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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본초서당

소화를 돕는 식혜, 임신했을 땐 조심하세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2. 14.

강력한 목 기운을 담은 맥아
 

풍미화(감이당 대중지성)


엿기름을 사놓은 지 한달 만에 드디어 식혜를 만들기는 했다. 지난 서당글 말미에 다음 편에서는 식혜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한 사발 얻어먹고 싶어하는 아무개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식혜 사먹는 재미로 목욕탕에 가는 딸을 떠올리며, 난 정말 공들여 재료를 준비하고 정통 레시피를 준수하며 식혜를 만들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 ㅠ.ㅠ 고두밥까지 훌륭하게 되어서 다 좋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엿기름 물 위로 밥알이 수백 개가 떠오른 것. 전기 밥솥이 없어서 두툼한 도자기로 만들어진 슬로우 쿠커의 온도를 올려서 따뜻해진 다음에 보온으로 해두고 잤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다섯 시간도 못자고 일어나서 확인을 했는데, 식혜물이 그 꼴이 되었던 것이다. 


정통 레시피에 의하면 밥알이 한 두개 정도 떠오를 때, 밥알을 건져내고 식혜물에 설탕과 생강을 넣고 끓여서 식혀야한다. 살짝 찍어서 맛을 보니 막걸리가 되기 직전의 발효 상태에 이른 듯 했다. 한 시간만 더 지났더라면 식초 수준까지 갔을 것이다. 에구구... 아까운 내 식혜. 암튼, 살짝 시큼하다고 해서 먹을 것을 버리지는 못하겠고, 그냥 진행해서 약간 시큼털털한 식혜가 완성되었다. 남 주긴 머시기 해서 내가 다 먹는 중이다. 다음엔 꼭 성공해서 서당 멤버들한테 자랑스럽게 한 사발씩 돌려야지. ^^;



위 아래로 공간을 찢는 힘찬 기운


식혜를 만드는 재료로 제일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 엿기름이다. 한방에서는 엿기름을 맥아(麥芽)라고 한다. 껍질이 붙은 보리를 겉보리라고 하는데, 이 겉보리에 물을 붓고 적당한 온도에서 3일 정도 발아시킨 다음에 잽싸게 햇빛에 말린 것이 엿기름이다. 엿기름을 적당히 두드려서 껍질만 으깨지게 한 것도 있고 너무 갈아서 가루처럼  만든 것도 있는데, 식혜를 만들 때는 살짝 부스러진 것이 물에 불린 다음에 체에 받히기 좋다.


엿기름의 재료가 되는 맥아입니다.


발아 현미도 엿기름처럼 싹을 살짝 틔운 먹거리다. 그냥 현미는 껍질이 두꺼워서 오래 씹어야 하고 먹고 난 다음에 소화되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런데 발아 현미로 밥을 지어먹으면 현미보다 훨씬 부드럽고 위에도 부담이 적다. 종자는 발아하면서 아밀라아제라는 효소가 만들어진다. 체내에서는 이런 효소의 작용으로 곡식의 전분을 분해하는 공정이 쉬워진다. 발아 현미나 맥아는 종자가 저장형에서 발아형으로 변신한 예이다. 현미나 보리 같은 종자를 발아시켜 먹게 되면 몸에 들어온 단단한 종자를 불리고 쪼개는 과정이 생략된다. 그래서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었던 에너지를 좀 더 쉽게 우리 몸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발아라는 단계를 거친 종자는 이미 그속에 뻗어나가는 木기운을 한껏 포함하고 있어서 그 자체가 소화의 과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 물에 대한 글에서 水기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사방에서 압력을 받아 하나의 점으로 뭉치고 다져진 단계가 水기운이라고 하였다. 고압을 받는 상태의 종자가 따뜻한 기운과 적당한 습도에 노출이 되면 일점으로 뭉쳐졌던 水기운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위 아래로 종자 자체의 공간을 찢고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밖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木기운이다. 첫 단계는 위로 하늘을 향해 작은 싹을 내밀고, 아래로 땅속을 향해 연한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종자 스스로의 몸을 부풀리고 찢어내면서 다른 차원의 자신으로 변신해가는 힘이 木기운인 것이다. 이 기운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공간마저 지배하기 시작해서 위로 아래로 자신의 기운을 확장시켜 나간다. 겨울의 한기 아래 움츠렸던 봄이 내는 기운이 바로 木기운이다. 맥아는 자고 일어나면 세상의 빛깔을 변화시키는 이러한 팽창하는 봄기운을 지니고 우리 몸에서 작용한다.



삭히기 전문이예요

『동의보감』에 맥아에 대한 글이 있다. 소화와 유산에 관한 내용이다.


성질은 약간 덥고, 맛은 달면서 짜며, 독은 없다. 소화가 잘 되게 하여 오랜 체기를 없애고, 명치 아래가 불러 오르면서 그득한 것을 치료하며, 속을 따뜻하게 하고 기를 내려서 입맛이 나게 하고, 곽란을 멎게 하며, 징결을 부수고, 해산을 빨리하게 하고 유산하게 해준다. 오랫동안 먹으면 신기(腎氣)를 소모시키기 때문에 많이 먹어서는 안된다.






