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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조개 가면 미스테리

by 북드라망 2025. 1. 2.

조개 가면 미스테리


1. 하얀 얼굴 검은 구멍
조개는 먹기 위해서도 줍지만 꾸미기 위해서도 줍는다. 부산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 가면 동삼동의 선사인들이 조개로 얼마나 멋지게 꾸미고 살았을지를 재구한 재현물이 있다. 전시 벽면 중앙에 한 여성이 단정히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를 하고 있는데, 흙을 구워 귓불 안에 끼워 넣은 귀걸이를 제외하면 전부가 조개껍데기로 만든 장신구다. 그 아래로 투박조개, 밤색무늬조개, 세꼬막, 피조개 등으로 만든 조개 장신구가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조개 팔찌의 경우 안지름이 4~7cm 정도이니 진짜 팔에 들어갈 수 있나 싶은데, 어릴 때 끼워놓고 자라는 동안 몸에서 뺄 수 없게 했을 수도 있겠다. 동삼동 패총에서는 조개 팔찌가 1500여 점이나 나왔다고 한다. 

 

 

 

1500여점? 완전히 부서져서 흔적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을 터이니,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바닷가에 멍 때리고 앉아 굴러다니는 조개를 주워 심심풀이를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조개껍데기 쪽도 만만치는 않아서 부서지기 쉽다. 원하는 대로 결까지 살려 모양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신구란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더 돋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찬다. 그러므로, 마을 구성원 전부가 똑같은 장신구를 했을 리는 없다. 《동삼동 패총 전시관》설명에 따르면 주로 신분이 높은 성인 여성이 착용했다고 하니(『동삼동 패총전시관 자료집』, 35~36쪽), 아무리 세대를 거쳐 만들며 살았다고는 하나 동삼동 촌락의 비교적 작은 규모를 고려하면 귀부인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 동삼동의 선사인들에게 조개 팔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는 조개의 또 다른 쓰임을 소개하고 있어 눈길이 간다. 바로 조개 가면이다. 이것은 모조로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선사실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개 가면을 중요한 신석기 유물로 소개한다. 조금 큰 큰 가리비 같은 것에 두 개의 눈과 커다란 입을 뚫어 놓은 것으로, 도록에서 보면 ‘가면’이라고 하니까 대왕조개로 만들었다고 상상할 수 있는데 실제로 보면 손바닥 크기 정도다. 


어쨌든 선사의 동삼동 사람들은 조개로 구멍을 뚫는 일에는 귀신이었나보다. 조개 가면을 보면 자연적으로 뚫린 구멍이 아닐까도 싶은데, 고고학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비슷한 모양이 한반도 신석기 유적지인 양양 오산리에서도 토기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양양의 《오산리 선사유적 박물관》의 심볼이 바로 인면 토기다. 이 인면 토기 역시 매끈하게 구운 얼굴에 눈을 꾹꾹 눌러 만든 것으로 눈과 입을 살렸다는 점에서 동삼동 조개 가면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는 눈이 네 개라는 점에 있다. 신석기인들은 왜 인면을 가면으로 만들었을까? 눈은 왜 그렇게 또 중요했나? 
      


2. 생과 사를 잇는 버드맨 
가면이란 얼굴에 쓰는 것이다. 누군가 가면을 쓰고 나타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가면은 쓰는 자로 하여금 원래의 얼굴을 감추게도 하지만, 가면을 쓴 자를 바라보는 쪽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가면을 쓴 자의 눈에는 무엇이 보일 것이며, 그의 입으로는 어떤 목소리가 들릴 것인가? 눈과 입은 동종(同種)의 눈과 입을 찾기 마련이다.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가면을 쓴 자는 지금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말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가면의 출현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상식적 현실 속에 낯선 차원의 리얼리티가 나타남을 상기시키게 된다. 가면은 지금 여기에 하나 이상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하는 장치다. 하나 이상의 세계, 지금 여기에 갑자기 출현하는 어떤 세계, 그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가면을 쓴 자는 도대체 무엇을 보는 것일까? 이런 질문과 함께 생각하면 동삼동의 조개 가면과 오산리의 가면 토우는 그 이전 시대의 인간상(人間像)의 얼굴 표현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반도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적은 없지만, 유럽 구석기의 동굴에서는 반인반수를 그린 그림이라든가 조각상이 발견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17,000~22,000년 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의 최하단에 있는 버드맨과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 아리에주(Ariège)의 트루아 프레르(Trois-Frères) 동굴의 주술사(링크)

