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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바다는 사람과 공동체를 기르네

by 북드라망 2024. 12. 19.

바다는 사람과 공동체를 기르네 


1. 주는 대로 먹는다
인류는 잡식이다. 기원부터 따져보자면 쉬이 잡기 어려운 육식보다는 다양한 자연 먹거리의 채집이 식재료 준비의 일차적 모델이었을 법하다. 인류사적 맥락에서 농경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재배 경작을 기준으로 최소 기원전 만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제레드 다이아몬드,『총·균·쇠』) 그 이전까지의 인류는 주로 주워 먹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또한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테니 채집을 인류의 기본 생계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듯하다. 인류는 줄곧 주는 대로 먹어왔다는 이야기다. 


주워 먹는다, 주는 대로 먹는다. 언뜻 들으면 궁핍한 생활이 떠오른다. 그런데 또 곰곰이 음미해보면 뭔가 울컥해지는 포인트가 있다. 사람이 밤이나 도토리를 줍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가 숲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거나 숲 너머를 마냥 쳐다 보지 못하리라는 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마 그는 무릎을 꿇고 코를 킁킁거리거나(버섯 찾기의 경우처럼) 손가락을 쫘악 펴고 부드럽게 풀숲을 더듬을 것이다. 숲 천장 전체의 흔들거림에 시선을 두면서도 그 리듬을 깨지 않도록 할 것이다. 새집의 알이나 가지의 열매를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귀하게 가져갈 것이다. 주는 대로 먹는 이는 조심스럽고 겸손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한번 멋지게 차려입고 파인 다이닝을 골라 가고 싶은 마음이 수그러든다.  
         


2. 패총은 한반도 신석기 보물창고
어디 숲뿐일까? 주는 대로 먹는다면 바다가 훨씬 더 매력적인 장소일 수 있다. 육지 식물은 전부 독성이 있고, 숲에는 새알이나 벌레, 열매나 구근류를 함께 노리는 다람쥐, 토끼, 여우, 호랑이나 곰 등 다양한 경쟁 포식자들이 많다.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사피엔스의 대이동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시 논의할 텐데, 육지를 통한 이동은 이처럼 새로운 식물상과 낯선 경쟁자가 주는 위협에 하나씩 적응해가면서 할 수밖에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려면 주변 풍경에 대한 정교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그들을 인간 생활로 끌어들이려는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는 실로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학의 생물학과 화학과가 공동의 이동 랩을 만들고 돌아다니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석기 시대 최고의 두뇌들은 강인한 육체도 겸비했을 테니 손흥민같은 날렵한 사냥꾼이 진득하게 실험 실습에도 열을 올렸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어구야, 모델이 딱 떠오른다. 바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비행사이자 과학자, 풍자 수리공인 나우시카다. 그녀는 바람 계곡 왕국을 이끄는 지도자요, 멸망의 대지를 달래는 샤먼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의 요지는 이렇다. 레비 스트로스도 말하지만, 인류 최고(最高)의 혁명인 신석기 혁명은 문자도 국가도 알지 못했던 이런 구석기인들의 지적 모험이 만든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제 숲에서 나와 해변을 떠올려보자. 여기는 한반도 선사의 어느 바닷가다. 해변으로 미역, 다시마, 그밖의 많은 해조류들이 떠밀려온다. 이들에게 독은 없다.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면 뭐든 집어볼 만하다. 이런 바다풀 말고 다양한 패류와 갑각류도 있으리. 조개나 홍합, 겨울철 별미인 굴같은 것들과 집게가 귀여운 게들 말이다. 확실히 바다 채집은 숲 채집보다는 덜 위험해 보인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쟁 포식자들도 없고, 조수 간만의 차는 예측할 수 있고 갑자기 비가 오더라 해도 분위기 보아 재빨리 육지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또 숲에서보다 채집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울 듯하다. 넘실거리는 착한 파도라면 아주 어린 아이들이라도 제멋대로 놀라고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이고 맹독성 곤충이나 뱀도 근처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쉬워 보이는데도 한반도 구석기 유적이 바다에서 발견된 적은 아직까지 없다. 구석기 유적으로 이름 높은 금강 부근의 공주 석장리, 굽이쳐 흐르는 한탄강을 끼고 있는 연천의 전곡리, 남한강 옆에 자리한 단양 수양개 등 모두 유속이 적당한 강변 유적이다. 물론 발견이 안 된 것이기에, 한반도 구석기인들이 바다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구석기인들이 바다를 찾지 않았다는 가정도 치워버릴 수는 없다. 나는 후자의 해석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들 바닷가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바다 채집과 숲 채집 사이의 차이가 궁금했다. 


