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집, 어디까지 해봤니?
1. 도토리를 주우며
인류는 고기만 먹지 않았다. 〈고기전〉에서 소개되고 있는 육식의 인류사를 보니 다른 먹거리에도 관심이 간다. 오래도록 인류는 잡식성이 아니었을까? 매일 안정적으로 고기를 잡기가 어렵고, 오랜 시간 저장을 해두기에도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선사 일상식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식물상이었을 것이다. 가을 단풍이 좋아 등산을 나서면 산 입구에서부터 예쁘게 떨어져서 ‘날 잡아줘~’ 부르는 도토리들을 만날 수 있다. 도토리묵을 만들 것도 아닌데 보이는 대로 허겁지겁 막 주워서 가방에 막 챙겨오게 된다. 한 웅큼 손에 도토리를 쥐고서 일어나 허리를 펴면, 나만 그렇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등산객들을 볼 수 있다. 다들 줍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아득한 채집의 추억이 나를 도토리에게로 다가가게 하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전곡 선사 박물관》2층 상설 전시실을 돌아다니니 오른쪽 맨 뒤편에 전곡인들의 채집 먹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전시물은 두 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 전시물 중에 도토리가 없다. 참나무는 신석기 시대에 비로소 진화한 나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둘째, 채집이라고 해서 나는 식물만 생각했는데 인류가 주워 먹을 수 있는 것에는 윤기 나는 까만 머루라든가 꾸지뽕, 산딸기만이 아니라 우엉이나 마, 인삼 등 구근류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온갖 모양의 버섯, 새알, 작은 애벌레, 곤충 등이 있다. 그동안 나는 먹거리 문화를 너무 거칠게 육식과 채식으로만 나누고 있었나보다. 인간은 꽤 다양한 것들을 먹을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눈앞에 바다가 확 펼쳐진다. 주울 수 있는 것으로만 치면 바닷가의 갑각류는 또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그런데 나중에 더 많이 알게 되는데 바다라고 해서 다 같은 바다가 아닌 까닭에 해변의 채집도 그 풍요도에 있어서는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럼 구석기 시대에는 물고기도 잡았을까? 여기에 대해서 인류학자들은 회의적이다. 일단 육지 동물을 돌이나 창을 던져 잡거나 계곡으로 몰아서 잡는 것과 달리,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어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창만으로는 되지 않고 구부린 창끝으로 다친 물고기를 건져 올릴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통발이나 그물과 같은 채집 도구는 구석기인들도 충분히 만들었을 법하다. 하지만 나뭇가지나 억센 풀로 꼬아 만든 어로 도구는 이 긴 세월에 남아 있지 않다.
2. 채집하는 손으로 자연을 다듬어
채집의 기술과 그 연마에 대해 상상해본다. 사냥과 사냥감 해체에 쓰이는 도구인 석기는 제작에 있어 아주 오랜 숙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채집은 두 손으로 한다. 숲바닥에 있는 것은 주우면 되고, 나무 위에 있는 것은 긴 가지 등을 쳐서 떨어뜨리면 된다. 오르기를 할 수 있으면, 나무 위 새둥지도 털 수 있다. 이처럼 ① 채집은 기술의 높은 숙련을 요구하지 않기에 남녀노소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어린이라도 자기가 먹을 것을 스스로 찾을 수 테니, 어느 정도 채집할 수만 있다면 많은 돌봄 기대하지 않고 자기 먹거리쯤은 챙기며 씩씩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집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채집할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② 내가 채집하고 싶다 해서 할 수 있지가 않으니 대단히 상황의존적이다. 덕분에 채집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활 범위를 상당히 넓게 가져가야 할 것이다. 계절에 따라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4호선 오이도역에 내리면 《오이도 선사 유적 공원》과 《시흥 오이도 박물관》에 갈 수 있다. 오이도의 선사 유적 공원은 한반도 신석기 생활을 복원하고 있는데, 박물관 설명을 따르면 오이도 유적지는 서해 내륙 사람들의 겨울 이동 캠프였다고 한다. 동해 바닷가에 있는 양양의 선사 유적지와 부산 동삼동 선사 유적지, 제주 고산리 선사 유적지는 전부 신석기인들의 정주터였다. 그런데 오이도는 계절 캠프라니, 오이도인들은 겨울 식량으로 굴에 주목했다고 한다. 채집은 구석기인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신석기가 되어도 능동적으로 주거지를 옮기고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채집이 상황의존적인 활동이기는 하지만 마냥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식은 아니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스타카Star Carr(링크)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 가운데 하나다. 인류학자 스티븐 마이든에 따르면 라스코의 동굴벽화나 투탕카멘 무덤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장소라고 한다. 스타카는 ‘수렵채집-구석기’와 ‘농경-신석기’라고 하는, 생산 양식에 따른 확실한 선사 시대 구분을 깨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스타카에 있는 화전 흔적이다.
