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마음의 병을 앓는지,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은 왜 이런지,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무엇인지, 우리 시대 이런 마음의 병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전문가와 약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스스로 돌보지 않고 돌봄 받기를 바라며 전문가의 손에 치료되기를 바란다. 자유와 독립을 외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과 삶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프로이트와 융, 치열하기 자기 고민을 했던 이들을 따라 배웁니다. 사이재의 지산씨에 의하면 프로이트보다 융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융에 대한 글부터 쓰신다고 하시는데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연재가 더욱더 기대됩니다. 마음과 삶에 대해서 스스로 치유하는 법. [내가 만난 융]에서 함께 알아보아요!
카를 구스타프 융과의 만남을 위해
글_지 산 씨(사이재)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빈에 인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가감없이 말하는 자가 나타났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그는 ‘도덕병’에 걸린 혹은 ‘도덕적인 체’하는 세상의 한복판에 직격탄을 날렸다. “모든 신경증은 성적 욕망을 억압한 데서 시작된다.” 프로이트 평전을 저술한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자신의 시대를 도덕적이기 위해 힘을 쓰기보다는 도덕적인 체하는 데 힘을 쓴 때라고 정의한다. 이런 시대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잠재하는 무의식, 즉 억압된 충동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프로이트는 “리비도 뒤에 숨어있는 성을, 해맑은 아이 뒤에 숨어있는 원초적 인간을, 허물없는 친족관계에서 태곳적부터 시작된 부자간의 위태로운 긴장을, 아무런 악의 없는 꿈에서 뜨거운 피의 용솟음을”(슈테판 츠바이크, 양진호 옮김, 『프로이트를 위하여』, 책세상, 2016, 62쪽)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었다. 이로 인해 인간주체, 자아, 정신에 대한 인식은 변경되어야만 했다. 충동과 욕망의 주체라는 점에서 인간은 자신을 다시 이해하고 삶을 솔직하게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등장했다. 세기말의 스위스 취리히,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인간의 본질을 찾아 나선 이가 있었다. ‘마음의 심층, 무의식을 탐구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동조했으나 훗날 프로이트와 결별하면서 자신의 정신분석을 분석심리학 혹은 심층심리학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 융! 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상징적 인격이 심연으로부터 불쑥 솟아오르고, 자신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느닷없이 출현하여 자신을 뒤흔드는 경험에 주목했다.
그리고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신체적 증상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의식에 신호를 보내는 이 정체 모를 현상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불쑥 나타나 인간 자신을 흔들고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 제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인격은 나인가 아니면 낯선 타자의 빙의인가 아니면 신이 내린 저주인가? 이토록 비의지적인 인격은 나에게, 인간에게 뭐란 말인가? 융은 이런 현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외부로만 향하던 인간의 문제를 내부로 돌렸다. 나를 탐험하고 인간의 정신을 탐험했다. 융으로부터 그 이후 인류의 복잡다단하고 어둡고 고통스런 문제는 ‘나’를 알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더불어 국경 넘어, 시대를 뛰어넘어 온 인류에게 작동하는 ‘집단무의식’을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19세기 말, 20세기 벽두 나를 탐험하고 인류의 정신을 탐험하는 ‘실험’이 감행되었다. 그리고 21세기! 사람들의 심리적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훨씬 더 심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호소하고 강박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우리의 충동과 욕망은 가히 점입가경, 욕망의 화신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례하여 심각한 마음의 병과 심리적 고민 또한 점입가경이다. 그리하여 교회와 절에 가듯, 감기에 병원을 찾듯, 신경정신과나 심리상담가를 찾는 일이 지극히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 움큼의 신경안정제 혹은 그에 준하는 약을 복용하는 모습 또한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렇다. 프로이트와 융의 치료 방법은 19세기 말보다 21세기의 우리에게 훨씬 더 친근하고 일상적이다. 쇼파에 또는 의자에 앉아 의사나 상담치료사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흔하디 흔한 풍경이 아닌가? 그러나 프로이트와 융의 고민 그리고 치열한 자기 탐구는 우리에게서 오히려 멀어졌다. 전문가를 찾아가 마음의 병을 이야기하고, 치료를 의뢰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고 비평하고 돌보는 능력을 키우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왜 마음의 병을 앓는지,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은 왜 이런지,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무엇인지, 우리 시대 이런 마음의 병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전문가와 약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스스로 돌보지 않고 돌봄 받기를 바라며 전문가의 손에 치료되기를 바란다. 자유와 독립을 외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과 삶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프로이트와 융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한 절실함으로 자기 자신의 정신적 매카니즘과 정신활동의 심리적 요소까지 과학적으로 비평적으로 분석했다. 자신과 환자의 정신활동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자신과 환자들의 인간적 조건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타자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알고자 했다. 자신을 아는 것이 환자를 아는 것이요, 환자를 아는 것이 자신과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프로이트와 융은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 활동은 오직 인간을 알고자 함이요, 인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조정하고 만들어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첫 작업으로 카를 구스타프 융을 이야기하려 한다. 왜 프로이트가 아니고 융이냐고 한다면, 융의 저작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융을 읽으면서 프로이트가 궁금해져 올 초부터 프로이트를 읽고 있다. <주역>을 공부하면서 음양의 대극과 도에 관심을 가졌던 융을 만나게 되었고, 융의 저작을 읽게 되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사이재 융 세미나에서 기본저작집 9권을 차례로 읽어 올해 초에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융의 저작을 처음 접하면서 융의 무의식 개념과 정신분석이론을 알게 된 기쁨도 있었지만.무엇보다 융의 인간적인 고민 그리고 인간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는 섬세하고 따뜻한 태도가 마음에 와닿았다.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의 증상이 아니라 환자 한 명 한 명의 특별한 인격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 각각의 개성에 주목하는 태도는 경이로웠다. 그리고 환자의 아픔을 알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책을 읽고 연구했던 융의 ‘자비심’과 ‘보리심’에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가 겪는 병의 의미와 그것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동양철학, 종교학, 신화, 민담, 연금술, 점성술 등을 섭렵하는 융의 탐구심은 보리심과 자비심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였다.
나는 분석심리학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융의 글을 읽은 수많은 독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내가 만난 융을 이야기하고 싶다.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융의 인간에 대한 고민과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융에 의하면 어떤 사건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삶의 의미가 담겨있다. 융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온전하고 원만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온전한’ 삶은 이론적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우리가 그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운명적인 현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혹은 그 안에서 우리가 태어난 무질서한 혼란으로부터 조화를 이루려고 시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심상영, 『삶의 의미와 테메노스』, 한국심층심리연구소, 2019, 재인용. 31-32쪽)
온전한 사람 융에 대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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