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 『오뒷세이아』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을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다소 향수 어린 어조로 소환되는 “복된 시대”는 고대 그리스이다. 인류 최초의 기록문학으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바로 이 복된 시대의 서사 양식이다. 이번 시간에는 『오뒷세이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신의 보호를 받는 영웅
인류 최초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 연합군의 영웅 오뒷세우스가 고향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다룬다. 다른 그리스 연합군들이 트로이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집으로 돌아간 반면, 이타카의 왕 오뒷세우스의 귀환은 십 년 가까이 계속된다. 그동안 오뒷세우스는 식인 괴물 퀴클롭스에게 잡아먹힐 뻔도 하고, 여신 칼륍소의 섬에 억류되는가 하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저승 세계를 여행하는 등 갖은 모험을 한다.
오뒷세우스의 모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의 귀환 여정이 고달프지만, 그가 겪는 시련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서사시의 시인은 영웅이 겪는 시련의 이유를 신들의 분노로 설명한다. 물론 갖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침내 고향에 닿는다는 결말 역시 처음부터 결정된 사실로 바뀌지 않는다. 그는 신의 미움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들의 보호를 받기도 한다. 루카치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리스 서사시의 영웅이 모험하는 세계는 넓지만 결코 영웅과 세계 사이의 거리가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을 단순히 줄거리를 확인하는 일로 생각한다면, 12,000행이 넘는 이 방대한 서사시를 읽는 일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미 결말을 아는 이야기니까. 신의 보호를 받는 영웅이 집에 돌아가는 이야기. 지금 『오뒷세이아』를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영웅이 거쳐 간 신비한 여행지를 나열하고 요약하면 끝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 확인이나 요약이 아니라,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그 잉여를 확인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같은 줄거리라도 어떤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는지, 그 형식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오뒷세이아』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험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웅 오뒷세우스의 화려한 모험담은 작품의 상당 부분이 지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전까지 전지적 시점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영웅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펼쳐지는 대목에서부터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1인칭 목소리로 말해진다. 이러한 형식은 이 서사시가 단순히 영웅의 모험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지’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기술
오뒷세우스의 입으로 직접 전해지는 영웅의 모험담이 펼쳐지는 장소는 마지막 모험 장소인 파이아케스 족의 섬이다. 이 파이아케스 족의 섬은 오뒷세우스가 ‘아무것도 아닌 뱃사람’에서 ‘영웅 오뒷세우스’로 전환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뒷세우스의 파이아케스 족 상륙 장면에서 눈여겨볼 점 중 하나는 그가 이 섬에 도착하고 환대를 받는 동안 자기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이아케스 족 역시 나그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고 고향까지 호송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뱃사람’이 ‘영웅 오뒷세우스’로 거듭나는 전환은 오뒷세우스를 고향으로 호송해주는 것이 결정된 후 열린 연회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까지 입을 꾹 닫고 있던 오뒷세우스가 입을 여는 것은 연회에 초대된 가인 데모도코스가 부르는 ‘트로이 목마 구조에 관한 노래’를 듣고 난 후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는데, 그가 직접 오뒷세우스 본인이 등장하는 노래를 가인에게 신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름 없는 뱃사람에서 오뒷세우스로 거듭난다.

가인 데모도코스의 노래를 들으며 울고 있는 오뒷세우스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펼쳐지는 이 장면은 이야기가 언제, 누구의 목소리로 시작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뒷세우스는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다른 시인의 입으로 펼쳐지는 자기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그는 타인의 이야기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야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오뒷세우스의 이야기하기 방식은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불러오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영웅의 모험담이 서술되기 전까지 『오뒷세이아』는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지만, 모험담이 펼쳐지는 9권부터 11권까지는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1인칭으로 이야기된다. 『오뒷세이아』는 십 년 가까운 모험을 경험하고 마지막 장소에 다다른 영웅이 ‘나는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노래하는 형식이다. 모험의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직접 회고하는 형식은 그의 모험을 후대의 작가들이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예리한 독자들은 영웅의 모험담의 틈새를 파고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내고 재해석한다.
세이렌의 노래와 지식의 유혹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 족의 섬에서 이야기하는 모험담에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장면도 있다. 이 이야기는 오뒷세우스가 지혜와 절제로 온갖 유혹과 고난을 이겨낸 영웅의 상징이 된 계기가 된 이야기로, 위험한 충동을 이성으로 통제한 영웅의 모범 사례로 흔히 읽힌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결코 유혹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끝내 노래를 듣는다. 다만 그는 그에 대한 대가를 자신의 몸을 결박하는 것으로 치른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있는 오뒷세우스
이 장면은 고대 서사시의 한 장면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근대 이후 인간이 반복해서 되묻는 오래된 질문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 왜 인간은 위험을 알면서도 더 알고 싶어하는가.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 아니면 새로운 구속이 될까.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귀를 막아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은 일종의 자기보존이다. 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다고 전해지는 노래는 예술에 대한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예술에 대한 충동은 세이렌의 노래가 보여주듯 자기보존을 위협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뒷세우스가 자기보존을 위해 위험한 충동을 아예 포기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흔히 영웅 오뒷세우스가 충동을 합리적으로 통제한 사례로 인용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래에 대한 충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이는 인간이 지식에 대한 충동을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화의 세계에서 방황의 세계로
중요한 것은 그가 아름다운 노래에 대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위험을 경험하되 파멸에 이르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들을 때, 그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 죽는다는 경고는 신에게서 왔고, 역시 그 치명적인 유혹으로부터 자기보존을 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신으로부터 온다. 유혹은 치명적이지만, 영웅 서사시에서 결코 영웅은 파멸되지 않는다. 그의 귀환은 지연될지언정 취소되지 않는다. 앞서 루카치가 말한 신과 인간이 조화로운 세계란 바로 이런 세계다.
하지만 이런 세계는 근대 이후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은 신의 보호를 받는 영웅도 아니고, 목적도 결말도 모르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근대소설은 바로 이 새로운 세계의 모험을 그린다. 다음 시간에 다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대표적이다. 괴테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귀환이 예정된 모험을 떠나는 영웅이 아니다. 그에게는 신의 노여움도 보호도 없으며 오직 우연과 선택이 있을 뿐이다.
고대 서사시에서 영웅은 세계와 조화를 회복하는 존재였다면, 이제 근대 소설의 젊은 주인공은 우연적인 세계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형성해야 하는 존재다. 이로써 소설의 문제는 귀환이 아니라 성장이 되고, 주체의 선택과 책임이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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