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물, 죽음의 물
풍미화(감이당 대중지성)
지금은 물을 사먹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벌써 4반세기가 되어가는 구나 ㅜ.ㅠ)만 하더라도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짓처럼 생각이 되었다. 물을 왜 사먹어? 물은 수도꼭지 비틀면 나오는 건데…. 대학에 들어가보니 서울 애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매점에서 물이 담긴 작은 페트병을 사서 병나발을 불고 다녔다. 학교에 물 먹을 곳이라고는 구내식당 밖에 없으니 각자가 알아서 들고 다니지 않으면 곤란했다. 나는 물을 사먹는다는 행위가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져서 차마 매점에 가서 물 달라는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한 1년은 물을 못 사먹고 보리차를 끓여서 싸서 다녔다. 그런 불편함을 견디면서 1년 동안 다른 애들을 보니 사먹는 물을 먹고도 별 일 없이 잘 사는 것 같아서 나도 용기를 내어 물을 사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을 사러 갔더니 판매하는 물이 2~3종류라 어느 것을 사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물부터 시작해서 서로 다른 곳에서 생산되는 물을 마셔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물에도 맛이 있을까 싶었는데 조금씩 맛이 다른 것을 알았다. 친구들과 이 물이 좋다 저 물이 좋다 떠들면서 물병으로 건배를 하고 홀짝거렸다. 그렇게 사먹는 물에 익숙해지면서 더는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물도 다 같은 물이 아니라는 생각. 물을 차별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ㅡ영화 <스탠리의 도시락>. 과거, 점심시간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던 친구들은 수돗물로 물을 채우곤 했다.
물을 사먹으면서 물의 질을 따지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물을 사먹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물의 용량이 같으면 가격도 같았다. 지금은 어디에서 나온 물이냐에 따라서 같은 용량의 물이라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물이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이 되었으니 물건의 품질을 가리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이 물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즉 물의 출생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물이 출생한 장소가 얼마나 깨끗한 곳이며, 그 깨끗함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물의 가격이 오르내린다. 사람의 손길과 멀면 멀수록 물이 나오는 장소는 더 깨끗한 곳이 되고, 그곳의 물은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 된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물이 탄생한 장소의 깨끗함을 마시는 기분으로 돈을 지불한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의 더럽고 혼탁함을 벗어나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자기 몸에 쏟아붓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래서 개발된 내륙의 어느 산골보다는 개발이 덜 된 섬에서 나온 물을 선호하고, 태고의 물이라는 빙하나 만년설 녹은 물이 더 좋고, 심해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면 더욱 좋은 물이라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물이 생명을 살리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생명이 꺼져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해보는 것이 뭘까?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게 해보는 것이다. 약도 뭣도 다 필요없어진 시점에서 물을 입에 흘려 넣어 주는 것으로, 산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은 그나마 마지막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위안을 주고 받게 된다. 인간의 무의식에 흐르는 ‘물의 생명성’에 대한 ‘공통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심’ 또한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다. 물에 관련된 이야기 두 개를 살펴보면서 물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상반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
바리데기와 생명의 물
먼 옛날, 오구대왕이란 왕에게 자식복이 줄줄이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추 하나 달고 나오는 자식이 없어서 아비는 점차 열이 치받는 중이었다. 럭키 세븐이라는 일곱째 자식마저 해산물(조개-딸 ^^;)로 태어나자 오구대왕의 희망은 절망의 불화산이 되어 터져버리고 말았다. 저거~ 내다 버려!! 그렇게 버려진 바리데기는 자식 없는 노부부의 손에 흘러들어가서 무사히 자라났다. 그런데 자식 버린 죄로 오구대왕이 병에 걸리자, 처방은 나왔는데 약을 구할 사람이 없는 게 문제가 되었다. 서천서역국에 있는 약수를 구해오라는데 가겠다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딸자식은 다 소용없다는 말이 나왔나보다~. 루쉰은 아버지 병환에 쓰일 약을 구하기 위해서 교미 중에 잡힌 귀뚜라미 한 쌍의 3년차 시신까지 찾아 다녔다는데 ㅠ.ㅜ)
그런데, 바리데기가 친부모 만난 기쁨에 잠시 정신줄을 놓는 바람에 약수를 구해오겠다는 어림없는 약속을 덜컥 뱉어 내고 만다. 바리데기는 팔자에 없는 남장까지 하고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저승이라고 불리는 서천서역국에 이르게 되었는데, 거기엔 무장승이라는 떡대가 버티고 있었다. 도깨비 같은 무장승 밑에서 머슴살이 몇 년을 견디고 억지 결혼으로 아들까지 일곱이나 낳아주고는 겨우 물을 가져가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렇게 바리데기의 임무는 성공하여 죽은 부모도 살려내고, 그간의 능력을 인정 받아 저승길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효녀 바리데기가 쌩(!)고생해서 생명수를 구하는 내용은 소설, 민화, 애니메이션 등등 널리 알려져 있다(^^;).