 

 

 

고고학자들은 두 개의 그림이 모두 ‘인간’을 표현했다고 보는데, 이유는 모두 직립을 해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그 머리에 있지 않고 두 다리에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지력에 있지 않고 그 신체의 독특한 사용에 있는 것이다. 그럼, 인신상(人身像)에서 인간의 머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버드맨과 주술사의 머리는 전부 동물이다. 라스코의 버드맨 왼쪽에는 새 모양을 한 지팡이가 그려져 있고, 그의 오른쪽으로는 내장이 흘러 나와 있는 채로 죽어가는 황소가 있다. 깊은 동굴 안에서 인간은 새의 얼굴을 하고, 한때 뿌리를 가졌으나 지금은 하늘을 꿈꾸는 새 막대기와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동물 사이에 있다. 이때 버드맨의 새 얼굴은 초월과 심층을 동시에 표현한다. 동굴 안, 꼬불꼬불 기어나가면 그 어디선가 출구를 만날 수도 있을 심층에서, 버드맨은 새의 얼굴을 하고 죽어간다. 그의 머리는 하늘과 지하를, 생과 사의 중간을, 완전히 구별되는 두 차원을 하나로 잇는 시점을 표현한다. 


한편, 주술사는 뿔을 달고 꼬리까지 갖춘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두 발로 서서 손을 모으고 있으니 그도 버드맨처럼 사람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주술사는 사슴의 얼굴을 하고 정면을 바라본다. 사슴의 눈에 비친 나는 어느새 사슴 세계의 한 존재, 전능한 숲의 지배자가 아니라 단지 그 숲에 사는 동물 중 하나가 된다. 일상의 차원에서, 인간인 나에게 숲의 사슴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슴 얼굴을 한 저 존재는, 나도 사슴에게는 한낱 자연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다고 말해준다. 동굴 안에 있는 주술사 그림은 먹는 자와 먹히는 자라고 하는 대립적인 두 위치가 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3. 인류의 2차장(二次葬)
동삼동의 조개 가면은 버드맨이나 주술사와는 다르다. 버드맨과 주술사 모두 동물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눈이나 입과 같은 구멍은 전혀 강조되지 않는다. 버드맨은 얼굴이 작고 점으로 겨우 표현된 눈이 있을 뿐이다. 주술사의 경우 잘 보아야 두 눈이 있지, 전반적으로는 사슴의 털과 뿔이 강조되어 있다. 덧붙이지만 구석기의 반인반수상(半人半獸像)에는 늘 발기된 성기가 있다. 반인반수의 젠더는 굳이 말하자면 남성인 것이다. 반면 구석기의 조각상 중에는 비너스라 불리는 것들이 많은데 모두 거대한 가슴과 히프로 강조되어 있고 특히 배에는 임신선이 그어져 있다. 이들 비너스상에는 아예 얼굴이 없는 것도 많다. 그런데 조개 가면과 오산리의 인면 토우는 매끈한 얼굴에 눈과 입이라는 구멍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둘을 보면 즉각 해골이 떠오른다. 동물상에서 해골상으로 이동한 가면의 변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인류 최초의 실물로서의 가면을 찾아보았다. 스티븐 마이든의 정리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가면이라 할 만한 것은 지금의 요르단 지방인 예리코와 아인 가잘(`Ain Ghazal)의 소도시 유적에서 나왔다. 한때 수렵 채집과 소규모 경작 마을이 있었던 예리코에는 9000년 전 무렵 장방형의 건물이 여기저기에 솟아 있었고, 농경지에서는 염소떼도 보였다고 한다. 이때 집은 돌이 아니라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었는데 단층이었다. 이들 집자리 유적에서 석고로 얼굴을 세심하게 다듬은 두개골이 나왔다. 스티븐 마이든은 이 석고-해골 유물의 제작을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어떤 집 안에서 한 남자가 작업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집을 만들었던 자기 아버지의 두개골에 작업을 하고 있다. 남자의 손은 바닥에 회반죽을 다지고 그 밑에는 뼈가 잠들어 있다. 시신을 여러 해 동안 묻은 다음, 무덤을 열어 두개골을 꺼낸 뒤 회반죽으로 바닥을 다시 메꾸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기린다. 
  남자는 하얀 석고와 붉은 안료, 조가비를 담은 그릇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작업한다. 코와 눈구멍은 메운 뒤 말리고 있으며, 두개골 밑 부분을 세울 수 있게 편평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하얗고 고운 회를 입힌 다음 붉게 칠한다. 별보배고둥으로 눈을 장식한 다음 두개골을 집 안에 놓는다. 남자가 석고를 뜨고, 깎고, 부드럽게 회를 입히는 동안 아내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들에서 녹두를 수확한다. 언젠가 아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바닥 밑에 묻은 뒤, 다시 두개골을 파내 머리를 석고로 장식함으로써 집안에서 계속 머무르게 할 것이다.(스티븐 마이든,『빙하 이후』, 116쪽)

