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트로
투 비 컨티뉴드!
박소연(남산강학원)
정확히 1년 반 전에 ‘웰컴 투 더 에로스 로드’(글의 인트로)를 썼다. 그 당시 나의 포부는 상당히 야심 찼다. ‘아웃트로를 쓸 때쯤엔 간디와 조르바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현명한 연애를 하는 중이겠지? 브라마차르야(학습기)에서 그리하스타(가주기)로 넘어가나요? 유후~’ 게다가 2026년은 하필! 병오년이었다. 병(丙)화와 오(午)화는 나와 같은 ‘금(金)’ 일간에게는 ‘관성’, 즉 연인이나 배우자 운에 해당한다. 세상에, 새해의 기운마저 나의 에로스를 돕는구나. 그러나 병오년은 나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아웃트로를 쓸 때까지 연애를 못 하고 있을 줄이야. 연애 스토리를 풀면서 아웃트로를 마무리하려던 계획이 틀어져서 마지막 글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나는 분명히 이전보다 더 생기롭게 살고 있다. 글을 쓰는 시간 동안 에로스가 점점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힘이 연애로 발현되었다면 설명하기 간단했겠지만, 아쉽게도 실패. 대신 삶의 면면이 어떻게 색달라졌는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뚜렷한 사건이 있는 게 아니라 어렵다. 너무 어렵다. 어디에도 몸을 숨기지 못하고, 변화한 딱 그만큼이 드러날 글이 두렵기도 하다. 이해한 만큼만, 나아간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꺼내놓고, 나머지는 이어질 공부 길에서 보충하기로. 어쩌면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모태솔로라는 정체성은 꾸준하면서도 ‘에로스 로드’의 여정 전후로 많이 달라졌다면 공부의 ‘순수 효과’를 증명할 수 있을 테니. 마지막 글을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지 머리를 쥐어뜯다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이렇게 결론 내렸다.
지금까지 간디와 조르바의 에로스를 교차편집하여 들여다보았다. 얼핏 봐도, 뜯어 봐도 많이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의 에로스는 어느 지점에서 통합될까? 성욕의 절제와 분출이 어떻게 같은 방향성을 지닐 수 있을까? 금욕이라고 하지만 사실 참는 게 아니고, 분출이라고 하지만 고도의 절제가 담긴 그들의 에로스. 이제 사랑 장인들이 서로 만날 차례다. 실제로 간디는 1869년생, (기오르고스) 조르바는 1865년생으로 두 사람은 동년배 친구이다. 인도의 아버지 간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자유인 조르바. 사회 참여형 인간인 나에게는 간디의 삶이 눈에 더 들어오지만, 두 사람 모두 죽는 날까지 세상에 깊이 참여하며 살았으므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절제와 억압의 차이
브라마차르야를 공부하며 가장 좋았던 것은 그 안에 대상 없는 기쁨이 있다는 관찰이었다. MBTI ‘I’ 타입인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알콩달콩 잘 보내는 편이다. 그럼에도 종종 일종의 외로움이랄까, 잘 언어화되지 않는 요상스러운 감정이 찾아들 때가 있다. 평소엔 별생각이 없다가도 그럴 때면 연애가 하고 싶다. 스승, 친구, 가족과는 또 다른, 연인이란 관계성이 헛헛함을 채워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썸 비스무리한 것(?)을 겪으며 눈치를 좀 챘다. 그건 연애를 한다고, 연인과 일상의 시시콜콜함을 공유하며 친밀감을 나눈다고 해소될 감정이 아니다. 홀로 쉬는 법을 알아야, 나라는 존재만으로 빈 시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타인과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다.
