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을 딛고 우연에 대한 긍정으로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5)
글쓴이 : 문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흔히 성장소설의 출발점으로 언급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말하는 성장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성장소설을 미성숙한 인물이 세상에 나가 갖은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 목표를 달성하거나, 혹은 인격적으로 완성을 이루는 이야기로 이해하곤 한다. 실제로 성장소설에 대한 사전적 정의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괴테의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인공 빌헬름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미숙한 아이가 인격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는 이야기로 요약하는 것은 그의 모험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면 그것은 주인공 빌헬름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거나 인격적으로 완성되어서가 아니다. 여기서 성장은 목표의 달성이 아니라, 처음에 품은 이상이 무너진 후 환멸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택하고 삶을 지속하는 힘에 가깝다.

1. 젊음의 탄생: 근대와 ‘자기 형성’이라는 과제
오늘날 다양한 서사 장르에서 활용되는 ‘성장서사’라는 개념은 근대 초 유럽에서 발달한 소설 장르인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에 그 유래가 있다. 우리 말로 ‘교양/형성/성장소설’ 등으로 번역되는 ‘빌둥스로만’은 ‘만들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 ‘빌덴’(Bilden)을 명사화한 ‘빌둥’(Bildung)과 ‘로만’(Roman)이 합쳐진 복합 명사다. ‘빌둥’(Bildung)이 교양으로 번역되는 탓에 특정 지식의 있고 없음을 떠올리기 쉬운데, 여기서 ‘빌둥’은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적극적인 과정 전체를 말한다.
독일어 ‘빌둥’을 어원으로 하는 이 성장 개념은 원시 공동체의 입사(入社, initiation) 의식과 비교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 입사의식은 부족마다 차이가 있지만,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의식을 통해 인내심을 시험하는 등 일회성의 이벤트 형식을 띤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입은 새로운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얻게 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교양소설에서 말하는 성장은 단순히 특정 시험을 통과하는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형성의 과정이다.
교양소설은 근대성의 특징인 ‘젊음’을 문제시한다. 젊음이 교양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근대 이래로 젊음의 의미가 달라진 사정과 관련이 있다. 전근대 사회, 즉 안정된 공동체에서 젊음은 생물학적인 나이의 적음에 불과했다. 아들의 미래는 아버지의 일을 배우고 물려받는 것으로 모두 예견되어 있다. 장래가 자명할 때 미성년은 단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덜 자란 상태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전통 사회의 관습과 규범이 붕괴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이 전면화되는 근대 사회에서 젊음은 더 이상 자명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 젊음은 가능성과 동시에 불안의 이름이 된다.
혈통과 영웅의 지략이 서사를 이끄는 영웅 서사시 『오뒷세이아』와 달리,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상태 그 자체다. 이 이야기는 젊은 주인공의 자기 탐색이라는 플롯으로 표현된다. 그의 모험은 상인의 아들이라는 안정된 위치를 거부하고 연극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상인 아버지는 연극을 일과가 끝난 다음에 즐기는 유흥이나 취미쯤으로 생각하는 반면, 빌헬름은 연극과 같은 예술이야말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핵심적인 활동으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상 최고의 것이라 여긴다. 결국 빌헬름이 연극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직업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합리성과 계산이 지배하는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거부이며, 예술을 통한 전인적 인간 형성이라는 이상에 대한 추구이기도 하다.
2. 우연의 연속: 이상과 세상의 불일치
이렇게 젊은 빌헬름은 예술에 대한 원대한 이상을 품고 연극의 길로 투신할 것을 결심하지만,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흔들린다. 애초에 그가 연극에 열정을 쏟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했던 연인 마리아네의 부정을 목격하면서, 그의 결심은 혼란에 빠진다. 그는 이제까지 집필한 연극 대본을 모두 내다버리고, 자포자기하듯이 부친의 사업을 거들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그의 삶을 다시 연극의 길로 이끄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부친의 지시로 떠난 출장길에서 유랑극단 단원을 알게 된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다시 연극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후로도 그의 여정은 우연의 연속이다. 가출-모험-귀환이라는 구조를 따른다는 점에서 그의 여정은 『오뒷세이아』와 유사한 면을 보이지만, 신의 의지에 의해 예정된 귀환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예컨대 귀족의 성에서 공연하게 되는 기회는 극단과 빌헬름 모두에게 기대를 안겨 주지만, 곧 강도의 습격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는 극단의 안전을 위해 선택한 길 때문에 오히려 원망을 사고, 중상을 입는 불운까지 겪는다. 그의 의도를 배반하는 결과가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연극에 대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극단에 들어가 『햄릿』을 공연하는 등 자신의 이상을 이어가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예술적 신념과 현실적 조건 사이의 충돌은 반복된다. 작품을 둘러싼 이견과 갈등은, 그가 품은 예술에 대한 이상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결국 빌헬름의 모험은 애초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우연 속에서 이상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수정되는 과정에 가깝다.

3. 환멸과 인과율: 잘못된 선택이라는 유혹
이상과 현실 사이의 반복되는 불일치 속에서 빌헬름은 환멸에 빠진다. 이는 단순히 외부의 현실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단순한 실망과도 다르다. ‘환멸’에 빠진 빌헬름은 유랑 극단 생활을 “한없는 공허”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시절을 통해 자신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한다. 이는 자신의 과거를 잘못된 선택이 낳은 잘못된 결과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로 정리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히 길에서 만난 나그네는 빌헬름에게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성직자로 보이는 이 인물은 과거를 부정하는 빌헬름에게 우리가 겪은 일은 모두 흔적을 남기며, 알게 모르게 우리의 교양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눈앞에 놓인 일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특정 경험과 결과를 인과율로 설명하려는 태도는 성공을 자신의 공로로, 실패를 잘못된 선택으로 환원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러한 기계적 인과율로 환원될 수 없다. 우연이 개입하는 세계에서 과거를 단순한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삶 자체를 축소하는 일이다.
4. 우연을 긍정하는 힘: 근대적 성장의 의미
빌헬름의 성장 과정은 요약하자면 ‘가출-모험(연극)-탑의 결사’라는 세 가지 단계로 나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처음 떠났던 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을 부정하고 택한 예술도 아닌 ‘탑의 결사’라는 청년들의 모임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의 연극 경험은 모두 실패한 것일까. 이러한 판단은 사후적인 해석에 가깝다. 그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또 다른 목적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마지막에 만나는 인물들 역시 유랑 극단 시절 이미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경험을 ‘자기’ 형성의 과정으로 긍정하게 된다. 연인 마리아네가 남긴 아들 펠릭스를 통해 그는 배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수업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성장서사다. 여기서 성장은 목표의 달성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에 품은 이상이 무너진 이후에도 다시 선택을 이어가는 힘에 가깝다. 우연의 세계 속에서 젊음은 환멸을 통과하며 이러한 성장에 이른다. 그는 예술을 통해 자유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깨닫는 것은 자유란 목표의 성취가 아니라 우연 속에서도 계속해서 선택하고 책임지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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