스타카에는 갈대를 태운 흔적이 발견된다. 갈대 태우기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환경 복원에 관심이 많았던 페트라 다크(Petra Dark) 교수가 과거 호수의 가장자리와 중심부에서 흙 시료를 떠 정밀하게 분석을 했고, 여기에서 화분과 숯 입자, 식물 조각이 연이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료에서는 빙하기 이전과 이후 즉 사람이 그 장소에 들어오기 전과 이후의 여러 생명 흔적이 나타났다. 우선 풀, 난장이버들, 소나무, 자작나무 등 전형적인 빙하시대 영국 지역의 식물상이 있었다. 그 다음 서기전 9600년 이후 이탄층(泥炭層;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 시료에서는 숯 입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갈대 조각과 많은 화수(花穗)가 발견되었다. 근처 호숫가에서 주기적으로 오래 식물을 태웠던 것이다.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 호수를 몇 세대 동안 방문했다가 떠났는데, 서기전 8750년 즈음 다시 돌아와 한 세기 동안 다시 불을 태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 무렵 버드나무와 사시나무가 호수를 잠식했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서기전 8500년이 되면 개암나무가 자리를 잡는데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불을 태우고는 호수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차차 호수도 사라져갔다(스티븐 마이든,『빙하 이후』, 179~181쪽 참고).
화전을 한다는 것은 그 땅의 토양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류학자 앨리스 로버츠는 아프리카 칼리하리 분지에 사는 부시먼을 방문하여 그들의 클릭(Click) 언어를 연구한 적이 있다. 클릭어란 혓바닥을 앞니 뒤쪽에 댔다가 빠르게 떼면서 나는 소리로 ‘쯧쯧’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유전학자들은 클릭 언어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대륙으로 퍼져 나가기 이전의 수만 년 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앨리스는 현지 관찰을 하던 중에 부시먼들이 자주, 일부러 산불을 놓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부시먼들은 그렇게 하면 새순이 잘 돋고 그곳에 동물도 더 많이 모여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전통 풍습은 동식물 보호를 위해(?) 지금은 당국이 법적으로 금지했다고 한다. 수렵채집 사회라고는 하지만 주변 경관을 일정 부분 생활의 풍요를 위해 조정하고 바꾸는 것이다(앨리스 로버츠,『인류의 위대한 여행』, 59쪽 참고). 인류가 150만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는 70만 년 전부터 불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하면 수렵채집 활동에 있어서도 관계적이고 적극적인 자연에 대한 개입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채집은 숲 전체의 느낌 문제
채집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줍고 필요에 따라 불을 지르면 원하는 만큼 뭔가 얻을 수 있는 단순한 활동일 수는 없다. 구근류와 같이 흙인지 돌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땅속 먹거리를 발견하고, 색감이라든가 질감에 있어서 짙은 녹색빛의 숲바닥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버섯류를 찾으려면 엄청난 수준의 숲 이해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등산을 할 때마다 결핍된 숲 주의력 때문에 산길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나는 전혀 발견하지를 못하는데, 산길 앞에서나 뒤에서 ‘앗, 버섯이다! 앗, 도롱뇽이다!’를 외치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부럽던지! 이런 발견의 능력만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화전의 능력도 결코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정말 불을 길들일 수가 있겠는가? 전소(全燒)시키지 않고 적절하게 피워 끄려면 얼마나 많이 위험을 무릅쓰고, 천천히 섬세하게 불을 마주해야겠는가? ③ 채집에는 엄청난 주의력이 필요하다.