우선, 나는 한반도 바다 채집 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 신석기 유적지를 검색해 보았다. 흥미롭게도 한반도 신석기 유적은 거의 다 강의 하구 또는 바닷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반도 신석기 모델은 큰 강 부근의 대규모 경작은 아닌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들 바다 신석기 유적지의 공통점은 전부 패총(貝塚)이 있다는 점이다. 숲의 채집인들은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애벌레나 새알까지 포함해서 구근류, 열매, 버섯을 먹었다는 흔적은 세월에 다 부숴져버렸다. 반면 패류는 껍질이 산성이기 때문에 오래 남기도 하고, 신석기인들이 또 조개 껍질 등을 아무데나 버리지 않고 한곳에 모아 버린 까닭에 흔적이 잘 보관되었다.  

 

한반도 대표적인 신석기 패총 유적지는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 부산 동삼동, 시흥 오이도에 있다. 나는 이번 여름 친구들과 세 곳의 조개무덤을 다녀왔다. 그리고 가을에 서해 안면도 부근의 고남 패총과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 유적지까지를 전부 돌아보았다. 과연 패총의 신석기 유적지는 강가나 동굴 등에서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구석기 유적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예상과는 달리, 바다 채집이 숲 채집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혼자서 여유롭게 해변을 산책하면서 조개 몇 개, 물고기 몇 마리 잡아 오는 수준으로 생각했다가, 나는 큰코다쳤다.  

 

<< 동삼동 패총 전시관>> 의 패총 모형




3. 세 개의 바다, 세 가지 맛
공주나 전곡의 구석기 박물관은 그 내용으로 보면 사실 천편일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 곳의 패총 유적지는 내부 전시 내용이 각각 완전히 달랐다. 이런 차이는 일차적으로는 재현된 전시물 특히 ① 신석기인들의 패션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양과 시흥의 옷차림 차이가 컸는데 양양의 선사인들은 재질이 투박하고 장식도 거의 없는 옷을 입고 있었던 반면, 시흥의 선사인들은 목도리와 조끼, 앞치마를 비롯 다양한 방식으로 재단된 겉옷들을 입고 있었다. 물론 박물관 건립 시기에 따른 해석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말로 양쪽 바다 사람들의 옷차림에는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다 경관도 다르고, 이곳에서 부는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도 다르고, 주변의 숲도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② 이차적으로는 각 유적터에서 발굴된 생활 도구(토기)의 형태나 주거 양식이 달랐다(토기와 주거에 대해서는 다른 화에서 다루기로 하자). 크게 보면 바다 낚시에 집중하고 토기를 사용하면서 정주했다는 점에서는 모두 신석기 형태라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전혀 다른 언어를 쓰지 않았을까 상상될 정도로 먹는 것이며 사는 모습에 차이가 있어 보였다. ‘신석기’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들이 있었을 수 있다. 물론 진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이런 차이는 전시된 유물들 중, 선사인들의 먹거리에 대한 소개에서 더 드러났다. 삼면이 바다라고는 하지만 다 같은 바다가 아니었다. ③ 각 패총에서 나온 동식물상을 분석하면 이들이 전혀 다른 먹거리에 의존했음이 드러난다. 