맥아의 단맛은 비위로 들어가서 소화작용을 돕는다. 먹은 음식물을 위산으로 삭혀서 몸에 흡수되기 좋게 죽의 형태로 만들어 주는 것이 소화의 대표적인 과정이 아니던가? 식혜에 둥둥 떠있는 밥알의 모양을 보면 삭는다는 의미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옹골찼던 밥알이 따끈한 엿기름 물에 몇 시간 잠기고 나면, 삶아 늘어진 밤벌레(!) 마냥 힘없이 엿기름물 바닥에 가라앉는 모양이라니. ㅠ.ㅠ (이거 뭐, 식혜도 망친 주제에 밥알을 밤벌레에 비유하고 있으니, 맥아를 먹으라는 말인지 뭔지... 너무 심술 궂은 듯. ㅋㅋ) 맥아가 들어가면 삭히는 작용에 삭히는 작용을 더한 셈이니, 소화가 잘 되게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말이다. 밥을 살짝 삭혀서 식혜도 만들고, 만든 식혜물을 졸여서 조청도 만들고, 더 농축시키면 엿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맥아를 이용한 이러한 음식들은 위가 약한 사람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오랜 체기를 없앤다는 말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록 소화되지 않은 것이 뭉쳐서 병이 된 것을 낫게 한다는 뜻이다. 오래된 소화불량이라면 이미 비위의 기능이 떨어진 상태에 이른 경우가 많다. 비위의 기운이 약해서 뭉쳐진 기운을 흩어내지 못할 때 맥아가 들어가면 위에서 설명한 木기운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위 아래로 찢고 뻗어나가는 맥아의 초강력 울트라 파워가 오래된 체기를 날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흩어버린 기운은 어디로 가나? 빠져 나갈 곳으로 빠져나가도록 해줘야 한다. 소화된 음식물의 뒷처리된 기운이 입으로 나오면 기가 상역(내려가야 할 기가 거꾸로 올라와버림)한 꼴이 되어, 아주 고약한 냄새가 트림이라는 형태로 나오게 된다. 맥아는 후처리 기운을 위가 아닌 아래로 나오게 하는 역할도 잘 한다. 일명, 보리 방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그 씨~원함. ^^;; 그렇게 명치 아래에 가득찼던 뭉친 기운이 갈가리 흩어져서 아래로 내려가 주면 다시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뭉친 것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맥아의 힘, 놀랍습니다! ^^


그런데 맥아의 木기운이 너무 강력하니 조심할 일이 있다. “해산을 빨리하게 하고 유산하게 해준다”는 말이 그것이다.



뭉친 기를 뚫어서 내려줘요

맥아는 木기운으로, 뭉친 것을 뚫고 흩어서 기화되도록 돕는 기운이 강하다. 그런데 이 작용이 초기 임산부에게는 위험한 변수로 작용하여 유산을 하게 할 수도 있다. 맥아의 오랜 체기를 없애는 강한 작용이 태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임신 초기의 태아는 피가 뭉쳐져서 만들어진 생명체로 어혈이나 담음과 비슷한 상태라고 한다. 임신시의 맥이 담음이 있을 때의 맥과 비슷한 이유도 초기 태아가 몸에서 작용하는 형태가 담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극에서 보면 의원이 여인의 손목을 묶은 실을 붙잡고 임신 여부를 가리는 장면이 간혹 있다. 임신한 여인의 맥은 물방울이 또로록똑똑 흐르는 것처럼 맥 안에 또 다른 약한 맥이 간헐적으로 흐른다고 한다. 임신을 하면 사람이 둘이니 엄마의 맥 안에 아기의 약한 맥이 함께 흐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음이 생기면 뭉쳐진 담음이 몸안에 여기저기 있어서 맥의 소통을 매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니 아기를 가진 것 처럼 맥이 또로록하며 끊어지듯 이어지게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맥아를 많이 섭취하면 맥아가 태아를 뭔가 뭉쳐진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뜷고 헤쳐서 아래로 내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산하게 해준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예전에는 유산을 하기 위한 약으로 맥아를 사용했던 것 같다. 반면에 예정일을 지나도록 해산이 늦어지는 임산부에게는 해산을 재촉하는 역할도 맥아가 했던 것이다.


"마마 임신을 경하드리옵니다~" 그런데, 이때 맥아를 먹으면 태아에게 위험한 이유는, 본문에서 만나보세요!


맥아가 젖을 말려주는 이유도 같은 설명이 될 것이다. 여성의 몸이라도 젖은 평소엔 없는 물질이다. 해산한 후에만 생기는 젖은 맥아의 입장에서는 담음이나 오래된 체기와 같은 이물질이다. 수유기가 끝나고 젖을 말려야할 시기가 되면 전에는 식혜물을 마셨다고 한다. 요즘도 젖 말리는 방법으로 식혜가 애용된다. 출산 후에 바로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엄마들은 아기가 젖에 맛을 들이기 전에 젖말리는 약을 먹고 급하게 말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동안 수유를 하고 난 다음에 아기가 천천히 젖을 떼도록 하기 위해서는 젖의 양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식혜를 이용하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 된다. 이렇게 시기를 적절하게 잘 맞추면 임신과 출산에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맥아라는 약재다.

아이랑 목욕탕에 갈 때마다 매번 구운 계란과 식혜를 사 먹는다. 너무나 달고 시원한 식혜를 마시면서 얼마나 설탕을 넣었으면 이렇게 달까 생각해봤는데, 식혜 만들기에 실패한 지금 생각해보니 시중에서 판매하는 식혜에는 설탕을 삽으로 퍼 넣었을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냄비 하나에 가득 식혜물을 끓일 때 겨우 유기농 원당 3숫가락을 넣으면서도 벌벌 떠는 내가 혀에 붙는 달고단 식혜 맛을 흉내내려고 했던 것은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예전에는 설탕 없이 단맛을 내야했으니 얼마나 많은 엿기름과 밥이 들어가야 맛나는 식혜가 되었던 것일까? 콜라 수준의 단맛에 길이 든 요즘, 겉모양만 흉내낸 전통 음료를 마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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