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의 병렬 독서

[문화의 병렬 독서]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여성 지식인: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18)

by 북드라망 2026. 5. 27.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여성 지식인: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18)

글쓴이 : 문화


1. ‘괴물’의 얼굴은 누구인가
‘프랑켄슈타인’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국내의 한 번역본에는 “19세기 천재 여성 작가 메리 셸리가 열아홉 살에 탄생시킨 과학소설의 고전”이라는 소개글이 적혀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작 소설보다 먼저 꿰맨 자국이 있는 납작한 이마를 한 ‘괴물’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의 얼굴로 기억하는 이 이미지는 사실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에 등장하는 배우 보리스 카를로프의 얼굴이다. 실제 영화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등장하지만, 이 ‘괴물’ 이미지가 워낙 강렬한 탓에 그는 근 백 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만든 창조주의 이름을 빼앗고 한계를 모르는 과학자의 위험한 욕망을 경고하는 얼굴로 자리매김해왔다.


물론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마디 말도 못하는 괴물’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다른 ‘피조물’을 그리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에 개봉한 영화 「프랑켄슈타인」(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도 그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형식—즉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이 각각 자기 이야기를 하는—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서 피조물은 창조주에 버림받은 이후 자신이 홀로 방황하면서 무엇을 배웠으며 그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지 않을, 자신과 공감을 나눌 대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는 1931년 영화가 히트한 이후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피조물이 제 목에 걸린 나사못을 빼내고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유기된 피조물과 돌봄을 거부한 창조자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속 피조물은 여전히 메리 셸리의 원작과는 많이 다르다. 결정적인 차이 중의 하나는 막 생명을 얻은 피조물과 창조주 빅터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에서는 창조자 빅터와 갓 태어난 피조물 사이의 갈등이 비교적 비중 있게 묘사된다. 빅터는 생명 창조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모두 갈아 넣은 끝에 새 생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지만, 창조 이후 그는 예상하지 못한 피로와 실망을 겪는다. 피조물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고, 먹이고 씻기는 일 모두 창조주 빅터의 몫이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피조물을 돌보던 빅터는 급기야 “넌 이 말밖에 못하니?”라고 윽박지르기에 이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에게 화를 내는 영화 속 장면은 피조물의 낯선 외모에도 편견 없이 언어를 가르쳐주는 여성 인물 엘리자베스와 대조된다. 결국 빅터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유기하고 도망가기에 이른다. 일련의 장면에서 창조자 빅터의 경솔함을 비판하지 않고 넘어가기란 쉽지 않다. 어째서 창조자 빅터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그렇게 빨리 포기해 버릴까. 그런데 실제 원작 소설에서 창조자의 ‘포기’는 더 일찍 일어난다. 원작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영화 속 창조자처럼 최소한의 돌봄 노동조차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훔친 시체에서 떼어낸 신체 기관들을 조립해 만든 피조물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뒤늦게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실험실을 뛰쳐나가 버린다. 다시 말해 원작 소설에서 피조물에 대한 유기는 피조물이 태어나자마자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이 만든 존재가 태어나자마자 즉시 버리고 달아나는 창조자 빅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인간이 넘보아서는 안 될 생명 창조 기술에 욕심을 내고서는 그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고 달아난 무책임한 과학자인가. 이어지는 피조물의 복수는 끝을 모르는 인간 욕망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서사인가. 물론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히 과학기술의 폭주를 경계하는 소설로만 읽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자기 자신을 분열된 방식으로 투영하는 작가 메리 셸리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초판(1818). 초판은 작가 이름 없이 출간되었다



