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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내 안의 타자들, 콤플렉스와 함께 사는 법

by 북드라망 2025. 3. 5.

내 안의 타자들, 콤플렉스와 함께 사는 법

서윤(사이재)

 

콤플렉스는 바로 내적 경험의 대상이고, 대낮에 거리나 광장에서 마주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 안락함과 고통은 콤플렉스에 달려 있다.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C.G.융, 솔, 237쪽)



‘콤플렉스(독일어: komplex)’라는 심리학 전문용어가 어느새 생활언어로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다. 실제 콤플렉스가 발생하는 스펙트럼은, 다소 불안한 상태부터 자기 통제력을 잃고 급기야 미칠 지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우린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 등에 콤플렉스라는 ‘지적’ 이름을 부여하면서, 애써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면해야 할 진짜 문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후 융으로 표기)은 콤플렉스 이론을 통해 삶의 안락함과 함께 고통까지 언급하는데, 왠지 우리가 사용하는 용법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느낌이 든다.

융은 사람들이 인생 문제들에 대해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고 회고한다. 따라서 마음에 장애를 일으키는 문제일수록, 올바른 해답을 찾아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융의 영혼의 지도』에서 머리 스타인(Murray Stein) 박사는 콤플렉스를 일컬어 ‘내면의 거주자’라 했다. 내 안에 무언가 입주해 있는데, 우린 그 낯선 타자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융에 의하면 콤플렉스는, 들깨를 까불러 부스러기를 골라내듯이 깔끔하게 제거할 수 없다. 좋든 싫든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결혼한 부부도 도저히 서로를 견뎌줄 수 없으면 이혼이라는 탈주가 가능한 세상이다. 그리고 독하게 맘먹으면 부모 자식의 연도 끊을 수 있다. 어쨌든 나를 힘들게 하는 외부의 타자들과는 질척거릴지언정 결별이 가능하다. 그런데 콤플렉스라는 내적 타자들과는 그럴 수 없댄다. 낭패다.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입주민 회의라도 열어야 하는 걸까?

융은 마음이라는 무의식의 영역에 발을 디뎠을 때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게 콤플렉스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그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같은책, 231쪽) 콤플렉스는 마치 자유의지를 가진 또 다른 인격체인 양 군다. 요컨대 때에 따라 에너지로 표현되며 의식의 의도를 벗어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심리적 요인이다. 마치 외부에서 번뇌를 일으키는 존재들이 고스란히 내면으로 옮겨 앉은 것처럼,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다. 그저 심리적 요인일 뿐인데 일상을 교란하는 힘이 있다면, 실체는 없을지라도 실재(real)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콤플렉스들은 데카르트적 작은 악마처럼 행동하고, 도깨비 같은 배회를 하면서 흥겨워하는 것 같다. 콤플렉스들은 틀린 단어를 혀에 올려놓게 하고, 소개해야 할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연주회의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대목에서 기침을 하게 하고, 너무 늦게 도착하여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사람을 의자에 걸려 넘어져 커다란 소음을 내게 한다.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C.G.융, 융 저작 번역 위원회, 솔, 2001, 233쪽)

 


융 스스로 ‘학문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은유화한다고 너무 화내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인격화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악마처럼 교활하고 도깨비처럼 짓궂게 구는 콤플렉스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자율성까지 지녔기 때문이다. 왠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게 딱 우리 마음 같지 않은가! 그래서 타자인 듯 또 타자가 아닌 것도 같고, 몹시 헛갈린다. 사실 우리가 평소 같지 않게 변덕을 부린다는 건, 의지의 반영이 아니고 의지적 의도를 크게 빗나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막상 벌어진 일을 설명하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할 때 뱉을 수 있는 말이라곤 ‘내가 미쳤었나 봐’ 정도다. 이때는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작적 기침이나 눈앞이 하얘지는 등의 통제할 수 없는 신체 증상까지 동반한다. 그래서 콤플렉스 정동情動affect이라는 표현으로, 느낌과 행동의 밀접한 연관성을 전달하는 것이다.