이 주의력이란 완전히 감각적이며 특히 발견의 기본 감각으로 간주되는 시각을 초월한다. 탈중심화하면서도 창발적인 다양성을 모색하는 인류학적 글쓰기를 실험하는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버섯을 통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엄청난 수준의 관계망을 분석한 적이 있다. 『세계 끝의 버섯』이라는 책의 앞부분에서는 오리건 주(미국)의 숲에서 번번이 버섯을 찾지 못해 낭패스러워하는 애나 칭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언제나 스윽스윽 버섯을 찾아내는 라오스 출신의 미엔인들이 있었다. 애나 칭에게는 버섯 향에 대한 숙련된 감수성이 없었다. 이런 애니 칭은 책의 끝에 능숙하게 버섯을 찾는 사람들처럼 버섯을 발견한다. 애나 칭이 소개하는 버섯 찾기의 과정을 한번 따라가보자.
좋은 버섯을 찾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감각이 필요하다. 송이버섯 따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버섯을 거의 찾지 않는 것이다. 이따금씩 온전한 버섯 하나를 발견한다. 아마도 동물이 버렸거나 너무 늙어서 벌레가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버섯은 땅 밑에 있다. 때로 나는 버섯을 발견하기 전에 자극적인 향을 맡는다. 그러면 나의 다른 감각이 곤두선다. 나의 눈은 어떤 채집인이 설명하듯이 ‘자동차 앞 유리의 와이퍼’처럼 땅을 훑는다. 때때로 나는 더 좋은 각도로 쳐다보기 위해, 또는 느끼기 위해 땅에 엎드린다.
나는 버섯이 성장한 흔적, 버섯의 활동선activity line을 찾는다. 버섯은 자라면서 땅을 조금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혹이라고 부르는데, 윤곽이 분명한 둔덕을 말하고 매우 드물게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가슴으로 숨을 들이마실 때와 같은 들썩거림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들썩거림을 버섯의 호흡으로 상상하면 쉽다. 마치 버섯의 숨이 도망간 듯이 그곳에는 갈라진 틈새가 있을지 모른다. 버섯이 그렇게 숨을 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공통의 삶의 형태를 춤의 기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세계 끝의 버섯』, 430~431쪽)
버섯을 찾기 위해서는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절대로 시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네모난 건물, 네모난 도로, 네모난 TV, 네모난 전화기 등 무엇이든 직각과 직각을 만나게 하는 식으로 구획되어 있는 도시 생활에 익숙해지면 일단 눈이 나빠진다. 시력이 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늘 직각의 자로 따지고 판단하는 식으로 가져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이는 것 안에는 색도 있고 질감도 있다. 이런 반듯한 시간 체험에 압도되어 지내게 되면 전방위적이고 다채로운 수준의 공감력은 둘째 치고 뭐든 재고 따지는 방식으로만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인가를 공부한다고 하면 특정한 관념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이 떠오른다. 그렇게 갖게 되는 개념들은 현실에서 적절한 행동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했던 지식과 삶의 관계다. 하지만, 공감각적 채집 생활에서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버섯’이라는 개념을 ‘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안다고 해서 잡을 수 있지가 않다.
채집인은 수많은 냄새 속에 농축되어 있는 생물들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거대한 감각 지도를 스스로 구상해내야 한다. 위에서 애나 칭이 말하듯이, 그는 땅속에 숨어 있는 버섯의 숨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숲바닥 전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시간은 아마 다른 방식으로 흐르리라. 자, 여기는 숲이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나뭇가지가 떨어져서인가, 다람쥐가 지나가서인가? 멀리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하얀 김은 사슴이 싼 오줌의 것인가 꺼져가는 불씨의 것인가? 내가 맡은 똥 냄새는 지나간 자의 것인가 다가올 자의 것인가?
