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지구의 라마단, 단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다
김기윤(남산강학원)
가자 지구 사람들의 일상은 늘 죽음과 함께한다. 가족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배급소로 향하다가 사설 경호업체 직원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청년, 겨울철 구호물자 부족으로 인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3개월 된 아이, 한국으로 피난 온 팔레스타인인이 가자에 있는 가족과 통화할 때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 늘어나서 이젠 그냥 산 사람의 이름을 말해달라고 했다던 이야기. 이처럼 이스라엘의 탄압에 의해 죽어간 가자 지구 주민들의 숫자는 최소 5만여 명에 달한다.
가자 지구의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슬픔, 분노, 안타까움, 답답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온다. 국경이 봉쇄된 채 속절없이 고통받고 있는가자 주민들을 보고 있을 때,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희생 당하는 어린이들을 볼 때, 관용과 자비라고는 한 톨 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볼 때 그렇다. 그러던 중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이로운 소식을 접했다. 바로 가자 지구의 라마단 행사 소식이다.
이슬람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력을 기준으로 매년 그 시기가 달라진다. 올해는 2026년 2월 17일부터 3월 19일까지가 라마단 기간이다.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떠있는 동안 일체의 음식물을 먹을 수 없고 흡연이나 성행위를 해선 안된다. 해가 지면 가족들과 친지들이 한데 모여 저녁을 먹는다.

라마단의 어원은 강렬한 열기를 뜻하는 아랍어 ‘Ramad’ 혹은 ‘Ar-Ramd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강렬한 열기와 라마단 축제와의 연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중 하나로 낮 시간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지난 죄를 태운다는 의미가 있다. 라마단 기간에 단식을 하면 받게 되는 은혜의 목록 가운데,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는다는 항목이 위 의미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라마단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달래는 신앙생활이다. 라마단에 대한 설명 중 ‘인간은 단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인간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단식 만큼은 하나님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인상 깊다. 생명이란 다른 생명을 취해야만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하여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이기적인 프로세스를 벗어날 수 없다. 단식은 그 프로세스에 역행한다. 의도적으로 다른 생명을 취하지 않고 신체를 비워낸다. 상대를 취해야만 생을 지속할 수 있는 이 굴레 속에서, 상대를 취하기를 멈추는 단식이야말로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이타행이다. 그렇게 비워낸 몸과 마음에서 자비심이 생겨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실제로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물건과 음식을 나누고, 수감자들은 형량을 감면받는다고 한다.
가자 지구 사람들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자 주민들이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종교를 잃지 않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는 신 만이 유일한 의지처이다. 그들에겐 하루를 버틸 음식도, 상처를 치료할 병원과 약도 없다. 포격 소리 없는 조용한 밤도 없다. 가족들은 이미 죽어버렸고, 나라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삶의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의지할 곳은 신밖에 없다. 신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기에, 내가 믿는 한 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한다.
가자 지구의 라마단 소식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라마단을 통해 진리를 향한 영적 수행을 지속했다. 그들은 주어진 삶을 허투루 쓰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가자 주민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영적 탐구를 뒤로 미루고 있다. 나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러나 단식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한들 나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가자 지구 사람들이 오히려 타인을 위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면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삶’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프로세스에서는 늘 다른 생명의 희생이 전제된다는 사실은 그 현장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실감하기 어렵다. 내 주변에 공기가 있다는 사실은 숨을 멈췄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듯이, 단식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단식을 통해 가닿는 신이란 바로 이 세상 그 자체가 아닐까? 생명의 파노라마 그 자체 말이다. 가자 지구는 단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봉쇄를 뚫고 세상과 연결 된 것이다!
다시, 신이 곧 세상이라면, ‘세상을 위한 삶’이란 무엇인가? 단식을 통해 생명의 프로세스를 알 수 있었듯이, 세상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만 한다. 나를 비우는 것은 이타행으로 가능하다. 그것도 단식과 같이 단순하고 명료한 이타행으로. 나를 세상으로 이끌어 줄 단순 명료한 이타행은 ‘나의 옳음을 내려놓기’가 아닐까? 내가 옳으려면 상대방이 틀려야 한다. 내가 옳을수록 세상은 틀린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선 가닿을 세상조차 없어진다. 틀린 것과 만날 필요는 없으니까. ‘나의 옳음을 내려놓기’ 이것이 나의 단식이자 세상을 위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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