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통해 삶의 길을 명상하다!(2)
글_지산씨(사이재)
나는 나의 꿈 해석이 옳다는 것-꽤 가망이 없는 모험-을 증명할 필요가 없고
다만 환자와 함께 ‘작용을 일으키는 것’-‘실재적인 것’이라는 말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을 찾아야 한다.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48-49쪽)
1. 왜 꿈을 해석하는가?
꿈이, 꿈의 강렬함이, 그리고 현실 또는 의지에 반하는 꿈의 현상이, 융의 삶을 이끌었다. 꿈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정^^하거나 현재 살고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이후 나아가야 하는 삶은 어떤 것인지를 통찰했다. 꿈에 관한 한, 아니 꿈에서의 융은 지혜로운 노인, 노성한 현자와 같았다. 살아 본 적 없는 삶을 살고, 상상한 적 없는 상태를 경험하고, 가야할 길을 내다봤으니 앞을 깨우쳐주는 노인이라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누가 알았으랴? 융이 의사, 그것도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하는 의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융이 자신의 꿈을 남다르게 감각했지만, 정신과 의사가 되어 환자들의 꿈을 해석하리란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으리라. 이 또한 운명이었을까? 취리히의 부르크횔츠리 정신병원에서 처음 의사생활을 하면서 융이 만난 환자들은 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융은 꿈이 환자의 개인사와 심리적 사연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통로임을 경험한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꿈은 해석될 수 있고, 꿈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융에게 있어 꿈-분석이 모든 환자에게 필요한 절대적 진단 과정이라고 본다면, 그건 우리의 오해다. 꿈-분석, 꿈-치료하면 프로이트와 함께 융을 떠올리는 것이 사실이고 융의 정신치료에 꿈의 비중이 크다고 해도, 융은 꿈-분석이 절대적인 치료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꿈-분석이 ‘방법’이라고 단정짓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융은 정신병을 앓는 환자를 진단할 때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융에게는 환자 개인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지 의도적인 체계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환자에겐 최면이 더 적합하고, 어떤 환자에겐 연상검사가 더 적합하고, 어떤 환자에겐 꿈을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했다. 융에게 단 하나의 방법은 없었다. “인생에는 보편적인 처방이란 없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43쪽)가 융의 철칙이었다.
융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3분의 2는 인생 후반기에 놓였거나, 대부분은 의식의 자원이 고갈된 경우였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막혀 멈추어 있다’, ‘나는 곤경에 처해 있다’고 하소연하는 환자들. 삶의 의미와 대상의 상실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 어떤 조언을 해달라고 조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환자들에게 융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융이 아는 건, ‘의식이 더 이상 나아갈 길을 보지 못하여 정체되어 있을 때, 무의식의 심혼이 견딜 수 없는 의식의 정체 상태에 반응할 것이라는 점’ 뿐이었다. 우리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이 활동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방향을 상실할 경우 잠재하고 있던 무의식이 반응을 보낸다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 또한 사람을 움직이기 위한 힘을 발동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여, “정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징적인 반응과 대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무의식의 반응은 꿈에서 일어난다.” 이 때문에 융의 관심이 꿈으로 향했던 것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45쪽)
우선 꿈을 보는 것은 치료는 어디까지나 꿈을 가지고 수행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하나의 신비로운 꿈 이론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며, 단순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것을 어디에서 끄집어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꿈속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적어도 꿈은 상상력을 제공해주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더 많은 어떤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나는 꿈에 대한 어떤 이론도 갖고 있지 않으며, 꿈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또한 내가 꿈을 다루는 방식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조차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꿈 해석이 불확실성과 임의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모든 선입견에 동의한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45쪽)
융은 꿈이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꿈이 ‘무의식적 형이상학’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고백한다. 꿈에 대해 아는 바는 너무 적지만, 다만 꿈의 해석이 환자에게 미치는 작용만을 알 뿐이고, 어떤 환자에겐 치료 효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체험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융에게 있어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꿈을 정의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다. 프로이트는 꿈-해석이 과학임을 증명하는 데 에너지를 모았다. 꿈에 대해 숙고한 결과가 환자에게 어떤 것을 말해주고, 그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해준다는 사실! 융은 이 체험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궁지에 몰리고 고통스러운 환자에게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가 꿈을 해석하는 작업이었다. 꿈-분석은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환자의 절박함과 의사의 절실함에 의해 도달한 하나의 길이자 하나의 처방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꿈-치료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맹신한다면, 융의 분석심리학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지는 것이다.