 

 

아들이 아버지 해골을 들고 조용히 석고를 바르고 장식을 한다.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는 비슷한 시기 예리코 지역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이었다고 한다. 석회를 손에 든 이 아들은 언젠가는 자기 아들이 자기 해골을 다듬이라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위키피디아에서 제공하는 조상-두개 두상은 물론 가면이 아니다. 그런데 그 표현된 형태가 동삼동 인면상과 흡사하다. 인류는 ‘인간의 머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개념화하여 의례의 주된 도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예리코 유적의 두개골은 집안 조상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각각의 집에는 그 바닥 밑에 다양한 조상의 뼈가 묻어 있으며, 아버지의 뼈 중에서 유독 머리 부분만 그 집 조상신으로 따로 꾸며지고, 그의 자식이 아버지가 되어 죽음을 맞으면 이전의 조상신은 바닥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해골 조상신이 다시 방안에 모습을 드러내는 식이다. 이 집에는 아버지가 죽을 때마다 조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버드맨이나 주술사가 동굴에 있었던 것과 달리 이들 인골상은 집안에 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이들의 눈이 모두 조개 등으로 막혀 있다는 점이다. 해골이 있으므로 일상에서 죽음은 가시화된다. 그러나 죽음 쪽에서 산 자를 응시할 수는 없다. 이승과 저승의 ‘연결’과 ‘단절’이 장식된 해골상 하나로 표현된다. 

 

인류 장례의 기본 형식은 2차장(2次葬)이라는 연구가 있다. 두 번의 장례는 일차적으로는 죽은 자의 신체와 영혼, 이차적으로는 산 자를 위해 필요하다. 예리코의 인골상은 일단 바닥에 시신을 묻은 뒤, 살이 다 썩은 뒤 해골만 떼어 지상으로 가지고 왔다가 다음 해골을 맞이하여 최종적으로 지하로 그 해골을 돌려보내는 방식이므로 2차장에 부합한다. 

