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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MBTI보다 재미있는 융의 심리유형 Ⅱ

by 북드라망 2025. 2. 4.

MBTI보다 재미있는 융의 심리유형 Ⅱ

정 기 재(사이재)


 

세상과 만나는 4가지 방식, ‘기능유형’
앞서 우리는 심리유형의 씨줄에 해당하는 외향형과 내향형이라는 ‘태도유형’을 살펴보았다. 이제 심리유형의 날줄, ‘기능유형’을 살펴볼 차례다. MBTI에서 T(사고), F(감정), S(감각), N(직관)이라 부르는 그것들 말이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사고, 감정, 감각, 직관 네 가지 기능을 모두 사용한다. 하지만 주로 사용하는 정신기능은 한 가지인데, 이를 기준으로 4가지 ‘기능유형’을 구분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고(T)는 대상들 사이에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를 세우는 기능이다. 그래서 사고형(T)은 지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한다. 상황의 인과관계를 추론해서 무엇이 타당한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감정형(F) 역시 판단하고 행동한다. 다만, 사고형이 머리로 판단한다면 감정형은 가슴으로 판단한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적 판단에 따라 세상을 평가하는데, 이성이 아닌 마음의 끌림으로 움직인다. 이들의 주된 질문은 이것이 좋은지 싫은지, 유쾌한지 불쾌한지에 대한 가치 평가다. 감각(S)은 외적 혹은 내적 사실들에 대한 지각이다. 그래서 감각형(S)들은 물리적 자극을 관찰하고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이며, 지금 듣고, 느끼고, 맛보는 것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직관형(N)은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촉이 발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직 생기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감지하는 데 탁월하다.

보다시피 이 네 가지 기능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사고는 논리적 질서를, 감정은 마음의 끌림을, 감각은 사실의 지각을, 직관은 본능적 감지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지 기능은 적절한 비율로 상호 보완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뜻대로 굴러가던가. 우리는 누구나 한가지 기능을 주로 사용하게 되며, 나머지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거나 열등해진다. 우리가 심리유형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융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의식의 태도가 배제시킨 경향과 기능들은) 의식의 기능에 비해 열등하다. 의식되지 않으면 그 경향과 기능들은 무의식의 다른 내용들과 합쳐져서 기괴한 성격을 띠게 된다.··· 어떤 기능도 아주 꺼버릴 수 없고, 단지 크게 일그러뜨릴 수 있을 뿐이다.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264쪽)


 
잘 쓸 수 있는 태도와 기능은 그대로 둬도 저절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한가지 주기능에만 의지하면 소외된 기능은 끝내 일상을 뚫고 들어와 심술을 부린다. 의식의 문턱을 넘지 못한 열등한 기능들이 무의식적 유령이 되어 분탕질을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평생 지적인 판단에만 의존해 온 사고형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때 가장 약해지는 기능은 감정인데, 이 핍박받은 감정은 주체 못 할 분노, 풀리지 않는 원한 감정으로 내 삶에 태클을 건다.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올라오는 파괴적 감정이 인간관계를 파탄 내고 자기를 갉아 먹는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이 주로 쓰는 정신의 ‘주기능’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래야 나에게 가장 미숙한 ‘열등기능’도 찾아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고(T), 감정(F), 감각(S), 직관(N)이 병렬적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잠깐 언급했듯이 정신 기능은 크게 두가지 범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평가하고 결정하는 ‘판단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을 감지하는 ‘지각기능’이다, 이때 판단기능에는 사고(T)와 감정(F)이, 지각기능에는 감각(S)과 직관(N)이 포함된다.


