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세미나를소개합니다

[우.세.소] 이역만리 : 이야기와 역사로 만리를 주유하다

by 북드라망 2024. 7. 15.

이역만리 : 이야기와 역사로 만리를 주유하다

혜원(이역만리 세미나원)

 


‘역사’와 ‘이야기’의 운명적인 만남
규문에는 아주 오래된 팀이 있다. 일명 ‘부천팀’. 이 팀은 약 10년 전 부천시민학습원에서 채운샘과 공부를 함께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규문에서 공부하고 있다. 단단한 결속력,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실함, 독보적으로 화려한 간식(?)으로 남다른 공부를 이어가고 있는 ‘부천팀’의 정식 이름은 ‘B-움’. 이 이름의 뜻은 ‘Book에서 움트다’! ‘B-움’은 책을 읽으며 다른 삶을 모색하고자 뭉친 멋진 팀이다. 매주 금요일 부천과 서울을 부지런히 오가며 공부하는 ‘B-움’ 팀이 올해 ‘픽Pick’한 공부는 바로 역사다. 작년까지 이반 일리치와 경제 공부를 성실히 하던 중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낱낱이 알아보기로 한 것! 바로 그때 규문 청년들이 슬~쩍 숟가락을 얹었고(^^), 그리하여 탄생한 세미나가 바로 2024년 ‘이역만리’다. 풀어 쓰면 ‘이야기와 역사로 만리를 주유하다!’

 

‘이야기와 역사’라는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세미나는 ‘역사책’만 읽지는 않고 ‘이야기’를 꼭 함께 읽는다. 이때 ‘이야기’란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역사를 공부한다면서 이야기와 함께 보는 걸까?


우리는 ‘역사 공부’ 하면 우선 연표를 떠올린다. 몇 년에 누가 무엇을 했고, 무슨 사건이 일어났고... 이런 연표를 습득하고 외우는 것도 ‘역사 공부’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역사’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역사란 무엇일까? 그냥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 순서를 알아가면 역사를 공부했다 할 수 있을까? 그건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닐까? 

 

역사란 무엇일까요? 과거의 사건을 인과의 순서로 나열한 것일까요?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사건을 암기하는 것에 불과할까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건도 어떤 관점과 사료를 통해 인과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역만리' 세미나에서는 역사 혹은 이야기를 가로지르며 역사의 무궁무진한 생성가능성을 상상하고자 합니다. 역사적 지평 속에서 지금 우리 삶의 조건을 따져 묻고, 나아가 어떻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을지를 질문하고 고민하는 역사 공부! (‘이역만리’ 소개 문구 中)

 


역사는 인과관계와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 즉 어디까지나 ‘사건 중심’이다. 여기에는 ‘인물’이 없다. 한 개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는 역사에서 다루지 않는다. 이야기는 역사가 보지 못하는 개개인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와 그것을 겪는 다양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전혀 다른 프랑스 혁명을 만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그렇다. 우리는 역사적 시각에서 놓치는 것을 소설을 통해 이해하게 되고, 소설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역사에서 알게 된다. 연표에 박제된 역사적 시공을 이야기로 소환하여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지금 시대를, 나를 둘러싼 관계를 보고 있을까?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의 인과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실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으로 꿈틀대고 있는 게 아닐까? 

 

 