 

인류 장례의 인류학자라고 할 수 있는 로베르 예르츠는 2차장의 두 구간 중, 특히 1차장에서 시체의 부패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때 살을 완전하게 부패시키도록 해야 한다. 썩어가는 시신은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불결하다(야생의 관념에서 ‘더럽다’는 것은 위치가 불안정할 때를 가리킨다. 신발이 신장에 있으면 깨끗하지만 식탁 위에 있으면 더러운 것처럼; 메리 더글라스,『순수와 위험』참고). 화장(火葬)이라든가 족내식인(族內食人)은 이 부패를 가속화시키기에 좋다. 사자의 육체를 씹어 먹는 것보다 빠르게 흙으로 돌리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죽은 자와 피와 살을 나눈 일족들은 1차장에서 마을과 분리되는데, 그들의 육신에 깃든 죽은 자의 모든 것을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족들은 마을에서처럼 일상의 옷을 입고 평범한 음식을 먹거나 할 수 없다. 야생의 존재로 동물도 인간도 아닌 상태에서 거친 옷과 음식을 먹고 제대로 자지도 않으면서 시체의 살이 다 썩을 때까지 자기 정화를 거친다. 충분한 1차장에 의해 새하얗게 드러난 뼈는 한때 그 육체에 깃들어 있던 영혼을 비롯 일족 전부를 순결한 상태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죽은 자의 세계로 순결하게 입성하고, 일족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다. 

 

이때부터 두 번째 장례가 시작된다. 영혼은 순결한 모습으로 죽은 자의 세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반드시 한때 삶을 공유했던 자들이 주는 다양한 장신구와 예물로 치장되어야 저승의 입사(入社)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세계에서 받은 충분한 축복은 우선 저 세계에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증명해주는 표식으로 작용한다. 한편, 이런 치장은 영혼으로 하여금 다시는 이편으로 돌아오지 못하게도 한다. 이승으로 돌아오더라도 이보다 더 풍요롭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송을 받으며 저 세계로의 긴 여행을 시작하는 영혼은, 자신이 건넌 그 다리를 돌아보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떠난 바로 그 세계일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저승의 한 일원으로 삶을 충실히 다시 살 수밖에 없다.  

 

작년에 인문공간세종의 친구들과 홋카이도에 있는 아이누 선주민 문화 답사를 갔었다. 삿포로 시 근처에 있는 니부타니 아이누 박물관에서 그들 고유한 장례 풍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장례의 마지막에 마을 최고의 이야기꾼이 등장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길게 한다고 한다. 핵심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려준다는 데에 있다. 누구에게? 바로 죽은 자에게. 죽은 자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실컷 웃고 울었기에 더는 들을 이야기가 없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나라로 가볍게 떠난다.   


인류가 행한 두 번의 장례는 죽은 자에 대한 단순한 애도가 아니었다. 1차장에서 죽은 자의 일족과 친구들은 그들의 산 몸으로 시신이 썩어가는 동안 유사 죽음을 체험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와 뒤섞인 상태로, 혼란과 공포 속에서 유한한 삶과 무한한 인연에 대해 명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죽음과 삶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을 가까이하는 것은 위험하며, 삶은 삶 자체로 충분히 제 자리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2차장 때에는 완벽하게 두 세계의 분리가 강조된다. 예리코의 해골상은 2차장의 흔적이다.  

 

 


4. 가면, 두 세계의 통로
확실히 조개 가면은 신비롭고도 인상적이다. 동삼동의 조개 가면은 수렵채집의 구석기 유물일까? 파도의 흔적이 간직되어 있는 조개 표면이 암시하듯 바다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를 말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정주가 막 시작된 예리코에서처럼 신석기 유물일까? 그저 하얗다는 데에 방점을 찍은 민-얼굴과 둥근 구멍들은 예리코의 해골들처럼 조상신의 대리표상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나는 다음의 이유로 조개 가면은 후자의 표현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물론 누구도 정답을 알 수는 없다). 우선, 조개 가면은 부산의 동삼동에서 신석기가 만개한 4000년 전부터 3000년 전 사이에 만들어졌다. 신석기 전기와 중기 후기와 만기 유적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패총 연구자들이 분류한 문화층 구분 때문이다. 초기의 것일수록 맨 아래에 가 있기가 쉽고, 여기에 더해 동반된 주변 흙을 탄소 동위원소비를 따지 연대 측정하면 된다. 조개 가면은 겹아가리 토기가 동반된 덕분에 토기의 발달 과정에 따라 신석기 후기의 것으로 평가된다. 동삼동 유적지는 수렵채집민의 집터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일단 계절을 덜 타는 바다 환경 덕분에 사람들이 먹거리를 찾아 숲 여기저기를 이동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자리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의 죽음관은 이동하는 사람들의 죽음관과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특히 정주하는 장소와 그곳을 살았고 살아갈 일족의 계보를 연결시키는 ‘조상’ 개념이 발달했을 법하다.  