아주 가끔 명상이 잘될 때 텅 비워진 동시에 날렵한 생생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나라는 존재만으로도 퍼즐이 완전히 맞춰진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분리된 한 덩어리의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개체가 아니다. 무척이나 많은 존재와, 조금 추상적이지만, 세계와 연결된 ‘나’이다. 혼자서 명상하고 있는데, 어떻게 충만함을 감각할 수 있을까? 타자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덩어리들. 그것들이 뭉근해지고, 조각나고,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가듯 비워졌기 때문이다. 브라마차르야의 핵심은 ‘비움’이다. 생각, 말, 행동이 일치되려면 우선 잡다한 생각들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다음 생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해체해야 한다. 나를 부정하는 목소리와 타인을 탓하는 목소리, 들끓는 생각을 비운 자리에 진리, 그 순간의 옳음이 드러난다. 나는 명상이 잘될 때만 그런 느낌을 맛봤지만, 간디는 그러한 순간을 일상의 모든 행위로 연장시켰다. 까르마 요기, 모든 행위를 요가로 만드는 사람. 명상의 일상화. 브라마차르야 공부가 나에게 준 앞으로의 과제이다.
브라마차르야는 사실 쾌락하거나, 금욕하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자제와 억압의 차이를 짚고 가야 한다. 스스로 부과한 자제의 항목들은 모두 한 가지 목적만을 지닌다. 자유. 절에서 지낼 때 다이어리를 매일 썼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1년을, 한 달을, 하루를 보내야 할지 틈틈이 점검하는 글과 함께 그날 끝마쳐야 하는 일을 수첩에 적었다. 그 종이 한쪽은 내게 주어진 제한이었다. 단골 일과였던 108배와 명상, 경 읽기, 조금의 학과 공부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작게나마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자유로워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면 답답함에 휩싸여서 진즉 절을 뛰쳐나오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나를 억압했던 것인가? 지금 돌아보면 그 자제의 순간들은 ‘목(木)’ 기운 많은 나에게 꼭 필요했다. 그때의 나는 부자유스러웠나? 모든 항목에 동그라미를 그린 날엔 가슴 뿌듯하게 잠들곤 했다. 덕분에 매일 소소하게 기뻤다. 간디의 언어를 빌리자면 나는 비록 제한적이었으나, 날마다의 행위를 창조했던 거였다. 공부하고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함께 공부하는 과정이, 글 한 편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이 여행 가서 맛있는 걸 먹고, 멋진 풍경을 보는 것보다 더 압도적이다. 그 쾌감을 맛봐버렸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물론 책 읽고 글 쓰는 와중에도 망상은 일었다 스러지길 반복한다. 미래에 대한 우려, 사사로운 욕망들을 하나둘 내려놓는 것. 때론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가 가장 역동적일 수 있다. 마음으로 창조하는 행동은 엄청난 환희를 동반한다. 그건 나만 아는 기쁨, 대상 없는 기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각과 말과 행동, 이것이 일상의 동선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한 번에 하나밖에 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동시적으로 여러 가지를 할 수는 없다. 하여, 여기서 삶이 결정된다. 생각의 리듬, 말의 기운, 행동의 방향. 이 세 가지가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이 분열을 극복하여 신체와 일상을 리드미컬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배려의 포인트다.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187쪽)
자기 절제는 고도의 자기 배려다. ‘선’과 ‘진실’을 기준에 놓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비추어 보면 어떤 생각,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가 명확해진다. 존재는 잉여가 없을 때 가장 행복하다. 생각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놀면, 그것들이 일치되었더라도 진실하지 못하다면 마치 뼈가 뒤틀린 사람처럼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 술, 고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틀림없이 지킨 간디가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 떳떳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한 맹세는 과연 억압인가, 자유로 가는 문인가?
욕망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출구가 사라질 때 그 욕망은 악해진다. 성욕이 집착으로, 식욕이 탐욕으로, 인정 욕망이 질투로 향하는 것이 문제다. 욕망이 사악해질 때 존재 또한 괴로워진다. 간디는 그러한 ‘사로잡힘’에 질문했던 것이다. ‘나는 이걸 원해선 안 돼. 나는 성욕에 사로잡혀서는 안 돼’ 외치면서 자기와 싸움하는 건 브라마차르야의 비전이 아니다. 자기 절제는 욕망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력을 응축하여 무한한 행동을 창조하기 위해서. 어디에 나의 생명력을 쏟아부을지 방향을 정하는 작업인 것이다.