일단 주기능을 찾고 나면 열등기능을 찾는 일은 쉽다. 재미있게도 주기능과 열등기능은 같은 범주에 함께 있다. 예를 들어 주기능이 ‘사고’이면 열등기능은 같은 판단기능에 속하는 ‘감정’이 되고, 주기능이 ‘직관’이라면 ‘감각’은 열등기능이 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사고-감정, 감각-직관은 경쟁관계이기 때문에 서로를 배제해야 더 잘 작동한다. 사고-감정, 감각-직관이 각각 하나의 시소를 타고 있어서, 사고가 높이 올라가면 감정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고와 감정, 감각과 직관은 서로 적대적이다. 사고형은 감정형을 둔하고 감상적이라 깎아내리고, 감정형은 사고형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비난한다. 감각형은 직관형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라고, 직관형은 감각형을 의미 없고 지루한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깎아내리는 것은 상대일까? 지금 상대에게 느끼는 못마땅함은 사실 내 마음의 열등한 정신이 만들어 낸 그림자이다. 그래서 심리유형을 안다는 건 중요하다. 내 마음속 그림자를 보는 일이고, 상대에게 투사된 그림자를 거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1) 공정한 개혁가, 외향적 사고형
‘사고’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중요한 일들을 머리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외향적 사고형은 이 판단의 기준이 주로 외부의 ‘객관적 사실’이나 ‘보편타당한 관념’에 맞춰져 있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맞다고 하는 것,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자기도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누구보다 사회 문제에 적극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주관의 힘이 약하기도 하다. 심할 때는 어떤 외부적 근거나 지침 없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계적으로 사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화되지 않은 경험적 재료들만 쌓아 놓는다는 인상도 준다.

그렇다고 이들을 동어반복만 하는 진부한 사람들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사고형은 기본적으로 창조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자. 창조는 무(無)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실들을 재조합하는 과정이다. 외향적 사고형들은 낱낱이 흩어진 사실들을 이리저리 연결해 새로운 관계성과 법칙을 발견한다. 대표적인 외향적 사고형인 다윈을 보자. 그는 개별적 생물들의 정보들을 연결해 ‘진화’라는 새로운 법칙을 생산했다. 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사실들로부터 하나의 법칙과 이론을 만들어 냈으며, 그것으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건강한 외향적 사고형들은 ‘나’가 아닌 ‘우리’를 우선시하므로 ‘사회 개혁자’이자 ‘양심을 정화하는 자’로 통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사고는 감정과 시소를 타기 때문에, 사고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하면 감정이 열등해진다는 사실이다. 외향적 사고형은 대체로 교양있고 이성적인 사람들인데, 갑자기 폭발하듯 폭언을 쏟아내거나, 아주 사소한 일에 원한과 앙심을 품는 것이다. 때로는 경쟁자를 끌어내기 위해 뒷담화를 하는데, 그 논거가 치사하고 좀스럽기가 짝이 없다.
  

(2) 확신에 찬 혁명적 철학자, 내향적 사고형
내향적 사고형도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다. 다시 말해, 객관적 사실들을 재료 삼아 자기만의 정신적 이념을 구축하는 주관적 사고형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병들고, 고통당하는 누군가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외향적 사고형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객관적 증거들을 모아 사회적 해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내향적 사고형들은 이 객관적 사실들로부터 자기 내적인 견해, 이념을 만든다. 융이 내향적 사고형의 대표주자로 꼽은 니체를 보자. 니체도 마르크스처럼 사회적 부조리를 인식했지만, 그는 사회적 해법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 달리 말해, 외향적 사고형이 ‘객관적 사실성의 넓은 들판으로 돌진’하는 이론가들이라면, 내향형들은 객관적 사실들로 내적인 사고를 심화시키는 철학자들에 가깝다.

내향적 사고형의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합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사고), 하지만 보편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주관)! 그래서 이들은 누구보다 혁명적이고 이단적이다. 누구도 감히 해보지 않은 과감한 생각과 이념으로 사회 전체를 흔들기도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이들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지도 않는다. 어떤 비난과 위험에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제멋대로인 사람, 상대를 무시하는 오만한 사람이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들은 의외로 격의가 없고 어린애같이 순진한 구석이 있다. 가장 열등한 기능이 외향적 감정인지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도통 읽을 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선생으로서는 영 자격미달이다. 가르치는 일에 흥미가 없을뿐더러, 학생들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이론을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 취약한 사람들이다.