의식의 영역에서 살아 있는 이물체처럼 존재하는 콤플렉스에 관한 이론은, 무의식의 특성과 그 중층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관점을 제공했다. 용어 자체는 독일 심리학자 치엔Ziehen이 고안했지만, 이 말의 의미가 지금처럼 풍부하게 확장된 건 융의 연구 덕분이었다. 그리고 콤플렉스의 발견이 경험과학적 방법을 통해 이룩한 성과였기 때문에, 심리학계는 본격적으로 융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험실에서 탄생한 콤플렉스

융 당시 무의식의 세계는 탐험하지 않은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콤플렉스는 일종의 발견이었다. 분석심리학이 초기에 콤플렉스심리학이라 불렸을 정도로, 융에게 콤플렉스의 발견은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프로이트와 융이 활동했던 19세기는, 심리학에 관한 온갖 학문적 가설들이 정립된 시기이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몰두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흐름 위에서 심리학은, 철학 이론이 아니라 경험 분야라는 걸 밝히기 위해 방법론적 혁명이 필요했다. 실험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1832~1920)에 의해 고안된 <단어연상실험>도 그 연장선에서 고안된 실험방법이었다. 다만 이 연상검사의 목적은 피실험자의 평균 반응 속도와 특성을 확인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사실 <단어연상실험>은, 융과 그의 스승인 블로일러(Eugen Bleuler)가 채택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단어와 개념을 어떻게 연상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신이라는 실험 대상이 비규정성을 띠다 보니, 실험 상황이라는 심리적 부담이 실험과 정신 사이에 끼어들면 변수가 발생하곤 했다. 정신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실종되면서 급기야 실험 실패로 분류되는 사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융은 어떤 이유로든 고의로 지나쳐버리거나 침묵하는 등의 무의식적인 반응 장애에 도리어 주목했다. 반사적인 운동 반응을 확인하는 생리학적 실험이 아니고, 복잡한 정신과정을 다루는 실험이라는 특수성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융의 탁월한 점은 다른 사람들이 ‘반응 실패’라고 여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감정으로 물든 콤플렉스(gefuhlsbetonter Komplex)’를 발견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이중의 경청인데, 말하는 소리와 침묵의 소리를 둘 다 들을 수 있는 자의 통찰에서 비롯된 성과라 할 수 있다. 실제 피실험자들의 무의식적인 침묵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거나 얼버무리는 데는 어김없이 감정이 작동하고 있음을 융은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으로 물든 콤플렉스’는 감정과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관련이 있는 걸까?


 
감정, 콤플렉스의 작동기제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기 전에 주고받은 편지(『프로이트와 융의 편지』, 부글, 2018)를 보면, 국면마다 다양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있다. 가령 ‘빈(오스트리아)에서 생긴 콤플렉스들이 소동을 피우고 있다’, ‘이제야 이 콤플렉스들이 약간 진정되었다’는 식의 표현을 편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확인할 수 있는 건, 콤플렉스는 환자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겪는 자연스러운 정신현상이라는 점이다. 반면 우리가 소비하는 용법은 ‘열등감’이나 ‘약점’ 등과 관련된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는데, 융이 콤플렉스를 발견했을 때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의 저자 신근영선생님은, 콤플렉스에 드리운 부정적인 선입견부터 비우고 탐색하라고 조언한다.

콤플렉스komplex의 사전적 의미가 ‘복합체’를 의미하는 것처럼 연상실험에서 피실험자를 침묵에 빠뜨리는 건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단어들이다. 즉 ‘마음속에 군집을 이룬 어떤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가 콤플렉스다. 융은 마치 자석처럼 특정 단어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콤플렉스의 ‘핵요소’라고 했는데, 의지를 무색하게 만들면서 콤플렉스를 작동시키는 핵심 에너지가 바로 감정이다. 이 감정이라는 ‘핵요소’의 특수한 에너지가 단어들을 끌어당겨 ‘배열Konstellation’한다. 엄밀히 말하면 단어들의 이미지(象)를 배열한다.