 

 


일단 패총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조개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세 군데 선사유적지 박물관의 전시 설명과 신석기 패총 연구서들을 종합해 본 결과, 한반도 신석기 사람들이 섭취한 조개류로는 굴, 홍합, 백합, 바지락, 피뿔고둥, 꼬막, 대수리, 떡조개, 소라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굴의 비율이 높다. 태안 안면도 고남리 패총의 80%, 통영 연대도의 경우 패총의 85%, 김해 수가리 패총의 98%가 굴이라고 한다. 김해 유적지를 빼면 모두 서남부 패총이다. 부산 동삼동은 제일 중요한 신석기 유적지이기는 하지만 굴만 놓고 보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양양에서 굴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덧붙여, ‘조개 채집’이라고 해도 먼 바다에 있는 신안 가거도, 여서도 패총에서는 상대적으로 깊은 바다에 사는 홍합, 전복, 소라의 비중이 높다. 반면,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과거의 비봉리에서는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汽水域)에서 나는 제첩류가 많다. 


남해 동삼동과 동해 오산리는 조개 채집보다 물고기 낚시나 바다 포유류 사냥이 훨씬 활발했던 것 같다. 동해 쪽에서는 쓰시마난류와 북한한류가 교차하기 때문에 해류를 타고 회유하는 어종이 풍부해서 연어 등의 중대형 물고기가 많이 나타나므로 오산리의 선사인들은 다양한 낚시 도구를 개발했다. 하지만 서해안의 어부들은 황해난류가 올라오다가 가을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겨울에는 수온이 낮아 물고기 구경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남북한 전체 패총 유물들을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함경도의 굴포리 같은 경우는 송어, 연어, 고등어, 명태, 임연수, 가자미 등 한류성 어류 흔적이 발견되고 서해안에서는 민어, 참돔, 복어류, 가오리류 등 난류성 어류 유체가 출토된다고 한다. 남해안은 좀 다양한데 참돔, 다랑어, 쏨뱅이를 비롯해 상어류까지 발견된다고 한다(이상은 《오산리 선사유적 박물관》, 《동삼동 패총 전시관》, 《시흥 오이도 박물관》전시 설명과 김범철·성춘택·천성행,『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126~140쪽 참고). 

 

세계 최고(最古)의 바다 암각화라고 할 수 있는 울산 반구대에는 엄청난 종류의 고래들이 새겨져 있다. 추정해서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초기까지 선사인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거대한 바다 동물을 새겼다. 이 암각화에는 열 명 이상의 노 젓는 사람이 탄 고래잡이 배까지 그려져 있는데, 선사의 어부들은 카누처럼 통나무 하나를 쪼개어 깎은 고도의 어선 제조 기술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선박 제작 기술에 관해서는, 아마 신석기 때에는 바다였을 것으로 보이는 창녕 비봉리에서 발견된 배가 증명해준다. 비봉리에서 발견된 배 유물의 진품을 보려면 《국립 중앙 박물관》의 〈선사관〉에 가면 되는데, 지금은 내부 전시 리모델링 중이다. 《시흥 오이도 박물관》에 가면 중앙 전시실 입구에 신석기시대 서해 사람들이 겨울 캠프인 오이도를 찾기 위해 배를 몰았으리라고 추정하는 영상과 재현물을 볼 수 있으니, 당장은 여기서 활발한 바다 탐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런데 《시흥 오이도 박물관》에서 재현하고 있는 배는 크기가 작아서 먼 바다용은 아닌 것 같고 근해 어로용이나 이동 수단이었을 것 같다. 

 

신석기인들이 서해나 남해의 비교적 얕은 바닷가에서 편안하게 해조류나 채집하고 살았을 것 같았는데, 그들이 밀려오는 해조류나 굴러다니는 갑각류를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는 계절에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냥 기술로만 따지고보면 확실히 돌 투석기나 창에 의존하는 것에 비해 바다 사냥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기술이 필요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바다 채집에는 아주 많은 도구가 필요했다.   