 

실제로 동삼동 유적지에서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독무덤이 발견되었고, 조·기장과 같은 곡식까지 나왔다. 가마터 없이 노지에서 불을 피워 흙을 굽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생활 필수품이 아니라 장례품까지 만들어야 했으니 무덤으로 사용된 독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의미 부여가 있었을 법하다. 조나 기장도 재배종에 가깝다면 동삼동에서는 몇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살았음이 분명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유물은 다양한 교역품이다. 동삼동에서는 흑요석과 조몬 토기까지 발견되었다. 흑요석(黑曜石)은 화산 활동에 의해 생성되는 화성암인데 자연 유리라고 할 수 있다. 규장질의 용암이 분출되어 결정이 형성되기 전에 식었을 때 만들어진다. 흑요석의 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는 그냥 보아도 고기나 섬유 등을 자르기에 적합해 보인다. 그런데 이 흑요석은 화산 지대에서만 구할 수 있는데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화산 지대는 바다 건너 일본의 규슈다. 여기에 더해 일본 조몬 문화 특유의 붉은 승문 무늬 토기 파편까지 나왔으니 동삼동 사람들은 바다 건너 섬나라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했다 생각할 수 있다. 

 

그들로부터 흑요석을 받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주었을까? 어쩌면 조개 팔찌였을지도 모른다. 연구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에 ‘한반도-쓰시마-규슈’를 잇는 교역료가 정착되어 활성화되었는데 사치재 교역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중앙문화재연구원 엮음,『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163쪽).

 

그런데 일본 조몬 문화와의 직접 연관성을 고려해서 일본에는 조개 가면이 없었는가 찾아보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아다카 쿠로바시 패총(阿高黒橋貝塚)에서 나온 굴 껍질 인면상이다. 《오산리 선사유적 박물관》은 인면토우 아래에 직접적으로 인면상의 계보를 아시아의 다양한 인면상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럼 조몬 토기의 맥락에서 인면상은 언제 어떻게 출현했는가?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와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재배와 가축화 등 신석기 혁명의 요건 대부분을 갖추었으면서도 왕이라고 하는 내부 척도를 옹립하지 않은, 인류사의 고유한 문화로서 열도의 신석기를 특별히 개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개념이 바로 ‘조몬 문화’다. 일본의 신석기를 특별히 부른다하여 폐쇄적인 일본의 인류사관을 드러낸다고도 비판받지만, 두 사람은 ‘조몬’을 ‘반신석기-반축적의 인류 상상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자고 주장한다. 

 

이 두 사람이 편 대담집 『繩文聖地巡禮』에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조몬 후기가 되어서야 토제 가면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한다. 조몬 중기까지만 해도 무덤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등 낮에는 산 자의 공간이 밤에는 죽은 자의 공간이 되는 식으로, 죽은 자와 산 자가 적극적으로 공존하는 군락구조를 보인다. 그런데 조몬 후기가 되면 이런 틀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무덤이 마을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하고, 환상열석과 같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는(上) 기둥들로 특별한 제단을 만들어 부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 초월에 대한 표상을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토제 가면은 바로 이런 조몬 후기에 나타난다. 나카자와는, 가면은 다른 세계로부터 어떤 존재가 들어온다는 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조몬 사람들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따로 있고 가면에 의해 그 통로가 만들어진다고 보았을 것이라고 한다(『繩文聖地巡禮』참고). 나카자와의 해석을 따르자면, 조몬 후기의 가면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이다. 그 다른 세계는 일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죽은 자의 세계이다. 이 죽은 자를 다른 어떤 동물의 유골이 아닌 해골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죽은 자의 왕국은 인간의 얼굴을 한 주민들로 채워져 있다.   