융은 환자를 대할 때 선입견을 버리고 견해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물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절대적 이론은 있을 수 없다. 의사에겐 환자에게 다가갈 하나의 가설만 있을 뿐이다. 융은 언제나 흠모해 마지않던 17세기 스위스의 의사이자 연금술사였던 파라셀수스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의사는 자기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질병을 이해시키고 질병관을 가르쳐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의사에게는 치유를, 환자에게는 건강회복을, 또는 최소한 앓음의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76쪽) 융에게 꿈을 해석하는 작업도 이와 같았다. 의사가 환자와 ‘앓음의 체험’을 함께 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2. 정신은 목적을 추구한다!
융은 처음 꿈을 해석할 때 프로이트의 이론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프로이트는 드러난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확신으로 꿈의 원인을 찾았다. 그래서 ‘무슨 까닭’으로 이 꿈을 꾸었는가를 추적하여 꿈을 의미화했다. 그 원인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억압된 성-리비도의 해소! 꿈은 쾌락원칙에 입각한 소원성취다. 충동, 욕구가 해소되면 ‘쾌’하고 해소되지 못하면 ‘불쾌’하다. 욕구가 해소되면, 곧 무의식의 억압된 충동이 드러나면 소원을 이룬 것이다. 꿈은 억압된 성-리비도를 풀어주는 정신활동인 것이다. 말하자면, 유아기 때의 성-리비도가 기억흔적으로 쌓여서 해소할 길을 모르다가 전의식의 검열이 느슨해지는 밤을 틈타 꿈으로 해소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꿈 이론이다.
그러나 융은 임상을 쌓아가면서 프로이트의 꿈 이론이 어떤 환자에게는 적합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프로이트의 개인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은 주로 히스테리와 같은 신경증으로 고통받는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이거나 아이들이었다. 이들의 신경증은 대체로 성-리비도의 억압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 획기적인 발견은 중요한 정신분석 이론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든 환자가 다 성-리비도의 억압으로 인해 병을 앓는 것은 아니다. 융이 근무하는 대학병원의 환자들은 프로이트 병원의 환자들과 성격이 달랐다. 조발성치매, 편집증, 강박증 등 정신분열을 겪고 있거나 인생 후반기이거나 살아갈 이유를 모르는 환자들이었다.
융은 해마다 1,500개에서 2,000개의 꿈 자료를 다루었다. 치료자로 활동하는 동안 통틀어 약 8만여 개에 달하는 꿈을 분석했다고 한다. 꿈-분석이 절대적 처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꿈을 대한 융의 탐구심은 이토록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치열했다. 이런 임상 과정에서 융은 프로이트의 인과적 해석이 너무 편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융이 반기를 든 이유는 프로이트 이론의 오류 때문이 아니다. 모든 증상의 원인을 유아기의 과거로 돌리는 환원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융이 보기에 무의식은 유아적이고, 도착적이고, 위험한 것만은 아니다. 무의식은 도덕적, 미적, 지적인 면에 무관심한 자연적 존재이다. 무의식이 위험한 것은 우리의 의식의 태도가 무의식에 대해 절망스러울 정도로 잘못되어 있을 때 뿐이다. 이에 대해 융은 유머러스하게 덧붙인다. “오만하거나 비겁한 의식이 무의식에 몰래 어떤 폭발물을 쌓아놓지 않는 한 무의식에는 아무런 폭발물이 없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40쪽) 그러니 무의식을 괴물처럼 보는 건 우리의 삶에도, 환자의 처방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으로부터 비껴서서 환자를 만났다. 융은 이렇게 정리한다. “무슨 까닭만을 묻고 무슨 목적으로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데, 이것은 환자에게 큰 손해를 끼친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61쪽) 정신 자체가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요소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생존을 향한 목표를 추구하는 정신활동이다. 그랬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가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그런 꿈을 꾸었는가로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융에게 꿈은 ‘생명 유지’와 ‘인격을 구축하기’ 위한 정보 및 조정 기관이며 가장 효과적인 보조 수단(『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40쪽)이었던 것이다.
꿈을 ‘목적적’이라고 하면 가장 완전한 상태, 혹은 가장 발전적인 상태로 향하기 위한 정신적 지향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꿈은 자기계발을 위한 무의식의 예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융이 말하는 목적이나 목표 추구는 이런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융은 그 다름 때문에 목적지향성이라는 말 대신 ‘목적의미’라는 말을 사용했다. 목적으로써의 보상은 어떤 편향성에 대한 균형 찾기이자 방향 전환이다. 융은 이것을 의식과 무의식의 보상관계로 설명한다.