 

 

 

4. 물밑에서 나누는 숨
나는 조용한 바다 채집 풍경을 살펴보려고 패총 유적지를 찾았는데, 거기에서 발견한 것은 화려한 어로 기술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선사인들의 생활터였다. 자, 지금부터는 각 패총 유적지에 있는 박물관이나 전시실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다 생활의 도구들을 통해, 회귀하는 어류 낚시까지를 채집의 범위에 넣어 한반도 바다 채집의 다채로움을 정리해보겠다. 


서해의《시흥 오이도 박물관》과 동해의《오산리 선사유적 박물관》에서는 해조류와 갑각류 채집의 도구와 그에 따른 기술을 공부할 수 있다. 오이도에서 시작해보자. 패류의 채취는 조개의 서식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소라, 피뿔고둥 등 맨손으로 채취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굴, 전복, 삿갓조개 등은 암초에 붙어살기 때문에 손으로는 뗄 수 없어 빗창이나 망치가 필요하다. 《시흥 오이도 박물관》에는 당시에 채집했을 다양한 전복류와 전복 채취 도구 빗창과 뒤지개가 전시되어 있다. 전복은 평소 마트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크고, 그 껍질도 무슨 중생대 공룡같이 무시무시하다. 도구로서는 특히 빗창이 눈길을 끈다. 동물뼈(아마도 사슴뼈?)로 깎았을 것 같은데 그것을 쥔 손도 떼어질 전복도 다치게 하지 않을 정도의 탄력성과 그러면서도 자신은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을 가진 날렵함이 인상적이다. 사슴뿔로 만든 뒤지개 역시 뿔의 모양을 살린 채집 도구인데, 숲속을 걸어가는 사슴을 보고 전복을 뜯을 생각을 했을 오이도인들의 자유자재한 상상력이 놀랍다. 

 

 


바다 채집과 관련해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세 군데 박물관을 통털어 전복이었다. 전복은 바다 깊이 산다. 전복을 따려면 잠수에 익숙해야 하는데, 이것이 ‘한번 해보자!’ 하는 방식으로 될 리는 없다. 제주도에는 우리나라 해녀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제주 해녀 박물관》이 있다. 나는 삼면의 패총 유적지를 답사한 뒤, 전복을 따는 일이 궁금하여 지난 가을에 이 박물관에 다녀왔다. 《제주 해녀 박물관》에 따르면, 해녀가 되려면 아주 이른 나이부터 차가운 바닷물에 적응을 해야 하고, 물질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끊임없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해녀들은 각각 구역을 정해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는데 그 안에서는 선배 해녀의 지도에 따라 엄격하게 바다 생활의 윤리를 익히면서, 함께일 수밖에 없는 이 생의 고단함과 신비로움에 대해 계속 이야기 나눈다고 한다. 물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후의 보루일 수밖에 없으니 이들 사이는 혈육의 정을 넘어선 인정과 의리의 마음으로 질기게 이어져 있다고 한다. 