바리데기가 가져온 생명수는 그녀가 서천서역국에서 매일 길러 먹고, 그릇 씻고, 빨래 하던 그 우물물이었다. 이곳에서는 없는 그 귀한 것이 그곳에서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흔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여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그곳에서 나는 것은 귀한 것이 된다. 생명을 살리는 힘은 그것을 얻기 위해 들여야 했던 고난의 정도와 비례한다. 죽음을 넘나드는 어려운 과정을 이겨낸 힘이 단순한 우물물을 죽은 사람도 살리는 생명의 물로 만드는 것이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사람에게 쓰이는 물 한모금에도 얼마나 절실한 마음이 담겨야 물이 약이 되는 지를 보여준다.
새벽에 처음 길어낸 물을 장독 위에 한사발 올려 두고 객지 나간 가족의 안녕과 성공을 빌던 어머니들의 정성이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그 새벽물이 정한수(井寒水)다. 이 물이 새벽이 아닌 대낮이나 저녁에 뜬 물과 뭐가 그렇게 다르겠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한다. 그냥 정성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 다른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이 생명을 순환시키는 동력으로써의 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불의 힘이다. 즉, 물과 불이 함께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정기신(精氣神)의 관계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氣가 만물을 움직이는 에너지이자 만물의 구성 재료라고 할 때, 氣를 음적인 상태로 응축시킨 것이 精이고 氣의 양적인 상태가 가장 잘 발현된 상태를 神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음은 뭉쳐져서 무겁고 형태가 있는 것이며, 양은 흩어져서 가볍고 형태가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오늘에서 내일로 바뀌는 자정이라는 시각에, 땅의 精과 하늘의 神이 만나서 靈을 이룬다고 한다. 음의 대표격인 물이 하늘의 神과 만나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품게 되는 시간인 자정과 가장 가까운 때가 바로 첫닭이 우는 새벽 시간인 것이다. 물은 그 시간의 하늘 기운을 머금는다고 한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에 더 가까울수록 더 귀하고 더 힘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우리에게 힘을 갖고 있다. 자연의 시간과 공간이 배치해 놓은 음양의 순수한 힘에 사람의 정성을 보태어 보통의 물을 특별한 힘을 지닌 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람이 우주적 힘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소박하게는 이런 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해적들과 죽음의 물
조니 뎁이 잭이라는 해적 선장으로 나오는 캐리비안의 해적들이란 시리즈 영화는 많이들 보셨을 것이다. 나와 딸 아이는 조니 뎁을 좋아해서 멀미나게 자주 봤던 영화다. 이 영화의 4편에는 낯선 조류라는 부제목이 붙어 있다. 과연 낯선 조류를 따라 흘러가면 어떤 일과 만나게 될 것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자.
ㅡ영화 <캐리비언의 해적4 : 낯선 조류>.
잭은 젊음의 샘이라는 곳을 찾아야하는 처지가 된다. 어쩌다보니 젊음의 샘을 탐내는 여러 세력들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던 것이다. 샘을 찾으려는 세력은 크게 셋이다. 샘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영국과 이교도의 사원을 파괴함으로써 하느님의 영토를 넓히고 싶은 스페인,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생이 목적인 검은 수염이란 강력한 해적이 그들이다. 잭은 이중에 검은 수염에게 잡혀 있었다. 그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샘을 향해 나아가는 바다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그곳은 인어의 바다이다. 인어들은 아름다운 얼굴과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한 뒤에 그들을 사냥하는 무서운 존재들이지만, 그곳을 돌아서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젊음의 샘물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인어의 눈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붙잡힌 인어와 훈남 선교사와의 닭살 돋는 신파가 한줄기 엮이는 것을 이용해서 인어의 눈물을 수중에 넣은 잭의 일행이 제일 먼저 샘에 도착한다.
