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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쿵푸스, 만나러 갑니다

[호모쿵푸스, 만나러 갑니다] 역사를 만나다: 뜨거운 포부, 뜨거운 역사

by 북드라망 2024. 5. 24.

역사를 만나다 : 뜨거운 포부, 뜨거운 역사


규창은 규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하고 때로는 밥도 한다. 세미나 시간에는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온몸의 혈 자리를 주무르고, 틈틈이 스트레칭도 잊지 않는다. 행동이 야단스럽지 않고 은근해서 과묵할 것 같기도 하지만, 의외로 안 끼는 곳이 없다.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슬쩍 등장해 말과 손을 보탠다. 깊은 저음의 목소리 때문일까? 참견하고 끼어들어도 촐싹대지 않는다. 그의 마음에는 풍랑이 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를 봐온 지 수 년이 지났건만, 규창의 마음속에 불이 들끓는다는 걸 인터뷰를 하며 처음 알았다. "열이 받았다", "뜨겁다", "혈기가 왕성했다", "악에 받쳤다", "치열하다" 자기 얘기를 할 때도, 시대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공부와 글 이야기를 할 때도, 사용하는 동사가 그야말로 "뜨겁다." 놀러 다니기 좋아했던 20대를 지나, 산책도 귀찮아진 30대가 됐건만 마음속 열기는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아, 그가 속으로 태우고 있는 내용물만은 달라졌다. 연애와 멋진 척의 불길이 조금 사그라든 대신 시대적 의제와 공부-글쓰기에 대한 마음에 불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1. 뒤늦게 시작된 읽기와 쓰기


규문에 처음 공부하러 언제 오셨어요?

23살 여름에요. 22살 겨울에 군대를 전역하고 두세 달 정도 뒹굴뒹굴하다가, 돈이 너무 없어서 친구 소개로 막노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아는 형이 규문 강의를 추천해 줬어요. 알바는 하기 싫고 집에만 있자니 심심하고, 서울이나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왔죠.


강의를 들으러 왔다가 세미나까지 하게 됐어요. 일주일에 한 번 왔다가 3일을 왔다가 매일 오게 됐고, 어느 날 제게 열쇠가 주어졌고, 매니저로 이름이 올라간단 이야기를 듣게 됐죠. '어? 왜 올라가지?' 그때 부모님 소개로 시민단체에 지원해서 뽑히기도 했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시민운동가로 오랫동안 활동을 하셨고, 저도 네다섯 살 때부터 회의를 따라갔었거든요. 아직도 회의 뒤편에서 포켓몬스터를 하던 게 기억나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요. 생각하다가, 부모님께 기왕 한 거 공부를 더 해보다가 시민단체에 전념해도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공부해야지 마음먹으려고 했는데, 뜻대로 잘 먹히지는 않더라고요.

 


공부하겠다는 마음이 잘 안 먹어지셨어요?
그럼요. 텍스트도 안 읽히고 토론 정리도 안 되고, 글 쓰라는데 못 쓰겠고. 생각이라는 게 전혀 없었고, 텍스트를 읽을 때 뭐가 재밌고 재미없는지도 몰랐어요. 아예 공부가 안 되는데 왜 자꾸 여기에 나오지, 하는 방황을 몇 년 했죠.


짊어진 게 없으면 나가버릴 텐데, 제 이름을 자꾸 세미나 매니저로 올리는 거예요. 이전에 살던 것처럼 돈도 적당히 벌고, 친구들이랑 놀고 게임하고 술 마시고, 그러다가 인문학 공부 취미로 하면서 허세 부릴만한 건덕지도 쌓고 싶었죠. 규문 오기 전에는 많이 놀았어요. 군대도 상근이어서 출퇴근이 가능했거든요. 퇴근해서 친구들과 밤새 놀다 출근한 적도 많았습니다.


규문 와서는 연애도 하고 싶었는데, 당시 제가 인천 터미널에 자취를 해서 오가는 데만 3시간이 걸렸어요. 아침에 여기 와서 밤늦게 가면 언제 들이대겠어요. 규문에 늦거나 안 나오면 공간이 어떻다, 책임감이 어떻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연애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어요. 공부도 안 되고 연애도 못 하고. 23살, 24살 때였으니까 얼마나 열이 받겠어요.