전복을 딴다든가 하는 식으로 잠수를 오래 하면 고막에 지속적으로 압력이 가해져 외이도(外耳道)의 뼈가 돌출되는 외이도골종이라는 병이 생긴다. 안도패총과 욕지도패총, 가덕도 장항유적에서는 패총에서 인골도 나왔는데 외이도골종이 제법 빈도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신석기 바다 사람들도 오랜 세월 물질을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도 당연히, 서로를 책임져줄 자매나 형제가 있었으리라. 든든한 바다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신석기 유적지 답사를 떠나기 전에, 채집을 하면 개인이 자기 먹거리에 책임질 수 있으니 공동체의 규모가 작고 응집의 변폭도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제주도 해녀 문화에서 알 수 있듯이 잠수를 통한 채집 모델에서는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에게 매우 의지하며 전통과 문화의 전승에도 힘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공동체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임도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심해는 숲에서보다 훨씬 더 위대한 자연 어머니의 힘을 직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바다에서 채집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를 넘어, 바다 생물들과도 거대한 바다 자체와도 친밀한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5. 함께하는 바다 낚시 
나는 패총에서 조개나 굴 껍데기가 부서져 있지 않고 온전하게 발견된 점에도 놀랐다. 바닷속에서 부수어서 내용물만 건져 올린 것이 아니라, 껍질째로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불 위에 놓고 그 입을 벌려서 내용물을 빼먹지 않았을까 싶다. 육지에서 딸 수 있는 감, 사과 등의 열매는 굽지 않아도 바로 따서 먹을 수 있다. 바다에서는 채취가 쉽고 해조류에 독성은 없다지만, 패류에도 다양한 바이러스가 있을 테니 생으로 먹으면 큰 탈이 날 수가 있으리라. 그러므로 육지보다 바다 채집에서 불을 다루는 기술이 더 필요하다. 세 군데 바다 박물관에서는 모두 불 위에서 굽기도 하고 끓이기도 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었다. 바다 생활에는 그릇이 필수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이리저리 많이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숲 채집보다는 생활 반경이 제한적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물론 바다는 계절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니까, 굳이 다른 곳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지 않아도 되므로 정주의 비율도 높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바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육지 사냥에서와는 다른 도구가 필요하다. 어로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포획대상에 따라서다. 그물어법, 작살(자돌刺突)어법, 낚시어법이 그것들이다. 이 세 가지 기술에 대해서는 양양의 오산리에서 배웠다. 그물어법은 풀로 꼰 실을 엮어 그물을 만들고 그 밑에 비슷한 무게의 돌을 매달아 휙 던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그물추(어망추漁網錘)가 필요하다. 그물추는 평평한 돌의 양쪽 가운데 부분을 조금 뜯어내어 실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서해안에서는 조차(潮差)가 커서 동해나 남해에서보다 더 무거운 돌을 쓴다고 한다. 발견된 것으로는 1kg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물어법과 비슷한 것으로 가리 내리꽂기도 있다. 통발 같은 가리를 만들어 물고기가 많이 보일 때 위에서 내리 눌러 가두는 것이다.  

 

《오산리 선사 유적 박물관》에서는 신석기 어부들이 그물 던지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그물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다. 그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을 부분 재현해 놓았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던지거나 걷기 위해서는 열 명 정도는 필요한 듯 보였다. 열 사람 정도가 함께 어로를 해야 하니, 이들은 바닷가에서 늘 마음을 맞추며 살았을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명이란 결국 인구 조절 기술이라고 했다. 하나의 공동체가 구성원 전부에게 고유한 역할을 부여해 자리 중복을 피하면서 서로 깊이 의존할 수 있는 관계망을 짜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라는 것이다(레비 스트로스,『야생의 사고』). 산업 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문명은, 학교에서는 일등을 위한 자리만 남겨 놓고 학급 전체가 자리 다툼을 하게 만든다. 취직이나 승진도 마찬가지다. 과밀한 인구와 계량화된 관료 시스템 아래에서, 모두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그 전체상을 보지 못하는 채로 허덕허덕 자리 지키기에 바쁘다. 나는 함께 그물을 던지는 양양인들을 상상하면서, 그들이 n분의 1로서 그물 끝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이 한번에 힘을 모아 던지려고 하면 그 간격과 드는 힘을 알아서 조절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잡은 물고기를 걷어 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하나가 힘 자랑이라도 한다고 하면 그물은 한 쪽이 기울어져 기껏 잡은 물고기들이 다 빠져나가게 된다. 이들에게 힘을 모은다는 것은 균형을 맞추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잡은 물고기를 나눌 때에도 고루고루 함께 잘 구워 먹었으리라. 


자돌어법은 작살이나 찔개살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작살과 찔개살은 미늘 유무로 나뉜다. 작살 자체는 뼈나 돌로 만든다. 작살은 자루에서 분리되는 회전식과 그 반대인 고정식이 있다. 뼈는 필요한 모양을 바로 깎으면 되고 돌은 깎기도 하지만 다양한 날과 다시 결합도 해서 쓸 수 있다. 낚시어법은 ‘외낚시법’과 ‘이음낚시법’이 있는데, 한반도 낚시법의 일반형은 이음낚시다. 이음낚시에는 가늘게 간 돌에다 뽀죡한 낚싯바늘을 결합한 이음낚시 도구가 필요하다. 돌이 무거운 축의 역할을 하므로 물고기를 타격하는데 좋고, 날카롭게 갈린 뼈 끝으로는 걸린 물고기는 쉽게 건져 올릴 수 있다. 