 
(3) 활기 충만한 사교 주의자, 외향적 감정형
사고형이 이성으로 평가하고 행동한다면 감정형은 가슴으로 판단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지금 내가 감정적으로 끌리는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한마디로 나의 좋고 싫은 감정이 모든 판단의 절대 기준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제멋대로만 구는 기분파라는 말은 아니다. 종종 잊곤 하는데, 감정도 사고만큼이나 사회적이다. 애국가가 울리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나, 고가의 명품 가방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다분히 학습된 감정들이 아닌가. 특히 외향적 감정형은 욕망의 방향이 사회를 향하고 있어서 이들의 감정도 아주 ‘보편타당’하고 사회적으로 ‘알맞다’. 이들은 남들이 열광할 때 열광하고 분노할 때 분노한다. 사랑도 ‘적당한 남성’, ‘적당한 여성’에게 느낀다. 속물이기 때문에? 아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외향적 감정형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하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집에 방문해서 그림 한 점을 봤다고 하자. 분명 외향적 감정형들은 그 그림을 칭찬할 것인데,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림을 산 주인이 속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들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인다. 이들이 활기차고 명랑하며 인간관계에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감정적 배려’에서 발생한다. 남들의 감정을 배려하다 정작 자신의 진짜 감정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의 감정은 더 이상 활기를 갖지 못하고 가식이나 연기처럼 느껴진다.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럽고 어딘가 들떠 보이기도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에 맞추다 보니 감정이 널을 뛰며 산만해지는 것이다.

더 심각한 일은 열등기능인 ‘사고기능’의 역습이다. 감정형들은 보통 논리적으로 사고하거나 깊이 있게 숙고하는 일을 질색하며 피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억눌린 사고가 반격에 나서는데, 모든 것들을 ‘~에 불과함’, ‘~에 지나지 않음’으로 깎아내린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에게조차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속삭이기 시작한다. 이럴 때 외향적 감정형들은 아주 미성숙한 판단을 고집스럽게 우기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4) 잔잔하고 깊은 심연, 내향적 감정형
조용하고, 부드럽고, 침착하지만 왠지 다가가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말하지 못할 깊은 비밀이나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은 사람들 말이다. 융은 이들을 ‘잔잔한 물이 깊다’라고 묘사하는 데, 겉으로는 냉정하고 무심하지만 속으로는 깊은 감정적 열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정형인 만큼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감정’이다. 다만 외향적 감정은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지만, 내향적 감정은 자기 내부로 깊이 침잠된다, 예를 들어, 외향적 감정형들은 동정심을 느낄 때 상대를 보살피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내향적 감정형들은 이 ‘동정심’이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이렇게 내부로 스며든 감정은 점점 뜨겁고 깊어지다가 결국에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떠안는 경지에 이른다. 그래서 이들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숭고하고 영웅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는다. 잔다르크나 마더 테레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내향적 감정형들은 기본적으로 ‘내향형’이기에 주체, 즉 자기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알고 보면 말이 없고 조용한 것도 타자들로부터 자기 우월성을 지키려는 방어 기제이다. 그래서 이들은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묘한 지배욕의 냄새를 풍긴다.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자신의 열정을 아이들에게 불어 넣기도 하고, 자기를 은밀히 드러내 우월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집요하고 냉혹한 지배자로 변하기도 하는데, 잔다르크나 마더 테레사가 그랬듯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전 존재를 걸기 때문이다.

한편 내향적 감정형들은 객체를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기도 하는데, 외향적 사고 기능이 지나치게 억눌렸을 때 그렇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억측하기 시작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야비하고 악한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에 빠지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자기 스스로 야비한 음모꾼이 되기도 하는데, 이 험한 격전지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5) 멋에 살고 멋에 죽는 외향적 감각형
요즘 인스타를 보면 멋진 옷을 입는 패피, 섬세한 입맛을 가진 미식가, 예리한 감식안을 가진 탐미가들이 주목받는다. 새로 나온 제품이나 핫플을 찾는 것도 기본 코스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저렇게 매번 멋지고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일은 어지간한 열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외향적 감각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들 중에는, ‘어느 정도 잘 차려진 점심 식탁’과 ‘좋고 멋진 취미’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지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을 ‘느끼고’, ‘감응하고’,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외부 사물을 감각할 때 모든 것을 의식화하지 않는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들을 선별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형들은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감각들이 불러 일으키는 섬세한 느낌과 쾌감을 하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목적이나 이유? 그런 것은 없다. 그저 감각이 주는 미묘한 차이들에 매혹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행동이 매우 세련되고 유쾌하며 즐길 줄 안다. 때와 장소에 맞춰 옷을 입고, 세련된 물건들로 집을 장식하며, 사람들을 초대해 진기한 음식과 고급진 음료를 대접하곤 한다. 때로는 옷이나 가구가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뭐 어떤가. 멋을 위해서라면 그만한 불편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집착이 되는 법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매우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사람들이다. 관찰력이 뛰어나서 누가 무엇을 입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칫 감각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라면 못할짓이 없는 도덕 불감증에 빠지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판단과 직관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감각뿐인지라, 자기반성이나 성찰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난다. 사건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 건 진부한 일이라 치워두는 것이다.