나중에는 욕을 먹으면서까지 연애에 몰두했어요. 일단 사귀고 봤죠. 둘 중 하나가 해결됐으니까 이제 안 되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데, 노력한다고 되는 건 또 아니더라고요. 연애는 마음이 맞으면 만나고 안 맞으면 헤어지지만, 텍스트나 글쓰기는 마음을 맞추려고 해도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 끙끙댔는데, 대운이 바뀌면서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그래도 안 나가고 계속 계셨던 게 대단하네요!
친구들과 노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재밌기는 한데 패턴이 비슷했죠. 아침이나 점심쯤에 친구 집에서 슬슬 모여서 게임을 하거나 자다가, 다 같이 피시방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다시 피시방으로 마무리했어요. 그렇게 헤어지면 현타가 왔었거든요.


또 악에 받쳐서 떠나지 못하기도 했어요. 규문에서 이슬람 이란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제가 리더 역할을 잘 못했어요. 혼이 많이 나서 화딱지가 났죠. 그걸 듣고 나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어요. '어쩔 거냐' 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냥 열심히 한번 해보련다' 했죠. 그래서 그다음 발제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몰입하고 나니까 이렇게 텍스트에 집중하면 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읽기와 쓰기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2. 역사에 대한 오해들


규문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에서 역사 공부를 하고 계시죠.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가끔 기획된 세미나를 맡게 될 때도 있잖아요. 제게는 역사가 그랬어요. 어쩌다 공부를 시작됐지만, 역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은 점점 구체화되는 것 같아요.


가령 역사란 연표의 사건이고, 그게 변곡점이 되어서 흘러간다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아마 그래서 대부분 역사를 재미없어하는 것 같아요. 외워야 하니까요. 그런데 역사에서는 연표적인 게 아니라 지도적인, 그러니까 지형적인 걸 무시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오랜 시간 살며 형성한 고유의 리듬도 있고 문화도 있는데, 그걸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건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실체화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래서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 첫 시즌은 '지도 그리기'라고 해서 지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 그게 일 년 목표였어요. 세계지도가 3차원의 구를 2차원 평면으로 옮기는 거잖아요. 오차를 포함할 수밖에 없죠. 해보니까 왜곡을 어떻게 감수할 거냐가 문제의식이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지도는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적이에요. 서양중심주의적인 세계사가 오래되며 나타난 현상이죠.

지도를 직접 그려보면서 우리가 보통 보는 게 북반구에 있는 나라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걸 확실히 느끼게 되셨군요. 그래서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이기도 하겠네요.


지도를 보니까 이걸 몰랐으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또 지도가 유목민 공부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유목민이 '세계'라는 관념을 만들었어요. 물론 그전부터 '우리가 사는 곳이 전부가 아니겠구나' 인식은 있었지만요, 바깥이 어떤 곳일지, 구체적으로 길은 못 냈거든요. 그걸 체계화시킨 게 몽골이에요. 몽골이 아시아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교역로를 완벽하게 정비해요. 안전한 교역로가 생기니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세계라는 심상을 처음 인식하게 된 거죠. 세계사를 하는 데 이걸 놓치고 갈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몽골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죠.


이 사람들이 아무 데로나 가진 않거든요. 분명히 경로가 있어요. 지도를 봐야 유목민의 운동이 보이고, 동서문화가 어떻게 섞이는지 보이고, 그래야 '세계'라는 관념이 생길 수 있죠. 그런데 이걸 다 모르고 넘어가는 게 역사를 오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유목'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잖아요. '유목적', '유목하다' 처럼요. 실제 유목민은 어땠나요?
정주적인 것과는 다르지만, 그들에게도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칭기즈칸이 어렸을 때 산에서 내려온 노인이나 격언이 쓰인 비석을 통해 지혜를 배웠다고 하거든요. 칭기즈칸이 말하는 것 중에 투르크인들의 지혜가 담긴 비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요. 투르크인의 오랜 전통에 나이가 들면 광야로 혼자 떠나서 수도 생활을 하는 영적인 스승들이 많이 있었어요. 실제로 칭키즈칸이 낮에는 전쟁을 하고 밤에는 그런 현자들을 불러요. 유목민들은 독특한 감수성으로 문화를 향유하던 사람들이었던 거죠.


파괴적인 것도 분명 있어요. 그런데 파괴적이기만 한 건 아니에요. 근대 침략자들은 식민지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고 자기들 것을 주입하잖아요. 그런데 유목민들은 식민지로 만들 때 거기에서 배워서 동화가 되어버려요. 그게 나중에는 유목민들이 서로 분열되게 만들기도 하죠. 칭기즈칸의 자식들이 중국으로, 러시아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져요. 문화가 달라지면서 이해관계가 달라지죠. 어디는 기독교인데 어디는 이슬람이라서 종교적인 감정싸움이 벌어지기도 해요.

