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망가지면 어때요? 뜨개도, 인생도
다른 동네의 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는 수원은, 특히 저희 동네는 유난히 개나리가 샛노랗게 피더니, 그다음 피기 시작한 벚꽃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하고 ‘쌩쌩’했습니다(비 온 뒤에 다 떨어질 줄 알았더니 말짱하더라구요). 올해처럼 봄이 또렷하게 느껴진 적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봄이, 그리고 다가올 여름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데요. 그건 제가 뜨개를 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더 정확하게는 여름 편물을 뜨는 족족 망치고 나서부터인 듯합니다.
요 몇 년 저의 뜨개가 망하는 흐름을 보니,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한다→여름 뜨개를 시작한다→헤맨다(여름 편물은 계절 특성상 구멍이 송송 나기 마련입니다. 그걸 뜨개 기법으로는 바늘비우기라고 하고요. 그런데 저는 이 바늘비우기가 헷갈리기도 하고, 그래도 일단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킵 고잉은 하지만 바늘비우기의 특성과 제 실력 부족으로 무늬는 늘어지고, 편물은 점점 더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진짜 꾸-욱 참고 끝을 향해 달려가 보려고 하는데 고지를 눈앞에 두고는 꼭(!) 콧수가 맞지 않습니다. 분명 어딘가 틀렸다는 것인데 찾아낼 기력은 없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은 더더욱 없는 저는 그렇게 여름 뜨개를…)→포기한다(계절은 이미 초가을!)→(뜨손실로 인한 충격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단 쉰다(계절은 이제 한겨울)→가을·겨울옷을 뜨기 시작한다→완성한다. 문제는 완성하고 나면 이미 해도 바뀌고 계절도 바뀌어 있어서 그해에는 그 옷을 두어 번 입을까 말까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데, 하지만 이제 보니 이렇게만 돌아가도 꽤 괜찮은 뜨개 사이클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작년겨울 느닷없이 저에게 뜨태기(뜨개 권태기)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남들은 서너 벌, 많게는 대여섯 벌도 옷을 떠 내는 그 시간에, 저는 새로운 도안의 카디건 한 개를 겨우 완성하고는 휴업(?) 상태였는데요. 아주 손을 놀릴 수는 없어서 전에도 한 번 떠 보았던 카디건을 다른 실과 바늘 버전으로 뜨기 시작했습니다. 더 굵은 실과 바늘을 사용해서 전에 떴던 옷보다 낙낙한 품이 만들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팔통이 봉산탈춤을 추어도 될 정도로 넓어진 게 문제였지요. ‘확 풀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아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디건을 가득 채운 꽈배기가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까짓것, 못 입게 돼도 그만이다’ 하는 맘으로 결국 도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어쩐지 모양은 좀 빠지는 듯한 느낌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옷은 입었을까요, 못 입었을까요? 나름 잘 입고 다녔습니다. 완성하고 나니 왜인지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후계동 동네 아저씨들이 떠올랐습니다. 한때는 제약회사 간부였고, 자동차 연구소 소장이었고, 은행 부행장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중년의 행로를 마무리하고 있는 아저씨들이요. ‘망가진 것 같은 동네’에서 ‘다 망가진 것 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망가져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닮은 뜨개옷 같아서 생각보다 더 마음이 가더라구요.
지난겨울에도 <나의 아저씨>를 보지 못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제대로 보든 안 보든 자동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던 드라마였는데 말이죠. 올겨울에는 다시 볼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먼저 떠난 분이 피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안’(至安)에 머물고 있기를 바라 봅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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