덕분에 이들은 종종 직관의 혹독한 보복을 겪게 된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기도 하고, 애인이나 아내를 두고 괴상망측한 망상을 한다. 보이지 않는 유령이나 심령현상에 정신없이 빠져들기도 하는데,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이라는 미국인들이 UFO, 점술, 심령현상에 몰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6)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는 내향적 감각형
감각은 외부의 대상을 오감으로 지각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감각 과정도 외향형과 내향형은 다르게 작동한다. 외향형에게는 감각되는 사물이 중요한데, 내향형은 그 감각들이 내 마음에 일으킨 주관적 심상을 중요시한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풍경화를 그린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이 두 유형의 감각형들은 모두 잎사귀 하나, 햇빛 한줄기, 미묘한 물결까지 아주 섬세하게 관찰할 것이다. 이때 외향형들은 풍경 자체가 주는 감각에 홀려 극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내향형들은 다르다. 이들은 관찰한 것을 자기 내부로 끌어들여 깊이 음미하고 변형시킨 후 그림을 그린다.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말이다.

내향적 감각형들은 평소에 조금 멍하고 무기력하게 보인다. 외부의 사람이나 사건들이 그에게 전혀 인식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자기 안의 심상에 집중하느라 겉으로 멍해보일 뿐이지, 누구보다 섬세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중이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예리한 관찰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외부와의 소통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말보다는 예술로 표현할 때 빛이 난다. 실제로 섬세하고 감각적인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들로 통한다. 그런데 이들의 착함은 선악 시비를 가려 옳은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극도로 갈등을 싫어해서 모든 일에 중립을 지키거나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태도를 착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중립적 태도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어리숙함 때문에 종종 남들의 공격성과 지배욕의 제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누구보다 쉽게 남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열등한 기능이 외향적 직관, 즉 사람의 이면을 파악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럴듯한 말, 혹은 강압적 위세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잘 파악하지 못하며, 안다 한들 그들을 거절할 뚝심도 부족하다.

이런 극단적 상황이 거듭되면 억눌린 무의식은 반격을 시작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적대감이 착하고 어리숙한 모습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7) 가능성을 찾아다니는 모험가, 외향적 직관형
감각이 사물이나 사건의 표면을 지각하는 능력이라면, 직관은 그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달리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본능적인 육감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조망하고 예측할 줄 아는, 즉 촉이 좋은 사람들을 직관적인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특히 외향적 직관형들은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감이 남다르다. 사람들의 잠재성, 사업의 가능성을 기가 막히게 냄새 맡는다. 그래서 융은 외향적 직관형 중에는 기업가, 투기업자, 정치가들이 많다고 말했는데, 만약 지금 한국 사회를 봤더라면 아이돌을 발굴하고 키우는 연예 기획자들을 으뜸으로 꼽았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외향적 직관형이 균형 잡힌 삶을 산다면, 그는 경제나 문화 발전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모든 출발의 주도자이자 촉진자로서 사람들에게 용기와 열정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사방이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본능적으로 빠져나갈 길을 찾아낸다.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다. 바로 냉철한 현실감각이다. 현실이란 가능성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꾸준히 밭을 갈아 열매를 수확해야 하는 현장이다. 그런데 이들은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들이 눈에 보여서,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누가 선점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그 가능성을 좇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수확은 언제나 남들의 차지고 그에게는 남는 것이 없다. 이 분야 저 분야 넘성거리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게 된다.

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심각한 강박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이들의 강박증은 감각형의 강박과는 조금 다르다. 감각형에게 억압된 것은 무의식적인 직관이기에, 유령이나 심령현상 같은 미신적인 것에 집착한다. 반면 직관형들의 강박은 건강이나 재정 같은 현실적인 것들을 향한다. 누구나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좀스러운 허풍을 늘어놓기도 한다.

 
(8) 몽상가 혹은 영적 지도자, 내향적 직관형
내향적 직관형들은 가장 종교적이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직관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본능적 감각인데다, 내향적 성향 때문에 무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들이 과거에 태어났다면 종교적 지도자, 혹은 샤먼으로 활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성과 과학의 시대인 현대에는 이들이 발디딜 땅이 매우 협소하다. 종종 ‘신비한 몽상가’, ‘환상을 좇는 예술가’, ‘현명한 기인’쯤으로 간주되는 것도 그래서다. 쓸데없이 무의식적 환상에 사로잡힌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란 비아냥이다.