하지만 젊음의 샘은 연이어 도착한 영국과 스페인의 격전장이 되어버린다. 전투의 와중에 독이 묻은 칼에 찔려 죽어가던 검은 수염과 그의 딸이 샘물을 마시게 되었다. 잭이 내민 두 개의 은잔 중에 한 곳에는 인어의 눈물이 섞인 샘물이 있고, 다른 한 곳에는 샘물만 들어 있었다. 인어의 눈물이 든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냥 샘물만 마신 상대방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젊음의 샘에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검은 수염은 딸에게 자기를 살려달라면서 인어의 눈물을 선택했고, 딸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그냥 샘물을 마셨다. 결과는…? 아버지인 검은 수염은 터져나온 샘물의 공격으로 그 자리에서 해골이 되었고, 딸은 상처까지 낫고 멀쩡했다. 이유는…? 잭이 인어의 눈물이 든 잔과 그렇지 않은 잔을 일부러 바꿔서 내밀었기 때문이다. 잭은 검은 수염이 평소에 잔인한데다 4가지도 없는 까닭에 자신을 위해 자식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 영화의 주된 무대는 바다라는 거대한 물이다.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샘물도 물이고, 꼭 필요한 소품인 인어의 눈물도 역시 물이다. 물은 해적들의 삶터이자 묘지이다. 인어들에게 물은 삶 그 자체이다. 해적은 물을 토대로 물위에 떠있는 삶을 살아가지만, 인어는 물 속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는다. 따라서 인어의 눈물이라는 것은 물에서 생산되는 물의 정수(精隨)라고 할 수 있다. 즉, 물 중에 물이라는 말이다. 물의 정수가 들어간 샘물을 마시면 상대방의 젊음을 빼앗아서 내가 누릴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젊음의 샘은 생명의 물이 아니라 죽음의 물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이어질뿐 아니라 최종적인 선택의 순간에도 반드시 상대방의 죽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물은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연장해준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生死를 가르는 레테강을 건너는 장면. 그리스 신들은 종종 '레테 강을 걸고' 맹세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상 반드시 맹세를 지켜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강물로 상상하곤 했다. 황천강과 레테강은 여러 종교나 신화, 민속을 통해 전해지는 많은 죽음의 강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강이다. 왜 죽으면 강을 건너서 저승으로 간다고 생각했을까? 깊고 넓은 강을 배도 없이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물을 보면 왠지 빠져죽을 것 같아서 가까이 가기가 두렵다고 한다. 깊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바닥을 확인할 수 없는 탁한 물이라면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그 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알 수 없는 뭔가를 만나게 될 두려움은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해도 몸을 오그라들게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바닥을 볼 수 있을 만큼 맑으면서 깊지 않은 물을 보면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그고 싶은 것이 또한 사람의 마음이다. 물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똑같은 물이 죽음과 연결되기도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물이 생명의 필수 조건이라고는 해도,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물 앞에서는 생명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영화에 나온 젊음의 샘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댓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 이상의 삶을 욕심내는 인간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소개한다.
그 샘은 사람을 시험해. 무엇보다 사람은 죽는 날을 모르는 게 좋아. 삶의 신비를 만끽하며 후회없이 살면 되는 거지. 그리고 난 어차피 영원히 살거야. 젊음의 샘을 발견한 사람으로…. 난 언제 죽을지 몰라도 해적의 인생이지.
물(水)도 물(物)이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物을 대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物이라도 사람에게 이롭게 쓰이기도 하고, 해롭게 쓰이기도 한다. 약도 과용하면 독이 되듯이, 좋은 물에 대한 욕심도 지나치면 독극물을 욕심내는 꼴이 된다. 비싼 물이 더 귀한 물일지는 모르지만, 꼭 더 좋은 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옛 사람들은 별별 희안한 물을 약수로 사용하였다.『동의보감』에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흥미롭고 다양한 물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하다. 물이 생겨난 곳에 따라서 붙인 이름도 매우 이채롭다. 장거리 이동이 어렵고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 일상에서 어떻게 생명을 살리는 약으로 물을 활용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글이 늘어난다. 물에 대해서 짧게 한 편을 쓰려던 계획이 두 편에서 세 편으로 불고 있어서 걱정이다. 내 사주에 식상이 절반이 넘는데, 이게 다 물이다. 물이 많으면 말도 많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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