모든 힘은 생명 창조의 원동력인 생명력의 순화와 발현에서 나온다. 생명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응축시키면 그 힘이 최상의 질서인 창조의 에너지로 바뀐다. 하지만 그 생명력은 악한 생각에 의해 흩어진다. 생각은 모든 말과 행동의 바탕이므로 말과 행동의 좋고 나쁨은 생각의 좋고 나쁨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통제된 생각은 최상의 잠재력을 지닌 자주적인 원동력이 된다. 마치 구멍 뚫린 주전자에서 힘찬 수증기가 분출될 수 없듯이, 에너지가 분산된 사람에게서는 힘찬 생명력이 나올 수 없다. (『간디 명상록』, 마하트마 간디 지음, 이명권 옮김, 열린서원, 122쪽)
‘프로 욕망러’의 기술
방향 이야기를 하자면 조르바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인가? 맞다! 여기서 욕망이라 함은? 욕망은 보편성을 향할수록 자유롭다. 달리 말하면 사심 없는 욕망이라야 무해하다. 욕망이 특정한 대상이나 미래의 보상에 매이는 순간, 나는 욕망의 하수인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천당을 믿고 거기에다 나귀 한 마리씩 매놓고 있어요. 나는 나귀도 없고, 그래서 자유로워요. 나는 지옥이 두렵지 않아요. 거기서 뒈질 나귀가 없으니까. 나는 천당도 바라지 않아요. 거기서 토끼풀을 신나게 뜯어 처먹을 나귀가 없으니까.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11쪽)
천당에 나귀 한 마리 매어 놓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순수한 의미의 천당이 아니다. 천당에 있는 나귀를 가지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어떤 보상을 보고 움직이는 것은 조르바의 취향이 아니다. 현재의 욕망을, 현재의 행동을 미래를 위한 것으로 오염시키는 나귀라는 존재는 조르바에게 하등 필요 없었다.
간디처럼 밀밀한 방식의 자제이든, 조르바처럼 다 때려 넣고 토하는 급진적인 방식이든 방법은 다르나 방향은 같다. 지금의 내가 간디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디가 이미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서 길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조르바의 방식은 겉보기에 쉽지만, 더 까다롭다.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에게서 잃어버렸던 밝은 빛을 되찾아주는 푸짐한 입과 커다란 귀를 지니고 있는가. 사랑과 소유욕을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가 나의 외로움을 해소해주길, 자존감을 올려주길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의 욕망이 나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몇 가지만 질문해봐도 어려운 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나귀를 매어 놓지 않고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행위 자체로 충분하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공부하는 지금, 나의 나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희망,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나귀의 부작용은 현재와 천당 사이의 괴리를 너무 크게 보여준다는 것. 갈 길이 너무 멀고, 해야 할 공부가 끝도 없어 보였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고, 마감이 닥쳐서 급하게 휘갈기는 글을 쓰고 싶지 않은데 항상 실패했다. 글쓰기를 일상에 붙이고 싶은 바람과는 반대로 매번 맨 마지막 순서로 미루게 되는 것이 글이었다. 청년 친구들 피셜, 깨봉 1대 미스터리는 곰샘의 글쓰기다. 선생님이 제일 바쁜데, 글을 제일 많이 쓰신다. 동시에 서너 편을 쓰는 곰샘을 보면서 그 비결이 늘 궁금했다. 곰샘이 곰샘인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게 당연하듯이 선생님은 쓰는 게 당연해서 쓴다고 하셨다. 어떤 일을 할 때 나귀 하나쯤 매어 놓는 게 나에겐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오히려 나귀 따위 필요 없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뉘앙스가 신선했다.