그러나 융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융에게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에서 쫓겨난 쓸모없는 찌꺼기들이 아니다. 무의식은 세포들의 생물학적 기억부터, 인류의 역사, 개인의 경험을 농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을 마주한다는 것은 태초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 출현한 세계 전체와 마주하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전 인류의 안녕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인 것이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즉에 죽고 죽이는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것과 몽상하는 것은 정말 한 끗 차이다. 이들에게 가장 열등한 기능은 외향적 감각들이다. 현실을 사실대로 지각하는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들이 종종 내적 체험에 취해 현실로부터 극도로 멀어지는 것도 그래서다. 그럴 때 이들의 예지력은 순식간에 기괴한 몽상으로 전락한다. 생각해 보자. 제아무리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공허하고 의미 없는 황야의 메아리일 뿐이다.

 




보조기능의 재발견, 자기 탐구의 능력자 되기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심리유형에 따라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덕분에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잘 살아갈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게 편협하게 살아가다가는 무의식의 역습을 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열등기능을 홀대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더 심술궂어지는 게 이들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 나의 열등기능이 무엇인지, 무엇을 방치하고 소외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그것들을 활동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게 쉽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주기능과 열등기능은 라이벌 관계라 서로를 키워줄 수가 없다. 같은 시소를 타고 있어서 한쪽이 활성화되면 다른 한쪽은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사고형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사고를 써야 하는데, 사고하면 할수록 감정은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고형이 곧바로 열등기능인 감정을 활성화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융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자신의 또 다른 정신 기능, 즉 보조기능(제2의 기능)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융의 얘기를 들어보자.

 

무의식에 가장 많이 억압된 기능(열등기능)에 쉽게, 그리고 의식의 관점을 충분히 지각하면서 접근하려면 제2의 기능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 (332쪽,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MBTI가 16개의 기능유형을 갖듯이 융의 심리유형도 조금 더 세분화할 수 있다. 주기능, 열등기능 외에 제2의 기능, 즉 보조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보조기능은 열등기능과는 달리 주기능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기능들이다. 보통 사고-감정, 감각-직관이 짝을 이뤄 각각 주기능과 열등기능이 되는데, 보조기능은 내 짝이 아닌 상대의 짝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고형이라면 보조기능은 ‘지각기능’ 중 하나인 감각이나 직관이 되고, 감각형이라면 사고나 감정 중 하나가 보조기능이 된다. 판단유형은 지각유형에, 지각유형은 판단유형에 도움을 주는 보조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보조기능을 활용하는 것일까? 융은 이에 대해 일일이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개인에 따라 그 해법이 무척이나 다양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해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직관을 보조기능으로 쓰는 외향적 사고형이라고 생각해 보자. MBTI로 치면 ENTJ 쯤 될 것이다. 이때 나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열등 기능은 주로 감정이고, 이 열등한 감정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직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잠시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멈추고, 내 자신의 감과 촉을 믿는 모험을 감행(직관)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훈련을 거듭하면 위축되어 있던 주관적 감각도 활성화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고 기능을 보조기능으로 사용하는 감각형이라면 사건들의 인과를 살펴 논리적 질서를 만드는 훈련(사고)을 통해 공허한 탐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융의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융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 두 번의 생일 파티가 열렸는데, 한번은 전문가들의 축하 파티였고 다른 한 번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공개 행사였다. 그런데 융은 학자들의 파티보다 일반인들의 파티를 더 즐기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그들이야말로 내 작업을 계승할 바로 그 사람들이야. 저 한 사람 한 사람, 고통받고 갈구하며 그래서 내 생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시도하는 사람들.”(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이부영 옮김,『C.G. 융 우리시대 그의 신화』,한국융연구원, 2016,16쪽)

 
융은 자신의 이론이 의사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마음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다만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에 가닿는 방법을 진즉에 잊어버렸다. 융이 굳이 『심리유형』을 일반화해서 대중서로 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사에게 넘겨버린 자기 마음에 대한 주도권 탈환하기! 그러니 심리유형을 심심풀이 가십거리로만 대하는 건 부당하다. 신중한 자기비판과 비교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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