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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젠더 트러블』 이후의 주디스 버틀러 ① ― 주디스 버틀러는 왜 『젠더 트러블』에 머물지 않았을까?

by 북드라망 2026. 11. 3.

『젠더 트러블』 이후의 주디스 버틀러 ①

― 주디스 버틀러는 왜 『젠더 트러블』에 머물지 않았을까?

'주디스 버틀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역시 『젠더 트러블』입니다. 1990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버틀러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성 혹은 남성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의 효과라는 것이지요. 그 유명한 ‘젠더 수행성’입니다.

 



그런데 『젠더 트러블』이 출간된 것은 벌써 36년 전입니다. 이선현 선생님의 『주디스 버틀러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버틀러는 그의 긴 사유 가운데 ‘초기 버틀러’에 가깝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세계가 달라지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젠더 트러블』이 등장한 1980~90년대 미국에서 버틀러가 마주했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페미니즘 내부의 정체성 정치였습니다. 여성 해방을 말하려면 우선 ‘여성’이 누구인지 규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는 순간, 그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는 여성들이 생겨납니다. 인종도, 계급도, 성적 지향도 다른 수많은 여성의 삶을 하나의 ‘여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버틀러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세계는 계속 변했습니다. 1991년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합니다. 폭행 장면은 영상으로 촬영되었지만 경찰관들은 무죄 평결을 받았고, 이는 1992년 LA폭동으로 이어집니다. 버틀러는 이 사건을 보면서 ‘본다’는 것이 과연 중립적인가를 묻습니다. 똑같은 영상을 보고도 누군가는 경찰의 폭력을 보고, 누군가는 경찰을 위협하는 흑인 남성을 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조차 이미 사회의 규범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젠더를 향해 있던 질문이 이제 인종과 재현, 그리고 ‘누가 인간으로 보이는가’라는 문제로 넓어집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9·11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버틀러의 사유에 커다란 전환점이 됩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전쟁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이어졌습니다. 버틀러의 시선도 미국 내부의 젠더와 성적 자율성의 문제에서 국경 밖의 타자에게로 움직입니다.

 

 


누구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누구의 죽음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우리’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어떤 사람은 애초에 인간적인 얼굴로조차 인식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서 버틀러의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후 전쟁과 폭력, 신자유주의, 프레카리티, 박탈된 몸들의 연대와 비폭력의 문제로 계속 뻗어 나갑니다.
젠더 수행성을 이야기했던 철학자가 인종과 타자를 만나고, 9·11을 통과하고, 전쟁과 국가 폭력을 사유하고,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내는 불안정한 삶을 바라보다 도착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서로를 선택한 적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의 세계』가 버틀러의 사유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버틀러의 개념을 하나하나 익히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 철학자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씨름하면서 자신의 질문을 어떻게 바꾸고, 이전의 생각을 어떻게 수정하고 확장해 갔는지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철학자는 하나의 훌륭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기보다 세계가 달라질 때 자신의 질문도 바꿀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요.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 '이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음에는 후기 버틀러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조금 낯선 단어, '프레카리티'에 대해, 왜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더 위태로운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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