역사와 이야기로 만나는 ‘자본’
지금 우리가 탐사하는 시대는 역사 ‘교과서’로 따져보면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서막’이다. 서구 열강이 유럽 밖으로 마구 팽창하며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 ‘정착’하고 ‘개척’하는 시대 말이다. 또 유럽 안으로는 자본주의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던 시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리는 19세기 말엽의 유럽과 미국.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하며 수 없이 분통을 터뜨렸다(!) 안으로 밖으로, 모든 것이 문제였다. 식민지는 유럽에 부를 가져다줄 시장이 되어 끊임없이 착취되었다. 그렇게 벌어온 부로 인해 유럽인들이 부유해졌는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부터 ‘뿌리 뽑힘’을 당해 더러운 도시환경과 가혹한 노동에 노출되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시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세미나 시간이 되면 우리는 공교육 경험을 공유했다. 교과서는 이 끔찍한 착취를 식민지 ‘개척’, 산업‘혁명’이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제국주의 타도!’를 외칠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역사와 이야기는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생각하고, 그 소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착취극 기반으로 한다. 사적 소유는 너무 당연해서 그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 이런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서막’ 시대의 이야기는 ‘옛날’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지평을 시사한다. 공부를 하다보면 가끔 기분이 묘해지기도 한다. 가령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뿌리 뽑히는’ 현상은 당시로서는 대사건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디폴트’라서 더 따지고 들어갈 것도 없다. 인류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 자본주의는 가장 최근에 생겨났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적 생활 외 다른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나는 이 세미나를 하면서 계속 이런 질문 앞에 마주한다. 나는 내 상상력의 빈곤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읽고 책은 <미국 민중사>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지켜보면서 우리는 괴로움을 토로했다. 아메리카에 당도하자마자 시작된 콜럼버스의 채굴, 스페인인들의 무차별적인 원주민 학살, 인디언에 대한 영국인의 안하무인적인 태도, ‘남의 집에서 쳐 싸우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그놈의 노예제! 미국은 시작부터 정말 ‘깡패’ 같았다. 백인들은 인디언에게 주거지와 먹거리를 ‘영원히’ 보장한다고 약속해놓고 다음날 그 ‘영원’을 깡그리 무시하는 법을 우후죽순 만들어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짐짝처럼 싣고 와서 족쇄를 채우고 채찍질을 하면서도 ‘그들이 웃고 노래하는 것을 보니 아주 행복해 보인다’ 같은 헛소리나 하고 있었다. 


미국의 기원에 대한 기막힌 역사를 읽으며 우리는 ‘국가의 탄생’을 실감했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국가의 탄생’ 인과는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생산량이 증대하고 잉여물이 생기고 사회가 좀 더 복잡해져서 정부를 이루고 갈등이 생기면 새로운 법을 만들어 해결하고 등등 ‘단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국가의 탄생’이 고스란히 보존된 미국의 역사는 그 어떤 논리도 단계도 없었다. 미국이라는 국가는 외부로부터 들어와 원주민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자국민들(가난한 ‘백인 남성’들)을 속이고 착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모든 저항은 진압되었고, 생산된 부는 모두 부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하워드 진은 <미국 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또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도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덧없이 스쳐 지나간 일일지언정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힘을 모으며, 때로는 승리한 잠재력을 보여준 보여준 과거의 숨겨진 일화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어쩌면 순전히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의 견고함에서가 아니라 덧없이 지나간 공감의 순간들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둔감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역사를 대하는 나의 접근법이다. (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이후, p.33)

 

 

하워드 진이 말한 ‘둔감’이란 뭘까? 아마도 기존의 ‘미국사’를 배우며 얻어왔던 ‘선입견’에 대한 둔감함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낭만화’와 ‘자포자기’에 대한 경계를 읽었다. ‘민중사’를 대할 때 우리가 보이는 두 가지 태도다. 대문자 역사에 저항적으로 존재하는 그들을 낭만화하는가 하면, 파편적인 민중의 움직임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며 결국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자포자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란 공부하면 할수록 모두가 한 가지 방향으로 휩쓸려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ㅇㅇ시대’라고 이름 붙인 시공은 무수한 목소리들이 우글거리며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나타났을 것이다. 역사는 누구의 관점으로 소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만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책만이 아니라 세미나 안에서도 만난다. ‘비움’팀은 대개 부천에서 살고 있는 중장년 여성으로 이루어진 팀이다. 그리고 나는 ‘서울촌놈’ 30대 여성이고 반장인 인이는 양산 출신에 이 세미나의 청일점이다. 나이대도 라이프 스타일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역사책과 소설을 읽으면 가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MZ’한 감각부터 6.25 시절(!)의 감각까지 얽히고 설키는 세미나를 하며, 나는 어떤 선생님의 이야기는 ‘전근대적’이고 어떤 것은 ‘현대적’일 수는 없으며 다 같이 ‘지금’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들 사이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가능성을 길어 올리고자 시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공부가 아닐까 자부해 본다^^

 




‘이역만리’ 세미나에서 접한(접할 예정인) ‘이야기’들

2023년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한길사
시내암, <수호전>, 글항아리
2024년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한길사
E.P.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에밀 졸라, <돈>, 문학동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창비
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이후
마커스 레디커, <노예선>, 갈무리
마크 트웨인, <도금시데>, 유페이퍼
마틴 스콜세지, <플라워 킬링 문> (영화)
폴 토마스 앤더슨, <데어 윌 비 블러드> (영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