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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 저자 후기] 읽기의 애니미즘

by 북드라망 2024. 11. 21.

읽기의 애니미즘

오선민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북드라망, 2024)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읽기의 활력’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끔 이끈 책이기도 합니다. ‘읽기의 애니미즘’을 본격적으로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의 인연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저는 2023년 가을부터 24년 초봄까지 북드라망 홈페이지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에 대한 해석을 차례로 연재를 했습니다. 그 전에는 인류학 답사 밴드 ‘인문세(인문공간세종)’에서 23년 초봄부터 초여름까지 10차례, 그리고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개봉에 맞춘 영화 토크 1회에 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를 감상하는 연속-집중 세미나를 했습니다.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끼리의 온-오프라인 방대한 토론을 통해 그 맥을 갖추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시간, 저는 작품 감상의 포인트에 대해 이것저것 발표를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친구들의 깊이 있는 반론과 풍요로운 덧붙임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이 단계에서도 막연히 ‘토론의 활력’을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작품에 대한 애정만큼 읽힐 것이 튀어나오는 집단 지성의 힘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활력이 아니라 주눅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발표 시간에 쫓기면서, 아무리 보아도 찾을 길 없는 토론거리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세미나에만 들어가면 왜 그렇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는지 참 신기했습니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준비하면서 울고 토론하면서 웃다가, 어느 날 애니메이션을 읽는 것의 어려움과 즐거움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영화와 책읽기는 ‘읽는다’는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감상하는 법, 나누는 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제가 평소에는 책 읽기, 그것도 특정한 작가의 소설이나 여행기 읽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 읽기는 더 어려웠습니다. 영화와 책의 가장 큰 차이는 ① 목차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책 중에도 챕터가 아예 구성이 되지 않는 것도 있고, 있더라 해도 다만 번호로 그 진행만 표시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영화에도 박찬욱 감독님의 《헤어질 결심》처럼 소제목이 들어가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어쨌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의 작품에는 소제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펼칠 때 목차부터 보면서, 작가가 선호하는 단어나 문구를 염두에 두던 습관을 갖고서는 감상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초반에 저는 끊임없이 감독의 의도만을 추적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미야자키 감독님이 끊어 읽어야 할 덩어리를 지정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중심을 잡고 어디까지를 분석의 단위로 삼아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어려웠던 작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습니다. 작품에서 아가씨 소피가 할머니 소피로 변신한다는 것까지는 따라갈 수 있었지만, 소피에게 저주를 건 황야의 마녀같은 존재는 전체 서사에서 왜 끼어들었는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황야의 마녀가 아니어도 일단 소피가 할머니가 되는 저주에 걸리기만 하면 이 ‘아름다움은 나이가 아니라, 자기 삶을 소중히 하는 자세의 문제다’라는 주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 욕심 채우기에 바쁜 대왕 마녀 설리만 같은 악마도 있기 때문에 한 작품에 두 명의 악당-마녀를 출현시키는 역할 중복은 불필요합니다. 

 


제가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던 장면은, 할머니-소피와 과속으로 늙어가는 황야의 마녀가 왕궁의 높은 계단을 서로 먼저 올라가기 위해 겨루는 씬이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정말 정성 들여, 주름 사이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감당할 수 없는 노화에 질려 눈이 팽팽 돌아가는 황야 마녀의 모습을 길게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소피와 마법사 하울이지 황야의 마녀가 아닙니다. 이렇게 노인의 계단 오르기를 많이 그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영화를 보다가, 정말 소제목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부글부글 애를 태웠지요. 

② 두 번째 차이는 영화에서는 읽을 것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는 캐릭터의 말과 동작뿐 아니라 그 장면 구성(그러니까 회화입니다)과 배경 음악까지 모두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실로 말(문자) 너머에 광대한 세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사전적 정의에 집착했던 제 읽기를 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요소도 많지만 어디까지가 작품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차가 없는 까닭에 오프닝의 어디부터 엔딩의 어디까지를 해석해야 하는지도 모두 미지수로 남습니다. 《라퓨타》나《붉은 돼지》의 경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오프닝 씬에서 아주 다양한 메시지를 주기도 하기 때문에 작품 해석의 한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모든 작품을 볼 때 숙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이 절대로 2시간의 해석 안에 다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엄청난 의미들이 우글거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작품이 엄청나게 복잡하게 다가왔던 것은 실로 영화를 만드는 손이 여럿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책은 인류의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쓰이고, 문자 자체도 작가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사람의 인간이 씁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처럼 멋지게 씨줄과 날줄로 엮듯 둘이서 만들었던 『천의 고원』같은 책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한 단어 한 문장은 한 사람의 손에 의해 풀려 나갑니다. 


