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통해 삶의 길을 명상하다!
글_지 산 씨 (사이재)
이해되지 못한 꿈은 다만 사건에 불과하지만 이해함으로써 그 꿈은 체험이 된다.
(카를 융,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04쪽)
인간은 의식의 힘으로, 이성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무의식’ 또한 인간을 자극하고 조정한다. 융은 ‘우리 삶의 거의 절반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영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융에게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표지는 꿈이었다. 꿈은 원한다고 꿀 수도 없고, 생각한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 무의지의 산물이 아니던가. 꿈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리현상이지만, 의식에서는 일어날 수도 알 수도 없는, 무의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정신활동인 것이다. 꿈은 ‘무의식의 특수한 의식적 표명’이다.(카를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솔, 2001, 132쪽) 그래서 융은 마음의 병을 해석하고 치유할 중요한 단서가 꿈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융이 정신분석가가 되기 전에도 꿈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어린시절부터 융에게 꿈은 삶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하고 세상 너머를 보게 하는 창구였다. 융에게 ‘꿈은 삶’이었다. 그렇기에 융은 ‘꿈을 하찮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꿈이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무의미한 것이며, 우리가 그 수수께끼 같은 밤에 오는 통신을 제대로 해득할 만한 재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신생활의 반은 밤 쪽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밤에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현상은 낮의 생활보다 더 많은 것, 더 위험한 것, 또는 더 도움을 주는 것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37쪽) 삶이었던, 융의 꿈 그리고 꿈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어린 융의 꿈, 신을 감히 알고자 하다!
카를 구스타프 융이 태어난 1875년, 이 해에 융의 부모님은 스위스의 시골마을 라우펜성의 목사관으로 이사했다. 서너 살 무렵 융은 최초의 꿈을 꾼다. 아마도 꿈에 관한 최초의 기억이리라. 서너 살 때의 꿈은 인류의 정신사 속에서 마주치는 상징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꿈에서 융은 목사관 근처의 넓은 초원 아래에 깊은 땅 속에 만들어진 방으로 들어간다. 10미터가량 되는 장방형 방이다. 방 중앙에는 붉은 양탄자가 입구에서 낮은 단까지 깔려 있었다. 단 위에는 화려한 황금보좌가 놓여 있고, 보좌 위에는 붉은 방석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형상이 서 있었다. 나무 기둥처럼 생겼는데 살아있는 살로 만들어졌으며. 꼭대기에는 얼굴도 머리칼도 없는 둥근 공 모양의 머리 비슷한 것이 붙어 있었다. 정수리에는 눈이 하나 있는데 위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형상이 기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좀 보라구. 저것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야!”(카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2-33쪽)
이 형상은 남근상이면서 주 예수요, 지하의 신이요, 사람을 잡아먹는 신이었다. 아버지가 목사고, 삼촌 두 명도 목사에, 외가 쪽으로도 여섯 명의 목사가 있던 융에게 신이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다니, 참으로 기이한 사태였다. 아버지가 설교할 때 묘사했던 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교회 안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이었다. 융은 이교적이고, 야만적이며,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 신을 감히 발설할 수 없었다. 예순다섯 살이 되어서야 처음 이 꿈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융은 성장하는 내내 이 꿈에 사로잡혔다. 아버지 서재에 있는 종교학 서적 속에서 신을 찾았으나 꿈에서 본 신은 아니었다. 융은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의 목사들이 찬양하는 신은 신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융에게 신은 ‘빛이면서 어둠’ 곧 ‘위대한 위험’으로, 자비로우면서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아버지는 성서의 계명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성서에 씌어 있고 조상들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서 직접 임하시는 하느님, 성서와 교회를 넘어서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느님, 당신의 자유를 인간이 누리도록 촉구하고, 당신의 요청을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와 신념을 버리도록 강요할 수도 있는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카를 융, 기억 꿈 사상』, 81쪽)
융은, 아버지와 개신교의 목사들이 신을 믿었지만 신을 체험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융은 신의 정체를 알고자 했다. 이런 생각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만한 죄였다. 융은 맹세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생각, 원하지도 않는 생각들에 강요당하는 것 같았다. 이 무섭고 사악한 의지가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을 이러한 곤경으로 밀어넣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의도라고 인식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의도라면 스스로 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꿈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상식에 저항하도록 융을 이끌었다. 아니 융이 꿈을 다르게 받아들인 것인지 모르겠다. 관념을 뒤집고 세상을 바꾸는 신호로 꿈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 강렬한 꿈과 함께 융은 어릴 때부터 자신 안에는 익숙한 자아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이 다른 인격은 어떤 환상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18세기적 인물의 환생이라고 여기거나, 돌 위에 앉아 있을 때는 돌이 자신이고 돌 위에 앉은 자신을 또 다른 자아라고 여기는 식이었다. 돌은 생물이면서 무생물, 삶이자 죽음, 시간성이자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상징한다. 어린 융이 존재의 대극성을 알 리 없었지만 돌에서 일체감을 느낀 건 아마도 대극의 조화를 향한 충동이었으리라. 훗날 융은 의식의 존재로서의 자신을 제1의 인격이라 불렀고, 자신 안의 다른 무엇 즉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제2의 인격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융은 어머니에게도 제1의 인격만이 아니라 제2의 인격이 있음을 보았다. 어머니는 평소 악의 없고 인간적이었지만 어떤 순간 권위적이고 똑 부러지고 으스스한 인격이 튀어나왔다. 어머니에게도, 신에게도, 자신에게도 이중의 모습이 있다는 것. 이런 환상은 개신교 신자로서 억누른다고 눌러지는 게 아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찾아왔다.