채집은 숲 전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온 감각을 열어 놓는 가운데 나의 주의를 끄는 무엇을 향해 손을 내뻗는 일이다. 사냥의 석기 모델로 공동체를 떠올리게 되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장인의 어깨 너머에서 발 뒤꿈치를 들고 서 있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채집 모델로 그 공동체를 다시 상상하게 되면 엄마나 아버지 꽁무니를 쫓아다니더라도 자기 자신의 느낌에 집중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안다는 것은 개념을 얻는 일이 아니라 숲의 이야기에 내 느낌을 맡기는 일이다.
4. 사냥만 할 수는 없거든
선사 공부에서 노동의 젠더 문제를 다룰 때 보통은 사냥은 남자가 하고, 채집은 여자가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후각적 감수성을 기르는 일에 왜 생물학적인 성차가 요구되는지가 이상하다. 어쩌면 그런 교과서적 지식은 산업화된 사회의 남자-임금 노동자 여자-그림자 노동자로 구분하는 편견이 영향을 미쳐서가 아닐까? (구석기 수렵채집 사회에 대한 일반 정리 : “사냥의 성공률이 떨어지는 만큼 수렵채집민은 식량의 상당 부분, 경우에 따라서는 대부분을 채집에 의존했다. 아마도 지금 한반도에서 후기 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수렵채집민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민족지 사례를 보면 채집은 주로 여성과 아이들이 담당한다. 계절에 따라 도토리와 밤, 그리고 각종 산딸기류 같은 열매를 따거나 줍고, 땅을 파서 마와 칡, 더덕 등 구근류 식물을 얻었다. 이런 식물자원 말고도 물새와 꿩 같은 새의 알을 채집한다. 이런 활동 도중에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할 수도, 심지어 개구리나 메뚜기 같은 것을 잡기도 한다. 수렵채집민이 자연에서 얻는 식량은 계절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이동하는 수렵채집민은 한 시간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곳에서 채집을 하며,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이 소진되기 전에 다른 본거지를 찾아 이동한다. 민족지 기록에 따르면 이동할 때와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여성의 몫이라고 한다. 채집을 담당하기에 주변 식량 자원의 획득 가능성에 더 민감하고 자원의 분포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가진 여성이 주도했을 것이다.”(김범철, 성춘택, 천선행, 『고고학자가 예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97쪽) 어쩌면 사냥이라든가 채집을 너무 대상 집중적 활동으로 생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이 꼭 어떤 결과를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앨리스 로버츠가 부시먼 족과 함께 나선 사냥의 추억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날 부시먼 사냥꾼들은 오릭스를 쫓았다. 이들은 오릭스의 발자국이 찍힌 쪽을 빠른 속도로 따라 걷다가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한 피로를 느꼈던 것인지, 멋진 나무를 발견했던 것인지 그들은 문득 쉬면서 나무 열매를 따먹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릭스가 얼마나 멀리 갔을지 초조해하지도 않으면서, 쉴 만큼 쉰 뒤에 다시 긴장을 모아 추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또 갑자기 멈추더니 그레비아 플라바라고 불리는 덤불 앞에서 도끼질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네 개의 커다른 나뭇가지를 잘라냈는데, 이 나무는 그들이 활과 창을 만들 때 쓰는 유용한 재료였다.
이들은 다시 오릭스를 쫓았다. 30분을 달리다가 다시 멈췄다. 옆에서 관찰한 앨리스에 따르면, 그들은 덤불 사이에서 커다란 아몬드 같이 생긴 견과류 한 웅큼을 발견했다. 이 덩어리 전체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담았다고 한다. 이것은 만케티 콩이라 불리는 것인데, 나중에 먹어 본 앨리스의 말에 따르면 브라질 견과처럼 맛있다고 한다. 만케티 콩은 덩어리로 뭉쳐져 있었다. 지나가던 코끼리가 먹고 싼 똥에 소화되지 않은 채로 배출된 것이다.