1823년 출간된 『프랑켄슈타인』. 초판의 성공 이후 출간된 1823년판에는 작가 이름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로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메리 셸리, 창조자이면서 피조물인 여성
이미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듯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서 메리 셸리 자신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창조의 이상에 경도된 빅터의 모습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조 능력을 중시한 근대 초 지식인 예술가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메리 셸리 역시 그런 세계에 있었던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뿐만 아니라 메리 셸리가 이 소설을 집필한 당대가 모성 담론이 확산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피조물을 창조한 빅터와 피조물의 관계는 모성 담론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도망가는 창조자 빅터의 행동은 당대에 유행한 모성 담론의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모성 담론이 언제나 현실 속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모성 담론은 모성을 여성의 중요한 본능으로 간주했지만, 사실 모성이 발휘되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작가 메리 셸리 역시 ‘자연이라고 여겨진 모성’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다. 잘 알려졌듯이 당대의 급진적인 지식인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를 낳고 12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 역시 여러 번의 유산, 사산을 겪었으며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피조물 창조에 성공한 후 도망가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에는 단순히 금지된 능력을 탐하는 과학자의 오만만이 아니라, 아이의 죽음과 모성의 책임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여성 지식인의 공포 역시 포함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빅터와 피조물 사이에 모성의 발휘가 실패되는 장면은 ‘자연화된 모성’ 신화에 대한 도전으로 읽을 수 있다.


4. 헛간 너머의 지식
『프랑켄슈타인』 읽기는 단순히 메리를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창조자/어머니의 분열된 의식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어나자마자 유기된 피조물이 인간 세계에 숨어들어 당대의 지식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공감을 갈망하고 앎을 추구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한 농가의 헛간에 숨어 지내면서 농부 가족들을 관찰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말과 글자뿐 아니라 인간들이 나누는 다양한 감정까지 배우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배움의 과정이 숨어서 몰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작가 메리 셸리의 삶을 떠올려보면 유기된 피조물이 혼자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장면은 예사롭지 않다. 메리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역시 당대의 급진적인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버지 고드윈이 엄마 없이 남겨진 딸에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가르치고 서재의 책들을 볼 수 있게 허락한 것과 별개로, 당시가 여성에게 정규 교육이 충분히 허락되지 않은 시대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메리에게 결핍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피조물이 훔치듯 지식을 습득하는 장면은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던 사실을 은밀하게 암시한다. 메리의 고독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대 여성에게 지식은 언제나 헛간 너머에서 엿보는 것처럼 불완전하게 허락되었던 것이었다.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  by Richard Rothwell (1840~41)


5. 공감이라는 감수성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면 공감(sentiment)에 대한 욕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18세기 영국 철학이라는 맥락과 관계가 있다. 공감은 단순히 마음이 여리다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말한다. 당대에 이 공감 능력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도 여겨졌다.


나를 이해해 줄 친구 한 사람, 나와 공감을 나눌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말은 피조물, 피조물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망이다. 이는 이 작품이 시작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북극을 향해 항해하는 선장 월턴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부터 일관되게 이야기된다. 월턴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꿈을 이해해 줄 친구 한 사람, 공감해 줄 사람만 있다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장 월턴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끼고 흥분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 창조라는 신기한 일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빅터 역시 자신처럼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인물이라는 데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세 인물은 모두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그 탓에 쫓겨났거나 혹은 탈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그 열망 탓에 방황하면서도 이러한 자신의 꿈을 이해해 줄 다른 존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6. 분열된 여성 지식인의 초상
프랑켄슈타인에서 우리는 창조자와 피조물을 오가면서 자기 자신을 분열된 방식으로 투영하고 있는 근대 초 여성 지식인을 만날 수 있다. 메리 셸리는 모성에 공포를 느끼는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버려진 피조물이다. 또한 이 외로운 피조물의 이야기에서는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죽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읽힌다. 메리가 이 작품을 쓸 때 이복언니 패니 임레이의 자살, 남편 퍼시의 전부인 해리엇의 자살 등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잇달았다. 물론 그것은 메리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빅터의 주변 인물들의 죽음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메리가 이 상실들을 충분히 애도하고 떠나보내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프랑켄슈타인은 일반적인 독법처럼 과학기술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한정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 작품은 근대 초 여성 지식인이 경험했던 고독과 결핍, 지식에 대한 갈망, 공감에 대한 욕구를 복잡하게 담아낸 소설에 가까워 보인다. 메리 셸리는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두 얼굴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속할 수 없었던 세계를 소설의 방식으로 창조해 냈던 것이 아닐까.

『프랑켄슈타인』의 육필 원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