토끼풀을 뜯어 처먹을 나귀가 없으므로 천당도 바라지 않는다는 조르바. 조르바는 천당이 필요 없다. 오르탕스 부인과 사랑을 나누고, 두목과 함께 수다 떠는 것보다 더 나은 천당은 없으므로. 아름다운 초록빛 보석을 보는 순간이 곧 천당이므로. 조르바의 마음과 몸은 언제나 뜻을 같이 한다. 에로스 자체가 몸이 되고 마음이 된다. 말 그대로 사랑의 화신!
“나는 살아가며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사실은 별로 한 것이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죠. 안녕히 주무세요!” (위의 책, 636쪽)
조르바의 유언이다. 그의 이 말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책으로 태어난 두둑한 인생 스토리가, 그 별의별 활동이 모두 있으면서 없는 것들이다. 찾으러 갈 나귀가 없기 때문에. 백만 번을 움직여도 흔적이 남지 않는 행위. 이런 사람은 천 년을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천 년이 백 년이고, 60년이고, 1년이고, 하루일 테니. 삶에 대한 미친 자신감을 뽐내는 것도 모자라서, 삶을 등지고 떠나는 마당에 산 자들에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건넨다. 흔히 죽음을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것으로 비유한다. 조르바의 눈에는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두 잠에 취한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에로스의 기적
민중은 잊어버리기를 잘한다. 내 생각에는 마하트마의 교훈도 먼 옛날부터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인도인의 기억에 오래 보존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가 자기의 위대성만으로 위대해질 때, 그 위대성은 주위 사람들과 호흡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동의 천재는 반드시 민족의 본능과 당대의 요구와 세계의 대망에 순응하게 마련이다. (『마하트마 간디』, 로맹 롤랑 지음, 최현 옮김, 범우사, 145쪽)
글을 쓰는 동안 간디와 조르바의 멋진 면모들에 감탄하곤 했다. 가끔가다 그 씨앗들을 내 안에서 발견할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두 사람을 책 속에서 끄집어내 현재에 숨 쉬게 만들고 싶다. 간디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간디가 인도인들의 가슴에 잠자고 있던 불타와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깨웠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도인들은 간디를 ‘바푸’라고 부르며 의지하고 따랐다. 간디의 말이 그들 조상의 말과 같았고, 간디가 그랬듯 모든 후손들에게 이미 심어진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민중이 소금행진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비폭력의 인간화와도 같았다. 간디의 위대함은 붓다를 포함하여 인도에서 나셨던 모든 성인의 전승이다. 간디는 브라마차르야라는 일상의 계율을 실천하며, 비폭력의 신체-되기를 훈련하며 그의 행동으로 과거의 붓다와 마하비라, 예수님을 불러왔다. 그 모두를 머금고 있는 간디의 말과 글이 나에게 흘러왔으니, 나는 나의 행동으로 간디를 현재에 불러와야 한다.
마음이여, 너와 나는, 우리들은 그에게 피를 주어 삶을 되찾게 할 터이며, 먹고 마시고 말처럼 일하고 여자를 쫓아다니는 놀라운 뜨내기가, 춤을 추면서 싸우는 자가, 내가 평생 알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영혼이 널리 트이고, 육체는 자신감이 넘치고, 가장 자유롭게 외치던 자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게끔 하자.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638쪽)
더불어 조르바를 “부활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를 기억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에게 ‘피’를 주어야 한다. 조르바는 청년 두목에게 두려움 없이 삶을 사랑할 뜨거운 피를 수혈해 주었고, 두목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쓰는 것으로 조르바를 되살려 놓았다. 둘은 먼 훗날의 내 삶에도 피를 돌게 해주었다. 나는 어떻게 피를 주어 조르바를 살게 할 수 있을까? 에로스는 기적적인 힘이다. 그것이 온통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함은 형상화된 이미지 같은 게 아니다. 마음이 우글우글, 왁자지껄해지는 일이다. 모두가 마음을 지닌 자들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라면! 나도 그를 되살릴 수 있다.