융은 미쳤던 것일까? 혹은 미쳐 가는 중이었을까? 융도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겁을 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융은 그 꿈에, 그 환상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로부터 밀려오는 그 이상한 인격, 불가사의한 그 두려운 신격의 정체를 이해하고자 했다. 위험한 방향이었지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않을 수 없었기에 신학을 탐구하고 철학을 공부했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스콜라철학, 성 토마스, 괴테,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등을 섭렵했다. 이로 인해 융은 세계의 고통, 혼란, 고난, 악의 문제를 이해했다. 세상이 좋은 것만으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사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한다는 사실에 눈떠가는 중이었다.
청년 융의 ‘꿈-풀이’ 사용법
대학에 지원할 때 융은 자연과학을 전공할지, 종교학을 전공할지 망설였다. 자연과학의 구체적 사실 탐구에도 끌렸고, 종교학의 영성과 의미 탐구에도 끌렸다. 한쪽을 선택하면 한쪽은 포기해야 한다. 융에게 대학은 향후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문턱이었기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을 망설일 때 두 차례 꿈을 꾼다. 강렬하고 의미심장한 꿈!
첫 번째 꿈에서 융은 라인강변을 따라 펼쳐진 울창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작은 언덕처럼 생긴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선사시대 동물의 뼈와 맞닥뜨린다. 그 순간 융은 자연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주변의 사물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꿈에서 융은 빽빽한 덤불숲으로 둘러싸인 둥근 연못을 보게 된다. 그 연못에 기묘하고 경이로운 생물이 반쯤 물에 잠긴 채 누워있었다. 직경이 약 1미터나 되는 거대한 방사선충이었다. 이 장엄한 생물이 맑고 깊은 물 속 은밀한 장소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누워있다니! 경이를 느꼈고, 이 생물에 대해 강렬한 지식욕이 불타올랐다.(『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64-165쪽)
이 두 개의 꿈으로 융은 자연과학 쪽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의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이 계시처럼 떠오른다. 융의 꿈, 말하자면 무의식이 정신의학을 통해 자연과 정신의 연합을 연구하도록, 고태(古態)의 생리와 심리를 연구하도록 의과대학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지. 융의 책을 읽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선사시대의 동물 뼈와 방사선충은 집단무의식, 원형과 같은 개념을 상징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집이 가난했던 융은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면서 또 한 차례 ‘용기를 북돋워 주는’ 꿈을 꾼다. 한밤에 작은 등불에 의지해 거센 폭풍을 뚫고 낯선 거리를 지나가는데, 그 뒤를 거대한 검은 형체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순간 융은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작은 등불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 꿈에서 빛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공부, 돈벌기, 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지기로 결심한다. 이 꿈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밭을 경작해야만 하는 그곳에 빛이 있음을 알려주는 계시였다. 검은 형체 즉 ‘투철한 생명력(제2의 인격)’은 뒤돌아보지 않기로 하고 융은 가장의 역할과 의학 공부에 매진했다.(『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69-170쪽)
융은 이런 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물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융은 꿈들을 하느님이 직접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지적 존재, 인간보다 지능이 높은 무언가가 배후에서 비밀리에 작용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청년 융에게 꿈은 일종의 계시이자 신탁이요, 예언이자 예지력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예지력은 꿈이 직접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꿈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헤아리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가운데 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청년 융의 꿈-풀이는 명상 행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훗날 융은 꿈-해석을 일종의 꿈-명상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나도 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꿈-풀이를 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부끄럽지만 길한 꿈인지, 흉한 꿈인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다. 한때 해몽책을 열심히 뒤적였고, 지금은 인터넷에서 해몽 정보를 클릭한다. 길한 꿈이라면 기대를 하고, 흉한 꿈이라면 조심한다. 좋을 것이냐 나쁠 것이냐, 얻을 것인가 잃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나에게 꿈은 길흉의 조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과 맺는 관계 그리고 세상과 맺는 관계가 얼마나 계산적이고 협소한지를 보여준다. 나의 해몽에는 한치의 손해도 보지 않고 한치의 이득도 놓치지 않으려는 ‘인색함’과 ‘초조함’의 심리가 여실히 깔려있다.
