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포도가 먹고 싶다
안녕하셔요. 편집자 k입니다. 어느새 봄이 왔네요(뒷북인가;; 하하). 갑인월에 비해 엄청 보들거리고 살랑거리는 을묘월이 자꾸만 제 마음에 이불을 깔고 날아가 누우라고 꼬셔대는 통에 저는 시도 때도 없이 꾸벅꾸벅, 임신 의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만 전 결백하구요. 그저 봄을 타는 것뿐이지요. 외모와 달리(응?) 빨래터(;;) 감수성의 소유자인 저이지만 이때만큼은 저도 봄 타는 여자. 목 기운 가득한 봄바람이 허허벌판인 무토(제가 무비겁, 무관입니다;; 허허)의 가슴에 파고들면 저도 모르게 정신줄을 스르르르 놓는가 봅니다.
이럴 때 저에게 필요한 건 뭘까요? 바로 팔과 다리를 힘차게 움직이는 활보(闊步)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래서 저는 요즘 북드라망 블로그에서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활보 활보>라는 원고와 함께하고 있습니다(응?). 그리하야 한동안 블로그에서 만날 수 없었던 정경미 샘과 제이를 원고를 통해 다시 보고 있는데요, 그러다 저는 그만 침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포도의 계절’(읽어 보시려면 요기) 편을 읽다가요. 그토록 먹고 싶었던 포도를 입에 한가득 넣고 알맹이는 오물오물, 포도씨는 오독오독 씹어 먹었을 제이를 떠올리니 코끝에는 달큰한 포도향이 주렁주렁 달리고 입안에는 침이 한 바가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편집자 생활 중에 원고를 보다가 미각을 자극받기는 또 처음이라 어찌나 당황스럽던지요. 블로그에서 읽었을 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런 게 종이의 힘일까요? 좌우간 <활보 활보> 때문에 저의 포도앓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은쟁반에 담아 하이얀 모시수건 적시며 먹는 청포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여름이면 지천에 깔리는 캠벨, 아 캠벨 포도가 먹고 싶어요!
탐스러운(!) 빛깔의 캠벨 포도!
하지만 현실은 포도의 계절이 아닌 딸기의 계절. 딸기도 좋아하긴 좋아하지만 선뜻 손은 가지 않고 자꾸 입맛만 다시게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요즘 칠레산 청포도도 마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물 건너 온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아흑. 천안이나 영동, 제부도나 안성…… 이런 데서 나는 거 먹고 싶다구요, 흑흑. 에휴, 하지만 어쩝니까. 아직 ‘포도의 계절’이 아닌 것을, 아직 포도와 저의 시절인연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요. 전에 황석영 선생님 소설을 읽다가 감옥에서 요리책을 빌려다 보며 먹고 싶은 음식들을 머릿속으로 요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저도 여기서 포도에 대한 이야기나 몇 개 하면서 포도의 계절을 기다려 볼랍니다.
먼저 북드라망답게 『동의보감』에서 포도를 찾아볼까요? 포도를 메인으로 다루고 있는 곳은 「잡병편」의 ‘과부’(果部)입니다.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성질이 평하고 맛은 달며(달고 시다고도 한다) 독이 없다. 습비(濕痺)에 주로 쓴다. 임병을 치료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기를 보하고 의지를 강하게 하며, 살찌고 튼튼하게 한다. 포도알은 자주색인 것과 흰 것이 있다. 자주색인 것은 마유(馬乳)라고 하고, 흰 것은 수정(水晶)이라고 한다. 동그란 것도 있고, 씨가 없는 것도 있다. 7월과 8월에 익는데, 북쪽 지방에서 나는 과일 중 가장 맛있다. 열매를 많이 따서 창진이 잘 내돋지 않는 것을 치료하는 데 쓰면 효과가 아주 좋다. 많이 먹으면 눈이 어두워진다.