그런데 영화는 어디서 끊든 하나의 장면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손들이 들어갑니다. 이러한 특징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디지털이 아니라 손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 아날로그 작업을 고집했기 때문에 배가 됩니다. 그의 애니메이션에는 인물 스케치를 하는 사람, 배경 스케치를 하는 사람, 비행기나 기차 등 탈것이나 집을 스케치하는 사람, 이들 스케치의 선을 보정하는 사람, 색을 정하고 입히는 사람, 사운드를 만드는 사람, 캐릭터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 주제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등. 모든 이들이 모든 장면이 함께 만듭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주제와 테마를 비롯 작품 구석구석에 대한 전체 아이디어를 내고 음향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그 구현에 있어서는 감독의 두 손만으로 절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편집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배급과 홍보를 위한 팀, 굿즈 제작을 위한 팀이 본격적으로 달려들게 되지요. 이렇게 많은 손들의 힘이 들어가다 보니 작품 구석구석이 저마다의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놀라운 작품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합니다. 미야자키 스스로 그것을 고집했다기보다 그의 지휘 아래에 있던 스테프들 각자의 무의식에서 그만 과거의 작품들이 튀어나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토토로가 씨앗을 키우는 주문의 자세라든가, 이세계(異世界)를 연결하는 기차역이라든가, 물과 불의 정령적 움직임이라든가 하는 모티프들이 갑자기 그러면서도 선명하게 나타나곤 하기 때문에 관객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따라가다가 문득 옛날에 재미있게 본 그 작품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③ 세 번째로, 책과 달리 영화가 떠안기는 무시무시한 힘은 속도에 있었습니다. 어쨌든 책은 제가 그 속도를 정해서 읽어갈 수 있습니다. 졸음이 오면 쉴 수도 있고, 흥미로우면 더 오래 머물 수도 있고, 지루하면 마구 넘겨버려도 괜찮습니다. 작가가 ‘처음부터 꼬옥 읽어주세요~’라고 아무리 간청해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영화는 다릅니다. 요즘은 OTT 서비스가 워낙 활성화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란 극장에 온 관객을 대상으로 합니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는 극장 체험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브리 영화가 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정말 자주 ‘앗! 중요한 것 같애!’하고 멈추면서 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 독해는 작품의 본질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반-미야자키적이다 할 수 있지요. 


작품이 제공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전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서 계속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 주는 압박감은 대단했습니다. 이 수동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경험했던 것은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면서였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기본적으로는 만화영화를 만듭니다. 미취학 아동도 볼 수 있는 만화 영화를 만들지요. 그래서 표면적인 주제가 심오하기는 해도 아주 선명하기 때문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에서처럼 문명 비판이라든가 자연과의 공생 같은 주제를 찾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덕분에 그 이상의 메시지를 읽어내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무수한 손들이 작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소박한 ‘착하게 살자’류의 생명 같은 것으로 작품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기본 줄거리가 가장 단순했던 《마녀 배달부 키키》야말로 저에게는 문제작이었습니다. 정말 ‘자기 재능을 귀하게 여겨라’밖에 나눌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난감했지요. 혼자라면 이렇게 단순히 감상을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친구들과 2시간 정도의 세미나를 약속했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 동안의 토론거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마녀가 하늘을 ‘날 수 있었다’가 ‘없었다’가 ‘다시 날게 되는’ 이야기 안에 어떤 다른 의미가 들어있는가? 어쨌든 저는 제게 주어진 2시간과 한없이 단순하게만 보이는 키키의 비행이라는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주어진 조건 앞에서, 작품 안에 참으로 들을 만한 이야기가 더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작품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저는 이때 《마녀 배달부 키키》라는 작품을 완전히 의지했습니다. 

 

키키가 고향 마을을 떠나 항구 도시에 하숙집을 구할 때까지, 정말 아무런 이야깃거리도 발견할 수 없어서 다시 또 고향 마을로, 또 고향 마을로 저는 되돌아갔지요. 키키는 엄마 품을 떠났는데, 저는 키키 엄마의 정원문을 계속 두드리는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키키가 고향마을을 막 벗어나서 내리는 밤 비를 피하기 위해 기차의 짐칸에 몸을 뉘이는 장면, 한밤중에 출발한 기차를 타고 어느새 아침 항구를 바로 앞두게 되는 장면에서 갑자기 키키를 따라 저 자신이 도시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마법처럼 도시의 시계탑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시란 시계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시계 없이 바람을 타던 마녀가 시계에 맞춰 날아야 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했던 키키가 정말 딱하게 느껴졌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가장 읽기 어려웠던 작품입니다. 모든 영화가, 실은 책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정말 작품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믿음으로 여러 번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만 겨우 몇 마디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요. 알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하지 않고 작품이 저에게 걸어오는 말을 믿는 일. 저는 이것을 읽기의 애니미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읽는다’는 것을 해석한다, 이해한다의 동의어로 쓴다면 사실 읽기의 애니미즘은 듣기의 애니미즘이 되지요. 만화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모든 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눈도 귀도 마음도 활짝 열고 하루를 보낼 수만 있다면! 만물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눈 뜨고 귀 열게 해준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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