《오산리 선사 유적 박물관》에서는 연어를 모형으로 만들어 이음낚시하는 모습을 상상하도록 하고 있었다. 연어라니, 나는 평소 연어는 노르웨이산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반도 동해안의 신석기인들에게는 연어가 거의 주식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태평양을 거대하게 돌아다니는 연어는 예로부터 양양이라든가 하는 동해안쪽에 대략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돌아온다고 한다. 연어 반찬을 생각하니, 연어 식사권으로 동해 너머의 홋카이도가 떠오른다.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사람들은 연어피로 된 신발을 신고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연어란 껍질에서부터 고기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완벽한 자연의 선물이어서, 아이누의 고유한 의례에는 연어를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다 한다. 연어가 어디 북해도와 동해만 들를 것인가? 태평양 건너 캐나다 북서 해안의 인디언들도 연어를 크게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연어가 특산물이어서 연어 스테이크, 연어 튀김 등 다양한 연어 요리를 자랑한다. 연어라는 먹거리를 중심으로 두고 보니, 거대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커다란 문화의 그림도 그려진다. 물론 회귀하는 어류로는 은어, 황어, 숭어도 있다.     

 



6. 네안데르탈인도 조개를 좋아해 
한반도에서야 바다 채집이 신석기부터로 연대 추정이 되지만, 전세계적으로 보면 조개류의 채집은 구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의 극심한 혹한과 건조한 기후 변화 때문에 먹거리를 찾아 바다로 눈을 돌렸을 때, 특히 조개가 고마운 먹거리로 포착되었다. 그 증거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피나클 포인트(Pinnacle Point)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여러 동굴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약 50cm 두께로 굳어진 다량의 조개류, 홍합, 삿갓조개, 자인언트 페리윙클(Common periwinkle), 고래에 붙어사는 따개비류 등이 나왔다. 연대 추정을 해보니 대략 12만 년 전의 것들이었다. 이 따개비는 아마도 고래를 잡아 채취한 것이 아니라 죽어 뭍으로 떠밀려온 고래에서 뜯어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도 조개를 채집했다는 증거가 있다. 스패인 해안의 코스타 델 솔의 바흔디요Bajondilio 동굴에서는 백합의 조개 껍데기를 이용한 도구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크기가 크고 표면에 광택이 남아 있어서 2~4m 깊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채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 지역의 네안데르탈인도 우리 해녀들처럼 잠수에 능했을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도 바다 채집이 쉬웠을 리 없다. 우리와는 다르지만 그들도 바다에서 자신의 목숨을 의지할 친구들과 어떤 공동체를 꾸리지 않았을까? ‘채집’은 구석기요 ‘농경’은 신석기라는 구분도 따지고 들어가면 잘 맞지 않는 지역이 많고, ‘채집’ 자체도 숲마다 바다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다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그것을 누구와 어떻게 먹을지를 고민했던 선사인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바다에 대해 느꼈을 감정도 궁금해진다. 주는 대로 먹는다지만, 숲도 바다도 같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주지 않는다. 내가 누구의 덕분으로 주워 먹을 수 있는지, 바다 채집인들이 했을 고민의 넓이와 깊이가 아득하게 다가온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 참고문헌 ※ 
· 김범철·성춘택·천성행,『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진인진
· 레비 스트로스, 안정남 옮김,『야생의 사고』, 한길사
· 스즈키 기미오, 이준정·김성남 옮김,『패총의 고고학』, 일조각
· 앨리스 로버츠, 진주현 옮김,『인류의 위대한 여행』, 책과함께
· 제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총·균·쇠』, 김영사
· 《매거진 F-Clam》, 2020 3월호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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