 보라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와 앉으신다. 긴 머리카락을 땋아 쪽진머리에 비녀를 꽂으신 뒤엔 잔머리가 나오지 않도록 동백기름을, 얼굴엔 생기가 돌도록 분 같은 것도 살짝 바르셨다. 단장이 끝나시면 그때부터 다시 집안일이 이어졌다. 장독대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틈만 나면 깨끗이 닦으셨고, 볕 좋은 날이면 장독 뚜껑을 열어 햇살과 바람을 쐬어 주셨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도 가만 놔두질 않으신다. 골고루 잘 마르도록 앞뒤로 한 번씩 꼭 뒤적이셨고, 서편으로 어느 정도 해가 기울면 습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며 서둘러 빨래를 걷으셨다. 목화솜 이불 홑청 가는 날엔 새 홑청에서 뿜어져 나오는 개운한 빨래비누 향이 큰방을 가득 메웠다. 할머니가 무슨 노래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야릇한 콧노래를 부르시며 잔꽃무늬 홑청을 시침질하시는 동안 비누 향에 취한 나는 할머니의 콧노래를 자장가 삼아 달디 단 낮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돌아서면 일이고, 해도 표 안 나고, 안 하면 금세 표 난다는 집안일, 나는 그 수많은 집안일 중 하나라도 거들고 싶어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나섰지만, 할머니는 시집가면 지겹도록 할 일을 뭐하러 진작부터 하냐시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런데 그 일이, 생각보다 빨리 주어지게 되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이미 여든에 가까우셨던 할머니의 몸 곳곳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진즉부터 아프셨는데,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지셨다는 게 맞을 게다. 그렇게 집안일을 맡기게 되셨지만, 할머니는 그것이 안쓰러우셨는지, 날마다 그만하고 어여 방으로 들어와 쉬라고 야단이셨다. 한겨울 집안일을 끝내고 꽁꽁 언 손발로 이부자리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내 두 손을 품에 안아 녹여주셨다. 할머니는 그렇게 집안일을 하나씩 놓으셨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놓지 못하신 일이 있었다. 날마다 대문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시는 일이었다. 오르막길 입구에서 할머니가 보이면 나는 손을 흔들었고, 할머니는 어여 올라오라고 손짓하셨다. 그 따뜻한 환대의 몸짓이 내게는 그날 하루의 크나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더 기력이 쇠해지셨고. 지난날의 부지런함은 오간 데 없이 목욕을 가야 한다, 귀찮아서 못 가겠다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벽 일찍 할머니를 업고 목욕탕엘 다녀오기도 했다. 여름날에는 가벼워진 할머니를 덜렁 들어 부엌 바닥에 앉혔다. 할머니가 중풍 드신 할아버지를 씻겨드리던 그 자리에서, 내가 할머니를 씻겨드리고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할머니는 아이가 되어가셨다. 그래도 할머니 눈에 나는 여전히 어린 것이었는지 직장에 다니게 된 후로도 출근할 때면 날마다 동전 몇 닢을 쥐어 주셨다. 사람이 수중에 얼마간 돈이 있어야 든든하다 하시며, 밖에 나가 배고프면 굶지 말고, 무어라도 사 먹으라는 당부와 함께.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대문 앞에 잠시 바람 쐬러 나가신 할머니가 넘어지시고 말았다. 고관절에 금이 가신 할머니는 그길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다행히 병원이 집 근처에 있었고, 집과 직장 그리고 병원이 각각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할머니를 찾아가 수건으로 얼굴과 손발을 닦아드리고, 간식을 챙겨드리며, 기저귀를 갈아드렸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요일엔 하루 종일 할머니 곁에 있었다. 옥상 정원에서 바람을 쐬게 해드리거나, 할머니가 낮잠에 드시면 그 곁에서 나도 잠이 들었다. 문득 할머니는 지금 수행 중이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를 고집하거나, 자신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타인에게 내어 맡겨야 하는 시간을 견디고 있는 수행자 말이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병원에 계신 동안 날로 얼굴이 고와지셨다. 얼굴이 아이처럼 맑아지셨다. 내가 본 할머니의 모습 중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할머니처럼 되고 싶었다.
할머니는 나와의 서른 한 해 동거를 끝내시고 아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작은 몸으로 상처 입은 어린 것들을 품어내시고, 살아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 모두를 참으로 귀애하셨다. 내가 서른 한 해 동안 할머니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고, 할머니의 손녀로 살아갈 수 있었음은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내 두 손에 올려주셨던 카스테라, 해님과도 같았던 그것은 다름 아닌 할머니의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지금도 여전히 내 삶을 따뜻하고 환하게 비추고 있음을 믿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였다. 반점 하나 없는 새하얀 고양이 한마리가 찾아와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봉숭아 화분 앞에 한참을 앉아 물끄러미 꽃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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