 


다시 동삼동의 조개 가면을 본다. 죽은 자의 나라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로서의 가면이다. 그런데 사실 조개가 너무 작기 때문에 사람이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조개에다 구멍을 뚫어 놓았기 때문에 바다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이 조개 가면은 동물의 얼굴을 한 신과 인간의 얼굴을 한 신 둘 모두를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꼭 신석기 유물이라고 단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5. 방상씨를 찾아서 
앞서 오산리에서 가면은 아니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토우가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토우의 특징은 눈이 네 개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 전통 문화 유산 중에는 네 눈을 가진 탈이 있다. 바로 방상씨탈이다. 방상씨는 중국의 고대 나의식(儺儀式)의 대표적인 신이다. 원래 방상씨는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황금사목(黃金四目)의 탈을 쓰고, 검은 저고리와 붉은 치마(玄衣朱裳)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서 나라의 역병을 쫓아낸다고 한다(『서낭당(민속과 예술 연구지 제8집) - 우리나라의 탈』(한국민속극박물관), 95~96쪽). 


그 외관만 보면 완전히 수렵채집 사회의 샤먼이다. 조금 더 찾아보니 과연 방상씨는 중국 고대의 궁중 사면이었다.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팡샹(方祥)’은 통치자의 공식 신앙을 대표하는 무당이었다는 것이다. 과거 왕조의 궁정 의식에서 그 지위가 점차 낮아지면서 팡샹 계통의 무당 일파는 거의 사라졌다. 당나라 이후에는 민속 신앙에서만 살아남았는데, 점차 장례식에서 두 가지 민속 신, 즉 길을 여는 신과 현도(显道)의 신으로 진화했다. 중국-위키피디아에서는 이 팡샹계 사람들과 그들의 샤먼적 의례가 일본 나라 시대(710~794) 이전에 전해져 나라 시대 내내 퍼졌는데, 그 이미지가 무서워서 역병의 신으로 대접받았다고 나온다.(링크)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918~1392)의 나례(儺禮) 즉 귀신을 쫓아내는 종교 행사에 방상씨가 처음 등장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방상씨가 장례행렬의 선두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다. 네이버 등에서 ‘방상씨탈’로 검색을 해보면 1919년 고종 황제 장례식때에도 거리에 등장했다고 나오고, 최근 영화 《군도》에도 등장한다. 방상씨탈이란 악귀를 쫓는 탈이었고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방상씨의 네 개의 눈은 사방을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네 개의 눈이 오산리 토우에게서도 발견된다.  

 

 


석기 시대 답사를 다니고, 여러 박물관의 유물을 보며 그 기원을 탐구할 때마다 미로에 빠져들게 된다. 중국의 팡샹씨가 한반도로 건너 오기 전에 이미 네 개의 눈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다니,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에 있으며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 말대로 문화의 진보, 인류 정신의 승리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레비 스트로스,『레비 스트로스의 말』).  최초 단 한번의 위대한 창조만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가능한 문화적 요소들의 조합일 뿐일지도!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 참고문헌 ※  
동삼동 패총 전시관,『동삼동 패총전시관 자료집』
한국민속극박물관,『서낭당(민속과 예술 연구지 제8집) - 우리나라의 탈』

김범철‧성춘택‧천선행,『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진인진
메리 더글라스,『순수와 위험』, 현대미학사 
레비 스트로스,『레비 스트로스의 말』, 마음산책
로베르 에르츠,『죽음과 오른손』, 문학동네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한국생활사박물관1』,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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