고 합니다. 습비는 습기가 침입하여 생긴 신경통이라고 하는데요, 비오고 날이 궂을 때 온몸이 여기저기 쑤시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흰 것은 수정포도라고 했다는데 요것은 청포도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요것은 수정이랑 참 어울리는 것 같은데 왜 자주색 포도를 ‘마유’라고 한 걸까요?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아마도 모양새에서 따온 게 아닐까 싶네요. 마유를 우리말로 풀면 말젖, 네… 실제로 본 적은 없(으시겠)지만 말젖의 모양을 상상해 보시면서 마유포도를 떠올려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어쩐지 부끄럽네요. 이쯤에서 건전한(?) 옛날이야기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때는 1398년, 그러니까 조선 태조 7년 때의 일입니다. 정확히는 9월 1일 계유일에 병상에 누워있던 태조가 세자와 왕자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영자(影子)를 그려서 사모(思慕)하게 되는데, 내가 비록 쇠약하나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너희들은 다행한 편이다. 지금 병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수정포도를 먹고자 한다.” 그냥 ‘포도가 먹고 싶구나’ 하면 되실 것을 니들은 아부지가 있어 다행인 줄 알아 이것들아, 그런 니 아부지가 포도가 먹고 싶구나, 하신 것입니다. 이에 세자와 왕자들은 소리 높여 울면서 사람을 시켜 포도를 구해 오게 했는데… 이때는 음력 9월, 양력으로는 10월쯤 되었겠지요? 지구온난화가 시작되기 전이니 양력 10월이라도 지금보단 더 추울 것이고, 또 지금도 10월이면 포도는 다 들어가는 때가 아닙니까. 한겨울은 아니지만 그래도 포도가, 그것도 청포도가 드시고 싶다니;;; 세자와 왕자들은 ‘포도를 어디서 구해온단 말인가’ 하며 울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흑.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것인지 김정준이라는 자가 산포도가 서리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 상자나 바쳤다고 합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했지만 먹고 싶었던 것은 산포도가 아닌 수정포도, 그래서 기뻐만 한 것 같습니다. 반면 이틀 후인 9월 3일, 태조가 원했던 수정포도를 바친 한간에게는 쌀을 열 석이나 내려주었다지요. 병도 낫구요(이래서 사람은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하는가 봅니다 아흑).
신사임당이 그린 포도. 포도에 관한 유명한 일화도 있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때는 연산군. 이 아저씨는 상강(霜降) 이후에 포도를 궐로 들이라는 명을 내립니다. 정말 왜 이러시는지;; 과일은 제철에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분은 ‘살얼음 포도’를 즐기셨나봅니다. 경기감사에게 산포도를 “서리가 내린 뒤에 가지와 덩굴이 달린 채로(미적 감각ㅋ)” 보내라느니, 그 다음 해에도 또 서리 맞은 포도와 다래를 들이라는 전교를 내립니다. 차게 드시는 걸 좋아하는 걸 보면 열이 많으셨나 싶기도 하고……흠흠. 뭐 어쨌든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서리 맞은 포도를.
이후에는 포도에 대한 재미있는 별다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데요, ‘순종실록부록’에 1916년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생일날을 맞아 그에게 적포도주와 브랜디를 하사했다거나 하는 영양가 없는 기록이 몇 개 있을 뿐입니다.
다시, 제이의 포도 이야기로 돌아오면, 제이가 포도를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고 제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임철우 선생님의 『등대 아래서 휘파람』(요건 구판 제목이고 지금은 『등대』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와 있습니다)이라는 소설책이었는데요. 작가의 소년기가 담긴 이 자전소설에는 「포도 씨앗의 사랑」이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난 갓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남녀, 이 두 남녀를 두고 마을 아낙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밤봇짐을 쌌네 어쩠네 숙덕숙덕 말을 만들어냅니다만 이들은 행복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소설 속의 ‘나’는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둘은 지금 바로 그 평상 위에 나란히 붙어 앉아 도란거리며 무엇인가를 맛나게 먹고 있는 참이었다. 대광주리에 담긴 것은 포도였다. 여자는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포도 송이를 한 손에 들고 있었는데, 이따금 한 알씩 따서는 청년의 입에 넣어주곤 하는 참이었다. 그때마다 청년은 붕어처럼 입을 삐죽이 내밀어 그것을 받아 먹곤 했다. 우리들 눈에는 그 모습이 한없이 바보스러워 보이는데도, 그것이 뭐가 그리 재미있고 신이 나는지 두 사람은 연신 까르르르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여자 쪽이 먼저였다. 포도알을 따서 우물거리던 그녀는 돌연 입 안에 담긴 포도 씨앗들을 푸풋, 소리를 내며 청년의 얼굴에 대고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청년 역시 그 짓을 똑같이 여자에게 되풀이했다. 서로 번갈아가며 상대편의 얼굴에 퉤퉤 포도씨를 내뱉기도 하고, 그걸 피하는 시늉을 하면서 그들은 좋아라고 마구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이랬답니다. 씨 귀한 줄 모르고 퉤퉤 뱉어가며 장난을 쳤던 이들의 사랑이 어찌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꼭 한번 읽어들 보셔요. 소설 말고도 드라마에서도 포도씨가 사랑의 소품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낸 것이 있는데요. 십여 년 전 MBC에서 방영되었던 <네 멋대로 해라>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이나영과 양동근. 자신을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양동근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면서 창문에 양동근의 걸음걸음마다에 포도씨를 붙여놓는 장면은 그 드라마의 명장면 중의 명장면입니다(요기 가시면 볼 수 있어요. 움짤이긴 하지만;;).
결론은 포도는 사랑의 과일이라는 거(응?), 그래서 제이에게도 이 사랑의 과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꼭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거, 저희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도 포도 드시고 다같이 “살찌고(응?) 튼튼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라고만 하면서 그냥 끝내기는 좀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같이 노래나 하나 들을까요? 도미의 <청포도 사랑>.
_편집부 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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