 


3. 공존하는 역사를 쓰고 싶다
유목민이 동화에 능했다니, 정주해 있던 현지인과 적대적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겠네요.
몽골이 1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을 할 때 지금 러시아가 있는 곳도 다 먹혔거든요. 근대 이후로 나온 러시아 역사서를 보면 이반 3세 덕분에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고 서술해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유목민과 러시아 사람들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공존했어요. 유목민들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러시아를 도와주기도 했고, 러시아의 문화를 존중하고 배우기도 했어요. 러시아 원주민들도 유목민을 배척하지 않았고 너무 억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지금에 와서 적대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실 친구이고 먼 친척이기도 했죠.

사서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고전 공부도 하고 계시잖아요. 역사 공부와 만나는 면이 많겠지만, 그래도 둘 중에 먼저 길을 내보고 싶은 건 어느 쪽이세요?
일단은 역사에요. 역사가 다시 쓸 수 있는 건덕지가 많기도 해요. 블루오션이다. (웃음) 그리고 작년부터 공부하는 삶이 뭘까, 하는 고민도 계속하고 있거든요. 고미숙 선생님은 '백수'를 얘기하셨는데, 그건 소수의 엘리트가 독점했던 앎을 대중지성으로 펼쳐내면서 나온 말인 것 같아요. 우리는 백수가 그렇게 새롭지는 않잖아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삶이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본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요.


사서의 이야기들은 확실히 우리에게 많은 걸 던져주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정말 나하고 또래한테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해 보면 역사 같아요. 제가 하려는 건 역사학자처럼 쓰는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보는 방향이에요. 지금은 무슨 텍스트를 읽어도 그게 보여요. 가령 도나 해러웨이는 페미니스트이지만, 저는 이 사람이 인간 아닌 존재와 함께 상호 교류했던 역사를 다시 쓴 사람으로 보이더라고요.


앞으로 해러웨이처럼 인간의 역사를 인간이 아닌 존재와 함께 살아왔던 것으로 써보고 싶기도 하고요. 몽골 유목 세계사에서 본 것처럼 서로를 정복한 역사가 아니라 공존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역사였다는 걸 쓰고 싶기도 해요. 포부가 좀 크죠? (웃음)

너무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 또래에게 필요할 것 같아요. 혐오 이슈가 생긴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걸 환기하는 데 역사만큼 효과적인 게 없을 것 같아요.
저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 우리 또래는 국적으로 자신을 설명하지는 않거든요. 특정 문화에 갇히고 싶지도 않고 사귀는 친구도 이미 글로벌하죠. 그런데 역사적인 인식은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헬조선에 대한 이야기도 어떻게 보면 우리가 놓여 있는 이 공간을 다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피로감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역사책을 하나만 추천해 줄 수 있다면 뭘 꼽으시겠어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가득한 『역사를 위한 변명』이요. 이 책을 쓴 마르크 블로크는 2차 세계대전의 레지스탕스로 참가했다가 사형을 당했어요. 이 책은 전쟁터에서 쓴 거라 미완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거든요. 그때 같이 레지스탕스로 참여했던 프랑스 군사 한 명이 "역사가 우리를 배신한 걸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저는 그걸 인류가 왜 다시 참혹한 일을 벌이고 마는가, 라고 이해했어요. 세계 1차 세계대전이 있고 20년 지나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래서 마르크 블로크는 우리가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를 치열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냈어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쓴다고 하지만, 증거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증언조차 착각일 수 있잖아요. 그럼 역사가 써야 하는 진실은 어떤 걸까. 판사처럼 진실 공방을 하게 되면 폭력보다 더 한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이 책을 읽으며 이 고민을 반복해 보게 돼요. 읽으면서 '와, 뜨겁다'고 생각하죠.

 



사주팔자에서는 남이 느끼는 자신과 자신이 느끼는 자신이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규창은 스스로를 '갑진' 같다고 느낀다고 했다. 2024년의 육십갑자 연도이기도 한 갑진은 비옥한 땅에 느티나무가 왕성하게 자라는 모습과 같다. 비옥한 땅에 있는 나무인 만큼 위로 뻗어나가는 힘이 강하다. 아무래도 그의 마음속에 그만한 포부가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역사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마음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 나가고 싶은 친구의 마음이 말이다.


그가 하는 건 동양고전, 역사처럼 성과가 드러나기까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공부다. 그가 마음속에서 태우고 있는 불길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으면 좋겠다. 평소 야단스럽지 않고 꼿꼿하게, 은근히 공부하는 그의 모습을 믿는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꺼지고 꺾이는 게 아니라, 그런 덕분에 받아들이고 담아내리라고 믿는다.

 

 

인터뷰_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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