자기 조정 체계로서의 심혼은 신체의 삶처럼 평형을 갖추고 있다. 모든 과도한 과정이 발생하면 즉각 또는 불수의적(不隨意的, 의도지 않게)으로 보상이 일어난다. 그것 없이는 정상적인 대사도, 정상적인 정신도 없다. 보상학설은 정신적 행태의 기본법칙이다. 이곳에서 너무 적은 것은 저곳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기게 한다. 이와 같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관계도 보상적인 것이다. 이것은 꿈 해석의 가장 잘 증명된 구체적 법칙의 하나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39쪽)
신체가 평형을 유지해야 건강하게 살듯, 정신도 평형을 유지해야 건강하게 산다. 어떤 의식의 태도가 지나치거나 모자랄 때 무의식은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보상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은 ‘환상적 욕구 충족’과는 다른 차원의 반응이다. 보충하는 것을 보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부족한 것은 채우고 지나친 것은 덜어내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정신의 활동이 양으로 계산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평형의 감각과 실재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니 보상의 감각과 실재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따라서 “보상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사항이나 관점의 비교와 대조이며 이를 통하여 조정 혹은 수정됨을 말한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214쪽) 다시 말해, 보상은 의식과 무의식의 팽팽한 대결이자 긴장감 넘치는 대화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방향 설정이며 변화를 말한다.
융은 꿈이 꿈꾼 사람의 내적 진실과 현실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런 점에서 꿈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의식도 사실이지만 무의식도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적 사실로서의 꿈의 목적을 이해해야만 환자는 치유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융을 찾아왔던 환자의 예를 들어보자.
지도층에 있는 한 남자가 융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는 불안, 초조, 때로는 구토와 어지럼증, 머리가 띵하고 숨이 막히는 증상으로 괴로웠다. 증상이 고산병과 혼동할 정도로 비슷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단한 근면성과 뛰어난 재능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더 높이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밝았다. 바로 그즈음 신경증이 끼어들었다. 신경증만 아니라면 그는 더 도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너무도 잘 알려진, 틀에 박힌 말을 내뱉었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왜 하필 지금...”
그는 상담하기 전날 두 개의 꿈을 꾸었고, 융에게 그 꿈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작은 마을에 있다. 그곳에서 함께 학교를 다닌 청년들을 지나치는데 그중 한 명이 그를 향해 말했다. “저 애도 우리 동네에 자주 오지 않아.” 두 번째 꿈에서 그는 여행을 떠나려 한다. 서류가방을 집에 놓고 와서 다시 가지러 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아무리 뛰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간신히 기차를 탔으나 기차는 아주 길고 곡선을 달리는데, 기관사가 증기압을 넣자 꿈속의 환자는 불안해하고 예상대로 기차는 궤도에서 내동댕이쳐진다.
이 환자의 꿈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미천한 출신임을 잊고 싶은 마음과 오랜 상승의 노고로 지쳐 있다. 그의 명예욕이 그를 공기도 희박하고 숨쉬기도 어려운 곳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신경증이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꿈이 그의 현실과 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으며 올라가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 것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23-125쪽)
환자는 융의 견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다른 이유로 상담을 중단했다. 융의 견해대로 그는 직업에서 완전히 이탈했고 재앙을 겪게 된다. 재앙이 어떤 것인지 융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어떤 의식적인 태도가 꿈에 의해 보상되는지, 그 목적 의미를 분석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의식도 무의식도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의 의식은 꿈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를 점검해야 할 때임을 꿈이 알려주었으나 이 환자의 의식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신경증에도 목적이 있고, 꿈에도 목적이 있다. 전체 인생을 돌아보고 다르게 살아야 하는 전환의 순간, 말하자면 꿈의 목적성을 알아차리는 것은 최종적으로 환자의 몫이다.