참으로 못났다. 나의 꿈-풀이는 청년 융의 꿈-풀이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나도 꿈을 계시 혹은 신탁으로 여기나 그 사용법에 있어 융과는 격이 다르다. ‘나의 신’은 내 몸과 정신의 수준에 맞게 격이 낮아지고 말았다. 나는 꿈을 해석한 게 아니고 유용성의 관점으로 번역했을 뿐이다. 내가 꿈을 이렇게 번역하는 한, 나의 삶은 한치도 바뀌기 힘들 것이다. 융은 꿈으로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읽어냈다. 정신과 의사가 되기 전에도 이미 융의 꿈-풀이는 분석적이고 명상적이었다. 이때 이미 의식의 자아와 꿈의 인격이 대화를 하면서 방향을 찾아 나갔다. 아! 융은 그가 느낀 바 그대로, 몇 생을 환생한 특별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었을지.
정신과 의사의 길 그리고 『꿈의 해석』과의 조우
앞을 향해 달리던 융의 결심이 무색하게, 융은 또다시 제2의 인격를 돌아보게 된다. 의과대학을 졸업할 즈음 융은 의사로서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외과를 갈까도 생각했지만, 내과를 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러던 어느 날 융은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리처드 폰 크라프트 에빙(1840-1902)의 저서를 읽는다. 융은 ‘정신병은 인격의 병’이라고 일컫는 구절에 이르자 가슴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고 표현한다. 정신병을 신체의 병이나 두뇌의 병, 혹은 이성의 결여라고 단정하지 않고, ‘인격’ 혹은 ‘영혼’의 관점에서 정신병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저자의 주의력에 융은 감격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융에게 찾아든 ‘나 아닌 나’, ‘또 다른 인격’을 이해받는 순간, 그리고 그 정체가 학문적으로 탐구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 융의 진로는 분명해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신병의 ‘주관적 특색’을 지적한 부분에서 융은 완전히 흥분했다. 크라프트 에빙의 책은 “경험의 객관성 배후에서 저자 자신의 전인격으로 ‘인격의 병’에 관해 답하는 주관적인 고백서”였다.(『카를 융, 기억 꿈 사상』, 210쪽) 당시 정신의학계의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담론이었고, 정신과 임상교수들로부터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융은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
무슨 말인가? 융에게 정신의학의 주요과제는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진단과 증상에 관한 장황한 목록을 가지고 환자 X를 대했다. 한 인간이자 한 개체로서 정신병자를 대하지 않고, 병든 인격을 추상화하여 진단하고 기록하고 치료했다. 정신병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을 보지 않고, 일반적인 병명만 부여하는 식이었다. 환자의 환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찌하여 한 환자가 다른 환자와 다른 환상을 갖는지 묻지 않았다. 이를테면 모든 환자는 피해망상이라는 이름표에 불과했다. 환자는 주관적 존재가 아니라 병이라는 객관적 대상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하여, 환자 개인의 인격은 지워졌다. 이런 이유로 융은 정신의학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크라프트 에빙을 만나고 융의 환멸은 한 방에 날아갔다. 그리고 정신의학의 목표를 분명히 정리한다. 정신의학은 환자와 의사의 정신적 대화와 대결을 통해 정신병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인간적 의미를 알아가는 주관적 실험이다. 말하자면 정신의학은 주관적 인격의 환자와 주관적 인격의 의사가 만나 병의 고통과 의미를 이해하고 치유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해진 치료법은 없다. 환자와 의사의 협업에 의해 함께 만들어갈 뿐이다. 이제 융에게 정신의학 외에 다른 목표는 있을 수 없었다. 1900년 12월 10일 25살의 융은 바젤을 떠나 취리히대학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의 조수로 가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정신과로 진로를 결정한 직후 1900년에 융은 프로이트(1856-1939)의 『꿈의 해석』을 읽는다. 다른 인격, 꿈, 환상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과 언어를 찾고 있던 융이 『꿈의 해석』과 만난 건 어찌보면 필연이었다. 프로이트의 기념비적 저작인 『꿈의 해석』의 실제 출간은 1899년 11월이고, 책에 인쇄된 발행일은 1900년이다. 이 역사적인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6년간 351부가 팔렸고, 1쇄로 찍은 600부가 다 팔린 건 출간 9년째였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이해하는 사람은 몇 안 되었고, 당시의 정신과 의사들은 이 책에 대해 무시와 냉대로 일관했다. 매우 발 빠르고 희귀한 독자였던 융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꿈-이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3년 뒤 융은 『꿈의 해석』을 다시 읽는다. 이때에야 융은 꿈-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정신과 의사로서 경험을 쌓은 지 3년, 정신병에 대한 이해 또한 그만큼 깊고 넓어졌다. 게다가 병원에 취직한 직후 반년 동안 <정신의학 잡지> 50권을 차례로 통독한 터. 프로이트를 언급하기 꺼리던 시절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수용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문 ‘동종업계’의 동지였다.
