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무개의 아무 이야기

[아무개의 아무 이야기] 언제나 다시, 다윗

by 북드라망 2026. 2. 23.

언제나 다시, 다윗


그러니까 그날은 저녁 미사를 가던 날이었습니다. 남편이 독서 봉사 당번이라, 운전 중인 남편을 위해 그날 남편이 미사 중 신자들 앞에서 읽어야 할 성경 부분을 제가 소리 내어 읽어 주면서 가고 있었죠. 그날의 독서는 사무엘기 상권 16장으로(제법 천주교 신자 티가 나지 않나요? ㅋ) 다윗이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이로 선택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이사이(다윗의 아버지)를 찾아가 그의 아들 중 하느님께 선택된 이를 찾아내는데, ‘얘 아니다’, ‘얘도 아니다’가 거듭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에게는 형이 무려 일곱 명! 다 읽어 주고 나니 남편도 옆에서 “다윗이 형님들이 많더라” 하기에 저도 “그러게, 윗사람이 많아서 '多윗'이었나 봐” 하는 시답잖은 얘기나 하면서, 성당에 도착하고,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날 밤, 저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구글이 저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대번에 이 강의를 띄워 놓은 것입니다. 바로 천주교 평신도 신학자이신 주원준 선생님이 ebs에서 강의하셨던 <구약의 사람들>이란 시리즈의 ‘다윗’ 편이었습니다. 너무나 소름이 돋았지만 그렇다고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뿌리치지는 못하는 저란 여자…. 안 볼 도리가 있나요? 네, 봤습니다. 다 보고 난 다음에 든 생각은 ‘다윗…, 이 木 인간…’ 하는 것이었고요(배운 게 도둑질이니;;), 또 다윗으로 이번 달의 <아무개의 아무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은 역시 명절 끝엔 가족 막장극만 한 것이 없어서이지요(흠흠). 이 흥미진진한 것을 저만 알면 쓰나요(^^;).

 



아들이 여덟이나 있는 집의 막내, 다윗은 그야말로 새싹입니다. 동토를 뚫고 기어코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목기(木氣)는 자신을 감출 줄도, 그럴 필요도 모릅니다. 싸움터에 나간 형에게 양식을 전해 주고 오라는 아버지 심부름 중이었던 다윗은 엄청난 체구와 막말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골리앗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가 누구냐’며 펄펄 뛰는 가운데, 형이 ‘너의 교만을 모를 줄 아느냐’[는 것을 보니 평소에도 다윗이 많이 나서는 캐릭터이긴 했나 봅니다 ㅎ], 가만히 있으라 다그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왕 사울 앞에 나아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천명합니다. 목의 간기(肝氣)가 튼실하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결과는 다들 아시는 대로이지요. 부끄럽지만 이 이야기가 제가 다윗에 대해 알고 있던 전부였고, 하도 들어서인지 그다지 특별한 감흥이랄 것도 없었는데요, 진짜는 지금부터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더 이상 새싹이 아닙니다. 단숨에 갑목처럼 쑤욱 솟아올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의 주목을 받게 되고, 특히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면서 사울 앞에서까지 대놓고 다윗을 칭송합니다. 뒤따르는 1인자의 시기와 그로 인한 시련은 소년등과(少年登科)의 과보치고는 그래도 가벼운 편. 좌우간 다윗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르지만 이제 푸르른 청춘은 가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파란’(波瀾)들입니다. 


그중 으뜸은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정(情)과 정(精)을 남발하는 중년 남성의 섹스 스캔들! 다윗에게는 형들도 많았지만 여자도 많았지요. 그래도 시절이 시절이고,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주님의 눈”에까지 거슬리고 만 것은 다윗의 장수였던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의 사건입니다. 다윗인지 스윗(sweet)인지, 이 다정(多情)하고도 다정(多精)한 사람은 밧 세바와의 하룻밤으로도 뚝딱 아이를 만들어 내고(응?),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야를 제거할 계략을 세웁니다. 우리야도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리고 제 마음 같아서는 우리야가 두 연놈의(흠흠) 머리채라도 잡아채는 것을 보고는 싶었지만…, 아시다시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윗인고로 결국 우리야는 죽음을 맞게 되고, 이 커플은 그래도 남들 눈이 무섭긴 했는지 애도 기간이 끝난 후 살림을 합치고, 아들도 낳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눈도 피할 수는 없는 법.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큰 병이 들고,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하느님께 눈물로 호소하지만 결국 아이는 죽고 맙니다. 그런데 아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그 길로 일어나 씻고 하느님을 찾고 밥을 먹습니다. 이 놀라운 태세 전환을 주원준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신의 뜻으로 수용하고, 그다음 스텝을 모색하는 자세로 설명해 주셨는데, 바로 여기서 저는 다윗에게 넘치는 기운이 목 기운이구나, 싶었던 것이지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이제 새로운 날을 맞은 다윗의 다음 스텝은 밧 세바와 함께 새 생명 만들기(응?).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솔로몬이고(오마나!), “주님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네, 사랑하셨으면… 뭐, 그걸로 되었습죠. 


물론 다윗에게 솔로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도 많고, 아내도 많았던 다윗에게는 당연히 아들도 많았습니다. 다윗은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을 만큼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아들들에게 ‘호부’(虎父)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몇몇 아들이 ‘견자’(犬子)였음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대표적인 견자 아들이 암논과 압살롬입니다. 암논은 자신의 이복누이 타마르를 강간한 개차반 중의 개차반이고,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몰아낸 다음 예루살렘뿐 아니라 아버지의 여인들까지 취하는 개불상놈 중의 개불상놈인데, 압살롬은 자신의 누이를 욕보인 암논을 죽이고, 압살롬은 결국 반란 과정에서 죽게 됩니다. 


이쯤 되면 왕이고 뭐고 다 놓고 싶지 않을까 싶은데[이성계는 왕자의 난 두 번 만에 백기를 들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고, 또다시 여러 겁을 겪고, 그래도 그다음 스텝을 밟아 나갑니다. 이대로 멈출 수도, 꺾일 수도 없다면 발을 뗄 수밖에요. 주원준 선생님은 이렇게 강의를 마무리하십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조금 아쉽기는 해요. 조금 더 신중했으면, (…) 이런 방법을 쓰지 않고 다른 방법을 썼으면 하는 대목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우리 인생도 사실은 그렇죠. (…) 그런데, 확실히 그건 있어요. (다윗은) 한 번도 좌절하지 않았어요. 굉장히 큰 꾸지람을 받고, 굉장히 큰 잘못을 했는데도 언제나 다시 일어섰어요. (…) 다윗의 인생을 보면 용감한 사람이 실수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용감한 사람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 그리고 신은 그 사람을 축복했다.” 


사주 원국은 물론이고 지장간에조차 목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는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 사람들을 보며 겉으로는 신기해하고 뒤에선 비웃으며[물론 앞에선 아무 말 못합니다, 흠흠] 속으론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뭐가 부러운 건지도 잘 몰랐는데, 저것이었습니다. 용기, 그러니까 어떻게든 시작하고, 돌파하고, 좌절하지 않는 목기를 가진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 말이지요. 2026년은 버얼써 시작됐고, 병오년은 벌써 시작됐고, 음력 설은 이제 막 지났고, 갱년기까지 시작된 참이라 이래저래 좌절이 밀려오는 이 마당에 저도 [그리고 어쩌면 저와 같은 위기(?)에 처하셨을지도 모르는 독자님들도] 다윗의 목 기운과 함께 병오년 경인월, 신묘월의 목 기운도 좀 나누어 받을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축복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도록요(ㅎㅎ).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