부시먼의 사냥꾼들은 동물을 쫓는 도중에 잠깐씩 계속 멈추었다. 필요한 나뭇가지를 구하고 발견된 열매를 주웠다. 오릭스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일족 전부가 시뻘개진 눈으로 추적을 계속하는 장면이 아닌 것이다. 느긋하지는 않았지만 사냥꾼들에게는 오릭스도 보고 나뭇가지도 발견하고 만케티 콩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포괄적인 집중력이 있었다. 사냥꾼이니 짐승만 잡아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목적지향적 사고는 이 장면에서 조금 깨어진다. 반대로 상상해보면, 채집을 하다가 쉬고 있는 오릭스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여성들이라도 무서운 돌팔매질로 녀석을 잡을 수도 있다.
주로 사냥을 남성이 하고 채집을 여성이 했을 수도 있지만,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로 노동 세계 일반을 과도히 이분화시킬 필요는 없다. 이반 일리치도 설명하듯이 노동의 젠더 분류는 생물학적이기보다는 하나의 공동체가 상보적 협력의 관계 질서를 만들기 위해 개념적으로 나눈 편의적 노동 분류일 뿐이다.
5. 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환?
‘채집’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전곡 선사 박물관〉을 관람하다보니 사냥과 채집 사이의 구분이라든가 동물과 식물의 구분, 야생과 경작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채집과 경작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화전이라고 하면 반경작(半-耕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혹 채집과 경작이 구분된다면 어떤 기준에서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경작은 논밭을 구획해서 가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구획이란 후각에 깊이 의존하는 채집인들에게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사고법이다. 채집과 경작이 구분 가능하다고 할 때, 채집인이 경작인이 되려면 자기 감각 체계와 자연에 대한 인식 사회적 삶에 대한 가치 판단 전체를 다 바꾸어야 한다. 과연 어떤 계기가 선사인들로 하여금 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환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앗! 그리고 빠트린 도토리의 문제가 있다. 도토리는 탄수화물이 풍부하기는 하지만 생으로 먹을 수가 없다. 쓴맛을 내는 타닌이라는 성분이 있어서 2차 손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에 푹 담가서 그 독기를 빼야 하는데, 냇가에 둑을 만들어 맛을 순화시킬 수 있다고는 해도 갈아서 죽이나 빵으로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갈돌과 갈판이라는 도구와 불판이 필요하다. 한반도에서도 구석기 도토리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강원도 양양 지경리 신석기 집자리터에서 탄화된 도토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도토리가 먹거리로 각광을 받는 것은 신석기 시대가 되어야 한다. 도토리처럼 가을철에 사랑받는 열매로 밤이 있다. 밤은 구워서 터뜨려 먹으면 되니까 구석기 시대에는 도토리보다는 밤이 더 주목받았을 것이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 참고문헌 ※
김범철, 성춘택, 천선행, 『고고학자가 예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진인진
스티븐 마이든, 성춘택 옮김,『빙하 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애나 로웬하웁트 칭, 노고운 옮김,『세계 끝의 버섯』, 현실문화
앨리스 로버츠, 진주현 옮김,『인류의 위대한 여행』, 책과함께
※ 수렵채집 관련 참고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mTJNW_WN5_Y&t=1344s
https://www.youtube.com/watch?v=eHPH96T79f8
https://helencann.co.uk/hand-drawn-mapping-workshop-online
'나의 석기 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석기 시대] 외모 지상주의의 기원 (0) | 2024.12.26 |
---|---|
[나의 석기 시대] 바다는 사람과 공동체를 기르네 (1) | 2024.12.19 |
[나의 석기 시대] 선사의 먹거리 (2) | 2024.12.05 |
[나의 석기 시대] 고기로 태어나서 (0) | 2024.11.28 |
[나의 석기 시대] 손, 연결의 도구 (2) | 2024.11.14 |
[나의 석기 시대] 연필과 석기 (0) | 2024.1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