3. 꿈-분석, 명상의 과정
의사가 환자의 꿈을 요해(Verstehen, 분석을 통한 앎)했더라도 환자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환자는 치료되지 않으며, 이러한 꿈-해석은 무효다. 꿈에 대한 요해는 의식화로써, 지금까지 무의식적이던 인격 부분이 의식적인 선택과 비판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환자는 문제에 대면해서 의식적 판단과 의식적 결단을 하도록 자극받는다. 그렇다고 의사가 일방적으로 요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요해가 아니다. 요해는 의사와 환자가 함께 심사숙고한 것의 열매여야 한다. 왜냐하면 꿈은 환자의 꿈이고 치유 또한 환자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환자의 요해에 달린 것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30-131쪽)
그러므로 환자는 설교를 통해 진실을 배워서는 안 된다. 설교는 오직 환자의 머리에 호소할 뿐이다. 환자는 스스로 진실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 환자의 인격은 자립해야 한다. 그러니 환자가 무의식의 내용을 충분히 의식에 ’동화‘시키는 것 말고 의사가 바랄 수 있는 것이 달리 무엇이 더 있겠는가? “동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 침투를 말하며, 일방적으로 평가, 재해석, 변형하는 것이 아니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37쪽)
융은 환자들이 꿈을 통해 동의와 동화와 보상 작업을 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이 또한 환자들의 작업이다. 의사들은 진심을 다해 환자가 동의와 동화와 보상 작업을 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융과 같은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환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다. 탁월한 스승에게 배워도 깨달음은 제자의 몫이다. 구원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이루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 그리고 자신과 대결하고 대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 한 조각도 알기 어렵다.
꿈-치료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꿈-분석 모임도 많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 컨트롤 되지 않는 마음을 잡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융에 의하면 꿈-분석은 전문가를 찾아가서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전문가가 되지 않고는 그 효험을 얻기 어렵다. 그 효험이란 건 꿈이라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즉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인격이 서로를 ’관‘하면서 나의 편향성을 보는 것이고, 그 편향성의 방향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강렬한 꿈, 반복되는 꿈, 자극하는 꿈에 이끌릴 때, 분명 꿈은 의식에 신호를 보내는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럴 때 꿈을 무턱대고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꿈들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융은 주의깊게 꿈의 맥락을 작성하라고 말한다. “일련의 꿈의 상을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군집되어 있는 연상의 고리들을 주의깊게 의식적으로 조명해내라”는 것이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133쪽) 꿈의 상과 이 상으로부터 연상된 것들을 계열화하는 작업, 즉 이런 상들의 맥락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꿈의 해득은 수행될 수 있다. 단일한, 혹은 개개의 꿈의 해석에 무게를 두지 말고, 꿈의 계열에 주의를 두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고, 인류의 발생 아니 생명이 시작된 저 고태의 집합적 정신이기도 하다. 지금을 살고 있는 의식에게 이 무의식은 말을 건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대와 나의 정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자신을 통해 보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도 방향이 아니요, 현재의 의식도 방향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 침투에 의해 만들어지는 ’앎‘이 우리를 이끌 것임을 꿈은 예고해준다.
이런 융의 꿈-분석은 명상 그 자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지를 관찰하고 실행하는 ’명상‘의 작업. 우리의 집착, 우리의 고통을 대면하고 일방향의 나를 내려 놓는 수행! 함께 또 따로! 이런 명상 가운데 있지 않다면 꿈-분석은 무효이고, 꿈-치료는 요원하지 않을까? 꿈-분석을 통해 당장 평화와 안정과 행복의 상태가 도래할 거라고 꿈 꾼다면^^ 그 전제로 인해 이미 실패한 작업이 아닐까?
그래서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침투는 고통스러운 것임을 강조 또 강조한다.
심혼과 충동 사이의 결합이 항상 조화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갈등에 찬 고통스러운 것이다. 정신치료의 주목적은 환자를 상상할 수 없는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통을 참는 철학적 인내와 꿋꿋함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삶의 전체성과 충만을 위하여 기쁨과 고뇌의 균형이 요청된다.
고통은 불쾌한 것이므로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근심을 자신들이 만들어냈는지를 사람들은 헤아리려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가능한 한 커다란 행복에 대해서만 말하며, 행복 또한 적절한 고통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중독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신경증의 이면에는 환자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연스럽고 필요한 고통이 자주 발견된다. 환자가 피하려는 증상에 상응하는 심적 고통이 치유과정에서 해소된다.(『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65쪽)
고통이 따르는 수행이 아니라면 우리의 정신은 중독된다. 그리고 한 상태로 있기를 탐한다. 역설적이게도 신경증 환자는 고통을 피하려다가 고통스러워진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 행복을 꿈꾸는 상태에 중독된다. 그럴수록 더 고통스럽고 더 아프다. 융의 경고를 잊지 말자. 우리의 꿈-분석은 나를 깨우는 작업이다. 고통를 피하지 않고 고통을 겪음으로써 삶의 충만을 얻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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