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만나다 : 여행보다 더 재밌고 새로운 이야기
실록이라는 기록 형태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지만, 그중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기록된 내용과 양이 방대하여 당대의 풍습이나 백성들의 삶을 알 수도 있다는 점, 편찬된 실록을 후대 군주가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신빙성을 확보했다는 점이 그렇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 누구나 원한다면 바로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한자 번역본이라 읽기가 까다롭고 양도 방대한 탓에 접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가 이걸 읽을까? 싶었는데 사이재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정기재 쌤이 10년째 읽고 계신다고 했다. 그는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 옛 이야기를 읽는 것이 여행보다 즐거운 사람이다.
여행은 공간을 이동하며 지역에 따른 문화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을 이동한다.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들이 믿는 것도 달라진다. 기재 쌤은 이상하고, 낯설고, 때로 웃기기도 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은 거꾸로 ‘나와 이 시대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고 했다.
결핍에서 위기지학으로
조선왕조실록을 10년째 읽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인문학 공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2008년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게 됐어요.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명함이 없으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끼잖아요. 저도 나의 유용성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아이 키우는 일의 가치를 평가절하 했어요. 당시에 공동육아를 하고 있었는데, 일단은 나가야겠다, 애하고 분리가 되어야겠다 싶었죠.
처음에는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하는 사람이라도 되야겠다’는 마음으로 왔죠. 시간이 맞으면 다 들었어요. 무조건요. 사서 강독으로 시작했는데, 조선왕조실록도 마침 할 수 있는 시간대에 뜨더라고요. 그런데 인문학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 불안함으로는 어디를 가도 결핍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동양고전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얘기하잖아요.
그런 결핍감은 직장에 다니실 때도 있으셨던 걸까요?
더 심했던 것 같아요. 외적 잣대를 스스로 내면화시키잖아요. 어디를 가도 내가 유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이걸로 재취업을 해야 하나,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하는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는데요. 5~6년 후에는 미련을 많이 버렸어요. 다행히 장을 잘 찾아왔죠.
다양한 공부의 장이 있잖아요. 어쩌다가 인문학 공부, 그중에서도 동양고전공부를 하게 되셨어요?
제가 낡은 걸 참 좋아해요. (웃음) 어떤 이야기가 지속되는 걸 보는 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사서를 해야겠다 생각했고요. 또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그게 고전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는 안 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는 동일한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분들에게 어떤 노하우가 있을 터인데 그게 무엇일까, 직접 탐구해 봐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마침 딱 맞는 시간에 사서 강독이 있었어요. 뭔가 멋있는 말을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냥 우연히 제가 그 자리에 있었네요.
사학을 전공하셨다고요. 처음 세미나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만나셨을 때 어떠셨어요?
해석되어 있는 역사에는 관점이 있잖아요. 저에게 통쾌함을 주는 관점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익숙한 방식, 교수님이 얘기했던 방식으로만 제가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은 ‘의외인데?’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살피다 보면 우리와 굉장히 다른 가치를 갖고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예를 들면 기우제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도마뱀 같은 걸 풀어 놓고 도마뱀에게 시를 읽어주면서 비를 빌어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같이 연동되는 작업을 함으로써 자연을 바꿔보려고 하죠. 그러니까 도롱뇽과 인간과 비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또 그럴 때 임금이 자신의 도덕성을 성찰하는 과정이 길어요. 전국적으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얘기를 하라고, 아무리 심한 비판이라도 받아들일 거라고 해요. 이게 기우제의 기본 태도거든요. 현대에 익숙한 방식으로 풀었던 것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여기에 있구나, 이 가치를 알아봐 줄 사람들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재밌었어요.
나를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믿음
기우제 때 왕이 도덕성을 성찰하는 건 자중하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다기보다는 왕이 천지인 중에 자기가 인간의 대표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조선 초기 임금들이 불쌍한 게, 누리는 임금들이 아니거든요. 천지인 가운데 끼어 있는 사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운행이 나의 도덕성으로부터 온다는 책임감을 가진 존재였던 것 같아요. 권력의 중심이라기보다는 순환의 중심이라고 해야 되나요. 내가 잘못한 걸 듣겠다는 건 어디가 막혀서 순환이 안 되고 있는지 풀겠다는 의미예요.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거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치하거나 재산을 불리기보다는 성군이 되겠다는 생각이 컸죠. 연산군 이전의 왕들은 옷을 해지게 입고 음식도 검소하게 먹어요. 오히려 양반들이 사치하면서 누릴 걸 다 누리는데 임금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임금 자체가 완벽한 ‘사람’이 때문에 사회에서 스스로를 비울 것을 요구했어요. 자기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걸 계속 상기하는 거예요.
조선왕조실록이 왕을 중심으로 쓰였겠지만, 또 어떤 이야기들을 더 담고 있을지도 궁금해요.
왕조실록에는 조선의 정치관과 우주관이 다 담겨 있어요. 왕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들어가 있는 거죠. 혜성이 뜬 거, 바닷물이 변한 거, 한밤중에 부엉이가 우는 것도 다 기록해요.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라는 게 인간사회에 한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와는 스케일이 완전히 다르죠. 지진이 나고 우박이 떨어지면 임금이 밥을 줄이고 소복을 입어요. 이게 다 정치인 거예요.