배열은 외적 상황에 의하여 어떠한 내용을 모으고 준비하는 정신적 과정이 유발된다는 사실을 개념적으로 말한다. (…) 배열은 자기도 모르게 나타나는 일종의 자발적인 과정으로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중단할 수 없다. 배열된 내용은 특정의 콤플렉스들인데 이것은 고유의 특수한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같은책, 229~230쪽)

 배열은 돌연한 외부 자극으로 기억 속 관련 이미지들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개념적으로 지칭한다. 무엇보다 이는 무의식적인 과정인지라 연상을 중단하고 싶어도 뜻대로 안 된다. 의식의 습관적 태도와는 양립되지 않는 어떤 정신적 상황의 이미지가 콤플렉스인데, 실제 사람이나 상황을 표상한다 해도 현실의 사람이나 사물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콤플렉스는 어디까지나 ‘내적 경험의 대상’이며 그 핵심은 상象, 즉 가공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가령 ‘공포’라는 감정을 떠올려 보자. 잘 알려진 ‘착한아이 콤플렉스’의 핵심 에너지가 바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fear of abandonment) 감정이다. 추운 겨울 어스름 저녁나절에 집 밖으로 쫓겨난 아이가 있다. 아이 자신은 정확히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는 고분고분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무섭게 화를 내며 아이를 내몰았다. 너 같은 자식은 먹이고 가르칠 가치가 없다면서 당장 나가라고 했다. 문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엄마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들리고 옆집에선 된장찌개 냄새도 풍겨온다. 앞으로 절대 엄마 말을 거역하지 않겠노라 굳은 다짐을 하지만, 끝끝내 문이 열리지 않을까 봐 너무너무 무섭다. 당시에 경험한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에서 사라지고 감정만 몸에 새겨지기 마련이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만들어지는 게 콤플렉스이기 때문에, 그저 감정만이 남아 일상의 질서를 뒤죽박죽으로 흩뜨린다. 강렬한 경험의 시공간을 구성하던 사물이나 사람, 혹은 냄새나 색깔 등이 온통 감정으로 물든 채 콤플렉스의 복합적인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내가 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신경이 곤두서는지 논리적이고 타당한 방식으로 해명할 수 없다. 이건 실제 식탁 위에 오른 된장찌개가 아니라, 공포라는 감정이 끌어들여 계열화한 자신만의 이미지 군집이기 때문이다.

융과 프로이트가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소동을 피우다 진정되었다고 언급한 콤플렉스는, 정황상 두 사람의 감정적 경험이 개입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차분히 콤플렉스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강한 의지에 의해 억압될 수는 있지만 제거할 수는 없으며, 적절한 기회가 오면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을 가지고 다시 등장’하는 콤플렉스의 사용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대처였을 것이다. 치료자가 아닌 평범한 우리도, 안락함과 고통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영혼의 지도를 그린 사람이 바로 융이다. 융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그려나간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좀 더 따라가 보자.

 
인격의 발달을 위한 매듭(節), 콤플렉스
융에 따르면 현대인의 의식은, 내적 장애 요인들을 자신의 고유한 활동으로 파악하고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콤플렉스의 자율성을 실감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콤플렉스는 ‘상상된’ 것이고 내가 의도적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의식은 마치 위층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지하실에 재빨리 내려가 본 사람이, 침입자를 발견하지 못해 그 소리를 단지 상상에 불과했다고 믿으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소심한 사람은 위층으로 감히 가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책, 236쪽)


