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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온 편지

[마산에서 온 편지] 사막에서 피어나던 꽃들

by 북드라망 2026. 10. 12.

사막에서 피어나던 꽃들

강가에 나무(마산토박이)


대학에 가면 더 큰 세상과 배움을 마주할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수능 한 해 전이던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교대와 사범대 합격선도 덩달아 올랐다. 그전까지만해도 원하던 사범대에 무난하게 합격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지원조차 생각지 않았던 경남대 사범대에도 낙방하고 말았다. 한 해 뒤 재수 끝에 합격했지만 새내기의 설렘 대신 패배감이 엄습했다. 지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던 대학, 그것도 재수해서 들어갔다는 사실은 아버지께 실망을 안겨드렸다. 치열한 학과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었다. “선배, 인생이 뭐예요?” 한 해 먼저 다른 대학에 입학한 친구는 선배에게 이렇게 물었다지만 여기서는 사치스런 질문이었다. 모두가 경주마 같았다.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차안대를 끼고서 오로지 임용고사라는 결승선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학과 공부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교사가 되려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전공보다는 인문대에 수업에 더 마음이 갔고, 철학과 심리학과 수업을 기웃거렸다. 결국 1학년 겨울방학, 학년 담당 교수님의 호출이 있었다. 무척 성실하게 생겼는데 너무 공부를 안 한다는 이유였다. 교수님은 내가 성당에 다니고 있고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는 걸 들으시고서는 오히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느님은 나와 마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등 뒤에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더 깊고 넓게, 아름다운 것들을 끊임없이 바라보라는 말씀이셨다. 

인문대 수업을 듣는 것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사범대 학생들이 점수를 따기 위해 인문대 수업을 듣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학과 친구들은 우리 과에 개설된 비슷한 종류의 수업을 국문과에 가서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상대적으로 사범대 학생들의 입학 점수가 높다 보니 성적이 좋기도 했고, 한 번의 공부로 두 과목의 성적을 쉽게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심리학과 수업 첫 시간, 출석 체크를 하시던 교수님은 내 차례가 되자 이 수업을 왜 들으려 하냐고 따지듯 물으시기도 했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요.’ 억울했지만 간결하게 말씀드렸고, 학기 내내 그것을 증명하느라 애썼다. 이메일로 마지막 과제를 제출했던 날, 교수님은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했다는 사과와 함께 한 학기 동안 수고 많았다는 따뜻한 격려가 담긴 답장을 보내오셨다.

 

인문대에서 사범대로 오르던 길


대학 2년 동안을 그렇게 방황했다. 어려운 처지에 재수까지 해서 들어온 대학에서 이렇게 지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같이 재수를 하고 함께 입학해 위태롭던 나의 일상을 다독여주던 친구가 휴학을 하게 되면서, 나는 어떤 울타리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3학년이 되자 마치 겨드랑이 밑에 숨겨진 날개가 돋으려는 듯, 마음이 조금씩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산에서 거제까지 걸어가는 향토순례대행진에 참여해 학과 밖 활동도 처음으로 해보았다. 학과 생활이나 공부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대학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어울리는 고정된 무리는 없었지만 누구에게나 경계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4학년이 되자, 나도 고시생의 반열에 올랐다. 그전부터 동기들은 주말이면 인근 대도시의 임용고시학원으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여럿이서 인터넷 강의 수강료를 내고, 교육학 강의를 나눠 듣는 일도 흔해졌다. 공교육의 교사가 되기 위해 사교육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는 학원에도 인강에도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현실성 제로의 뜬구름 잡는 듯한 생각이 안쓰러웠는지, 친구와 선배 몇몇이 나누어 듣던 교육학 인강을 같이 듣자고 제안했다. 적어도 교육학은 억지로라도 듣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려운 처지에 삼삼오오 돈을 모아 강의비를 마련했을 동기와 선배들의 고마운 마음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나도 사교육의 수혜자가 되기로 했다. 