카잔차키스가 여느 위인전에서라면 모두 삭제해버렸을 법한 항목들로 조르바를 찬탄하는 것이 인상 깊다. 먹고 마시고 말처럼 일하고 여자를 쫓아다니는 놀라운 뜨내기, 춤을 추면서 싸우는 자. 멋진 말들의 나열보다도, 한 사람을 언어화할 때 그 형상이 그대로 떠오르게끔 글을 쓴다는 것. 카잔차키스의 사랑이 깊이 와닿았다. 조르바는 그를 만나는 누구라도 몹시 살고 싶게 만든다. 잘, 폼나게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먹고, 마시고, 말처럼 일하고, 마음껏 사랑하며 살고 싶게 한다. 내가 누군가로 하여금 삶이 삶 자체로 충분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조르바의 신체에 다시 피가 도는 순간이 아닐는지.
간디에 따르면, ‘라마’와 같은 만트라, 즉 신의 이름을 염송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지 않다. ‘라마’는 중생의 번뇌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진언이 아니다. ‘라마’라는 글자나 소리에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낱말에 신성함을 불어넣지 않는 이상, 말은 그저 음가들의 조합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정진을 통해 그 글귀에 신성함을 담는다면, 라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라마가 우리 곁에 계신다. 조르바는 신의 이름을 외치진 않았으나 돌과 비와 꽃에서 신성함을 찾을 수 있길 바랐다.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리고 마는 일상의 신성함들을, 조르바는 바위 사이에 곡괭이를 힘껏 박아 넣으며, 간디는 물레를 돌리며 살려냈다. 간디나 조르바의 말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우리의 신체와 마음에서 끄집어내는 것, 행위가 바로 구원이다.
이 세상은 사랑의 굴레로 묶여져 있습니다. 역사는 나날이 일어나는 사랑과 봉사의 사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전쟁의 사건만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랑과 봉사의 행위는 이 세상에 갈등과 투쟁에 비해서 훨씬 더 일상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번성하는 무수한 촌락과 읍들을 봅니다. 만일 이 세상이 항상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들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간디 전집 3권』, 라가반 이예르 엮음, 허우성 옮김, 나남, 585쪽)
나를 끝없는 미래로 거침없이 인도했던 이 문구를 꼭 소개하고 싶었다. 『간디 자서전』을 읽다 보면 행동으로 살려내고 싶은 간디의 모습들이 너무 많다. 남아프리카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이끌고, 소금 행진의 선두에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인도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간디의 면모들 말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죄스러워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고백하는 간디,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했던 간디, 남아프리카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을 잔뜩 들고 와서 인도 이곳저곳을 누비던 와중에도 아픈 매부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던 간디, 모욕을 당해도 분노하는 대신 자신의 권리를 담담히 이야기하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상대를 용서하는 간디…. 나열한 에피소드들은 간디의 비범함이기도 한 동시에 모든 이의 인생에서 한 번쯤 반짝였을 비범함이기도 하다. 거짓말을 하고 마음이 찜찜했던 일이, 누군가에게 밥을 사준 일, 아픈 부모님을 간병하는 일, 어떤 사람을 통 크게 용서했던 일,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 신나게 일한 경험이 역사책에 쓰이거나 뉴스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나는 뉴스를 보고서 좌절하기만 바빴지, 사랑의 화음 안에 내가 들어와 살고 있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여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겠구나. 우리는 모두 붓다와 간디, 조르바에게 피를 주어 살게 할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에로스는 나를 나 바깥으로 생동하게끔 하는 어마어마한 생명력이자, 세상을 유지하는 일상적인 힘이기도 하다. 나는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고, 그러므로 이제는 좌절만 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에로스가 여전히 역동하고 있다는 증명이므로. 하여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간디의 목소리로 전하자면, “여러분이 선량하면 세계도 선량합니다.” (위의 책, 581쪽)