위층에서 수상한 낌새를 감지했다면, 두려워도 위층으로 가서 현재 상태를 분명히 인식해야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잘 다듬어진 은유 뒤에 숨은 채, 콤플렉스 정동이 보내는 신호를 숙고하지 않으려는 소심함은, 외면이고 무시다. 콤플렉스는 무시할수록 그 힘이 더 세진다고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억압이거나 ‘정신승리’일 뿐이다. 지금 맞닥뜨린 어려움을 애써 모면하려고 궁리할 게 아니라, 다가올 어려움에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은 도리어 건강에 속한다고 융은 말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콤플렉스라는 번뇌가 전혀 없는 삶은, 안정과 평화가 아닌 권태와 우울을 동반한다.

대나무가 해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자라면서 적당한 간격으로 마디를 짓는 원리를 떠올려 보자. 이는 바람이라는 자극에 맞서, 강직하되 유연하게 성장하는 법을 대나무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콤플렉스 또한 감정적 경험을 중심으로 마디 같은 흔적을 남긴다. 타자와의 충돌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그늘진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내 안의 타자와 ‘너’라는 타자를 동시에 만나는 셈이다. 이때 콤플렉스 정동으로 생긴 매듭이 너무 비대해지면 예민한 신경증적 상태를 초래하고, 매듭이 아예 없거나 너무 왜소하면 우울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온통 ‘나’로 가득한 자의식 끝판왕이 되거나, 무의식에 주도권을 뺏긴 채 아예 ‘나’를 잃어버리는 해리 상태를 경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신체적 증후까지 동반하는 콤플렉스 정동情動affect은, 분명 불쾌하고 성가신 것이다. 하지만 콤플렉스라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괴로움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수동적 상태에 있는 나 자신이다. ‘내면의 거주자’를 통해 다른 현실을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콤플렉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자아의 발달 과정에서 겪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거라서, 인격적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부득이함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안락함을 원한다면,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능동성을 사유해야 한다.


콤플렉스와 함께 사는 법
융에 의하면 콤플렉스가 형형색색으로 다양한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산다고 한다. 문제를 일으킬 만큼 강한 ‘핵요소’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다양한 콤플렉스가 생겨날 기회가 없을 만큼 고립된 삶을 살게 될 경우, 몇 개의 콤플렉스들만 무지막지하게 자가증식을 하게 된다. 앞서 ‘착한아이 콤플렉스’의 예시로 살펴본 아이에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소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감정을 제대로 다룬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공포라는 감정이 관련성이 적은 이미지까지 끌어당겨 비대해지는 걸 막으려면, 그 공포의 톤이 다양해져야 한다.

색깔의 스펙트럼이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것처럼 감정도 그렇게 분화될 수 있다고 융은 말한다. 공포가 거대하면 상대할 엄두조차 낼 수 없어서 무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집을 이룬 공포의 서사를 잘게 쪼개면, 작은 조각으로 분화된 개별 서사의 감정만을 상대하면 된다. 뭐랄까 만만하지는 않지만, 부딪쳐볼 만한 공포로 느껴지는 것이다. 마주칠 때마다 이름이라도 지어줄까 싶다. 미적지근한 공포, 바위 같은 공포, 고드름 같은 공포, 매운맛 공포, 소나기 같은 공포, 저녁노을 같은 공포 등등으로 말이다. 능동성은 타자를 통해 이런 다양한 톤의 감정이 출현할 계기를 만들어가는 역량이지 않을까?

콤플렉스가 에너지로 표현된다는 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환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명령이나 억압이 아닌 방식으로 내 마음을 변환할 수 있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콤플렉스들이 포진해 있다는 걸 기억하자. 무엇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타자들은, 우리를 심층의 근원으로 이끄는 위험하고 매혹적인 안내자들이다. 사로잡혀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조차 두려움 없이 만나면서 알아가야 한다. ‘콤플렉스를 안다는 건 콤플렉스를 다룰 줄 아는 것’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 신근영, 북드라망, 2012, 101쪽)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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