신경증 환자들의 심리적 매카니즘을 분석할 때 꿈은 신경증 환자의 정신활동을 진단하는 매우 중요한 증상이었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가 인류사 최초로 꿈을 해석하고, 꿈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수행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꿈을 해석하고, 꿈에 의미를 부여하는 프로이트의 작업은 이 당시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는 꿈이 과학이 아닌데, 꿈을 분석한다고 과학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뚝심있게 밀고 나갔다. 꿈을 분석한다는 건 모험이었으나, 마침내 꿈의 제1원리가 세상에 선포되었다. ‘꿈은 단편적 두뇌활동이 아니라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다.’ ‘꿈은 억압된 무의식의 소원성취다.’ ‘무의식은 과거 기억의 저장소다.’ ‘꿈과 신경증 증상에서 원동력을 이루는 것은 대부분 유아기 성적 체험에서 유래하는 무의식적 소원이다.’
이렇게 억압된 무의식, 특히 유아기의 강렬한 자극의 기억 흔적이 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걸 프로이트는 과학적이고, 비평적인 분석 작업을 통해 증명했다. 꿈의 분석은 과거의 억압된 것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여 고착된 표상으로부터 환자를 해방시키는 작업이다. 환자는 자유롭게 떠오르는 대로 말했고 치료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분석하고 비평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신경증의 생리적 증상이 신체의 병 혹은 두뇌의 병이 아니라 심인성임을 알게 되었다. 마음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는 이 획기적 인식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프로이트로 인해 인간은 다르게 정의되어야 했다. 인간은 의식의 활동만으로 살지 않으며, 무의식 또한 중요한 정신활동으로 인간을 움직인다. 고로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의지 대로 살지 못한다. 욕망에 의해, 충동에 의해 살아지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고, 환상에 의해 왜곡된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하므로, 사방을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복잡다단한 인간의 성격을 ‘노후한 도덕론’의 심판으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인순 옮김, 『꿈의 해석』, 열린책들, 2020, 742쪽) 이제 인간에 대한 접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달라져야 한다. 세기말 인간 이해에 놀라운 도약이 일어났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면,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절망적이고 저주받은 병이라기보다 이해와 관찰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고통이요, 아픔이다. 프로이트는 인간 누구에게나 작동되는 무의식이 어떻게 현실을 잠식하는지, 어떻게 병으로 진행되는지 그 소인을 과학적으로 탐사한다면 환자도 해방되고, 인간도 해방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니 환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의 무의식은 분석되어야 하고 의미화될 필요가 있었다. 환자와 평범한 사람을 모두 아우르는 무의식 기제는 꿈밖에 없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꿈을 주요하게 분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치료자 또한 자신의 정신 매카니즘을 알아야 환자의 정신 매카니즘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자기 인식 위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이제 정신의학에서 꿈은 환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창구이자,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통로로 중요한 자리를 부여받는다. 이렇게 꿈은 심리치료의 기제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융 또한 꿈을 분석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정상적인 것이 어떻게 병적인 변형을 겪게 되는지, 그 핵심적인 단서가 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의사가 된 융에게 꿈은 더 이상 계시가 아니었다. 심리현상이요, 무의식이 활동하는 광활하고 심층적인 장이었다. 꿈-분석에 대한 융의 호기심과 탐구욕은 더욱 불타 올랐다.
그리고 융은 인간의 본질을 물었던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인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의문을 품고 답을 풀어 나갔다. 신경증과 정신병을 관찰, 진단하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신의학은 정신병 환자의 심리로부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로 나아갔다. 융이 의사가 된 이유가 자신을 이해하고 불가사의한 다른 인격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프로이트를 만난 뒤 융의 인간 이해는 날개를 달게 된다. 융은 본격적인 꿈-분석을 통해 환자를 치유하고 자신을 치유하고 인간을 치유하는 길로 나서게 된다.
*융의 삶과 사상, 프로이트의 꿈-이론을 정리하는데 다음의 책을 참고하고, 인용했다. 특별히 강조하는 구절이 아니면 페이지를 별첨하지 않았다.(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인순 옮김, 『꿈의 해석』, 열린책들, 2020. / 카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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