폴더명, 여행
작년 봄, 노트북 바탕화면에 ‘여행’이란 이름의 폴더 하나를 만들었다. 어떻게 인트로를 쓰기는 했는데, 다음부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인트로 제목도 ‘에로스 로드’겠다, 이미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냥 신나게 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써보자 해서 글쓰기 폴더명을 여행으로 정했다. 목적지도, 숙소도 없이 가는 길에 만난 인연 따라 흘러가는 여행. 이번 글쓰기가 내게 열어준 문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쓸수록 고전 속의 두 사람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어떤 책을 읽든 간디와 조르바가 생각났다. 빙산의 일각의 일각만큼 공부했는데도 이 공부는 나를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갔다. 무려 단디해변을 맨발로 걷는 기쁨을 누렸고,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 곳곳을 돌아봤다. 또래 친구라고는 없던 내게 친구들이 열 손가락을 넘길 만큼 생겼다. 이곳의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공부에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나 또한 글을 쓰며 간디와 조르바를 진심으로 대하게 되면서, 친구들과도 더 친해질 수(진심이 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첫 간디 메이트는 공부를 어떻게 해나가면 되는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보여줬다. 미솔언니를 본보기 삼아서, 곰샘의 안내를 따라서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인도 역사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간디스쿨’에서의 렉처도 어안이 벙벙했는데, 곰샘은 급 60명 정도가 모인 함백여름캠프에서 자그마치 1시간 동안 간디 강의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것도 영어 텍스트로! 엉망이었던 첫 시범 강의를 선생님이 A부터 Z까지 꼼꼼하게 봐주셨다. 함백에서 그 강의를 준비했던 꼬박 5일 동안 곰샘께, 같이 떨려 하면서 응원을 퍼부어주었던 친구들에게, 강의를 기꺼이 들어주셨던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과분한 마음들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시공간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지 또다시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어머니 아버지 이모 제가 책을 쓰고 강의를 합니다? 자랑도 했다.
물론 물갈이하고, 근육통도 한바탕 겪고, 소매치기도 만나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듯, 가슴 뿌듯한 순간만 이어지지는 않았다. 글 마감이 다가올 때면 언니들을 붙잡고 한바탕 난리굿판을 벌였고, 내가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 신체인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의심이 들어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여행이다! 여행 중에는 이런 잡생각이 들었다가도 순간순간 만나는 인연들, 충격적일 만큼 멋진 풍경들을 보고서 다시 감탄하기 바쁘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공부 길이 딱 그렇다. 함백캠프에서 강의를 하며 간디가 여러 논란 혹은 의구심에 휩싸인 뜨거운 인물이란 걸 다시금 느꼈다. 아쉬운 점은 그의 알토란 같은 메시지가 몇몇 자극적인 논쟁들 – 브라마차르야, 성욕, 특히 동침 실험 – 에 가려져 빛을 못 보고 있다는 것. 드론이 수백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이는 21세기의 전쟁. 나는 죄책감조차 느낄 수 없는 조용하고 은밀한 폭력의 손아귀에서 사는 우리에게 간디의 이야기가 절실하다고 믿는다.
세상에 간디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싶다. 삶보다는 암담한 미래를 사유해야 하는 우리 세대에게 지니고 있으면 힘이 되는 마음이기에. 그렇지만 아직 뭘 너무 모른다. 모르는 것투성이다. 간디는 신이 “진리와 지식과 환희의 결합체”라고 한다. 진리는 참된 앎과 함께 존재한다. 그러한 공부의 과정은 환희롭다. 이번 글쓰기가 열어준 여행길, 공부 길은 계속될 것이다. 언제나,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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