‘쟈가 저래가 우짤라고 그러노.’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부산 혹은 대구로 주말이면 수업을 들으러 갔던 친구들은 거기서 받은 모의고사 문제지를 챙겨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대체로 서로 다른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서로가 경쟁 상대이니 자료를 공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도 동기들은 스스럼없이 나에게 그 귀한 문제지를 전해주었다. 무릇 사랑은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하는 법! 이 무상의 증여를 차마 내 안에만 가둘 수 없었다. 부산 학원에 가는 친구에게는 대구에서 온 문제지를, 대구에 다니는 친구에게는 부산에서 온 문제지를 부지런히 날랐다. 

그렇게 치열했던 시간이 지나고 몇 안 되는 동기들이 그해 임용고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몇몇은 서울 고시촌으로 떠나고, 또 몇몇은 지역에 남아 기간제 교사나 학원 강사로 일하며 다시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학원에서 아이들 시험 점수에 매달려 정답만을 강요할 자신이 없던 나는, 학교에서 주차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마침 학과 조교를 맡을 사람을 찾고 있던 교수님들의 눈에 띄어 2학기부터는 우리 과 조교를 맡게 되었다. 학과 일로 늦게까지 일을 하게 되는 날이면, 도서관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공부만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럴 재목은 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임용고시 객관식 문제들의 정답을 맞히기 위해 눈부신 젊은 날을 도서관에서만 보내야 하는 동기들과 선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밀려들었다. 친구들의 서울에서의 고시원 생활 이야기를 듣거나, 스트레스로 속병이 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고군분투하는 그네들의 시간에서 내가 늘 한 걸음 물러서 있단 생가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고통에서 나 홀로 비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유망했던 사범대, 그럼에도 국어교육과는 졸업 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영어교육과는 토익시험 점수가 높으니 어디든 취업이 수월했고, 수학교육과는 학원으로 가게 되면 대우도 좋았으며, 개인 과외의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하지만 국어는 어딘가 좀 애매한 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상위권이었던 아이들, 사범대에 들어가 교사가 되리라 생각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온 이들이 거듭된 낙방에 위축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몹시 안타깝고 마음이 쓰라렸다. 그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그럼에도 네가 얼마나 좋고, 여전히 멋진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말해주고 싶었다. 

한번은 처음으로 가본 야구 경기장에서 우연히 후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머, 재호야.’ 반가움과 함께 아주 큰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배는 구단 전속 촬영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짧은 안부만 묻고 돌아섰지만, 그때, 내가 후배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속에는 사실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아... 재호야. 네가 여기서 카메라를 들고 있다니, 이게 웬일이니. 그럼에도 이렇듯 어딘가에서 성실하게 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네가 이렇게 지내주어서 너무 고맙고 감사하구나.’ 후배와의 짧은 마주침이 내게는 오랜 여운을 남겼다. 차마 물어보지 못한 그간의 사정까지도, 후배가 거쳐 왔을 모든 시간 앞에 엎디어 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몇몇 대학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 졸업 후 한동안은 서로의 당락을 묻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누군가의 합격 소식을 내 일처럼 반가워했고, 지금은 누가 무슨 일을 하며 산다는 소식을 더 자주 나눈다. 어떤 이는 일찍 출가해 스님이 되었고, 누군가는 유명한 밸리댄스 강사가 되었으며,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동기도 있다. 나 역시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신은 그저 우리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직장을 다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교사가 내 오랜 꿈이었다는 걸 알고 있던 한 친구가 물었다. “윤지야, 선생님이 되지 못한 게 서운하거나 아쉽지 않니?” 준비라도 한 것처럼 나는 곧장 대답했다. “그럼, 전혀 서운하지 않아.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고 그걸 나누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 배움과 가르침은 어디서든 가능하니 그것이 꼭 학교일 필요는 없지. 아니 이 세상 모든 곳이 학교나 다름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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