지금은 에코라는 게 정치적, 경제적인 일이 아니라고 분리하기도 하죠. 하지만 사실 모든 게 다 정치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정치가 완전히 바뀌고, 운행이 바뀐다고 생각한다는 게 저는 무척 놀라웠거든요. 내 행동 하나에 다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왕뿐만 아니라 내 행동 하나 바꾸는 것으로도 정치는 바뀔 수 있는 거죠.
선생님께서 고전을 읽으면서부터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기지학을 위해 공부한다고 하셨던 게 떠오르네요.
조선왕조실록도 그렇고 고전 전반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요. 당시 사람들은 내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나를 바꾸기 때문에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 생각 때문에 스케일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선비들은 나 하나 한다고 뭐가 바뀌겠어, 무슨 영향을 주겠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삶 하나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치판을 떠나서 은둔한 사람들도 나오는데요. 이 사람들은 정치판 밖에 있다고 자기가 정치를 안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산속에 있는 건 나 혼자 좋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존재를 바꿈으로써 저 혼탁한 정치판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요. 은자를 모셔 오는 문제가 자주 이슈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거든요.
제가 정치적인 인간이 아닌데도 정치 얘기를 계속하고 있는데요. (웃음) 조선왕조실록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나를 바꾸면 이것 때문에 저절로 세상이 바뀔 거야, 라고 생각하면 자기가 굉장히 중요한 존재가 되잖아요.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요.
여행보다 더 재밌고 새로운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 여자들 이야기도 있나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지 궁금해요.
제일 놀랐던 건 조선왕조실록에 왕후 이야기가 거의 안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유분방한 여자들은 또 굉장히 많이 나와요. 원래 고려 여자들이 자유분방했기 때문에 그런 여자들에 대해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기록을 해놨어요. 저는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철학이 서면서 어떻게 여자들이 생명력을 잃어가는가에 관심이 있었는데, 실질적으로는 그게 사대부들에게 국한되더라고요. 민간이나 지방으로 내려가면 여자들이 억압적이고 가부장제에 눌려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게 많이 보여요.
『미암일기』를 쓴 학자 유희춘은 부인 송덕봉의 문집 『덕봉집』을 내주기도 했어요. 부인이 남편을 혼내기도 하고요. 유희춘이 함경도에 귀양을 갔을 때는 송덕봉이 집에 남아서 부모님을 끝까지 다 모셔요. 그러고는 씩씩하게 ‘내 할 일을 다 했으니까 이제 남편한테나 가볼까’ 하고는 함경도 유배지까지 가거든요.
또 모성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싶었던 게, 조선시대 양반들은 100% 유모가 키웠어요. 요즘 엄마들이 하는 일을 유모들이 하니까, 당시 엄마들은 요즘 아빠들이 하는 역할을 해요. 버릇없게 키우기도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결핍을 엄마의 모성이나 돌봄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잖아요. 이건 핵가족의 특징이지, 큰 가족에서는 인격 형성을 그렇게 좁게 보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우리가 과거부터 당연히 지속되어 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저는 오히려 외국 여행을 가는 것보다 고전을 읽을 때 더 많은 새로움을 느껴요. 한동안 미친 듯이 여행을 다녔었는데, 고전을 읽으면서 여행에 대한 욕망이 줄었어요. 조선왕조실록 같은 건 그 시대, 그 사람들이 쓴 글을 직접 읽는 거잖아요. 그게 다른 역사책과 다른 매력인 것 같아요. 굉장히 낯설어서 이해는 안 되는데, 또 낯설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고 해야하나요. 그런데 최근에는 또 동시대 책도 너무 좋더라고요.
요즘에는 어떤 책을 재밌게 보고 계신가요?
리베카 솔닛이라는 분이 쓰신 책을 조금씩 읽고 있어요. 제가 역사책을 쓴다면 그분의 책처럼 쓰고 싶어요. 글에서 삶을 통해서 역사를 어떻게 사유하고, 철학을 하면서 어떻게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가 맞물려져요. 옛것을 본다는 건 이런 의미에서 보는 거겠구나, 싶더라고요.
섣부른 얘기라서 조심스럽기는 한데요, 제가 요즘 관심 있는 건 이런 거예요. 보통 적이라고 하면 서로 원수고, 대립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역사를 보면 다 친인척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며 부딪히기도 하거든요. 이런 부분을 보면 우리가 현대에서 가해와 피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결이 굉장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요.
오늘날 공동체에서 피해, 가해 관계가 발생했을 때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많지 않아서 아쉽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오히려 과거 역사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도 있겠군요.
갈등 상황이 있을 때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을지 찾아가는 작업이 재밌어요. 또 어떤 임금이 훌륭한 일을 하면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올려요. 선조 같은 경우는 그걸 거부하는데, 신하들이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이름은 당신 하나의 영광을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고요. 임금으로서 어떤 상징성을 갖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거예요. 리더가 하나의 상징일 수도 있는데, 우리 시대는 업무나 직무로만 여기잖아요. 이런 것들이 역사를 볼 때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기재 쌤은 지금 우리의 관점을 뒤집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하지만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다며 조심스러워하셔서 그 이야기 모두를 글 위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한 역사를 10년 읽은 사람이 믿는 것은 이 시대가 유일무이하지 않다는 것, 또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고립청년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삶, 다른 세상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막막함에 휩싸인다. 만약 우리의 역사 뿌리에,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다른 믿음과 감각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 우리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했지만, 한 시대에 고립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재 쌤이 꼭 그 이야기들을 써내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인터뷰를 하며 조선왕조실록의 풍성한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 거라고 믿게 되었다.
인터뷰_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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