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저장된 에너지
풍미화(감이당 대중지성)
『동의 보감』「탕액편」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약재가 바로 물(水)이다. “선천(先天)이 처음 수(水)를 생(生)하였기 때문에 수부(水部)를 가장 앞머리에 두었다. 모두 33종이다.”
33 가지 물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흥미로우니 즐감하시라.
한천수(寒泉水; 찬 샘물),
국화수(菊花水; 국화 밑에서 나는 물),
납설수(臘雪水; 섣달 납향 즈음에 온 눈 목은 물),
춘우수(春雨水; 정월에 처음 내린 빗물),
추로수(秋露水; 가을 이슬물),
동상(冬霜; 겨울철에 내린 서리),
박(雹; 우박),
하빙(夏氷; 여름철의 얼음),
방제수(方諸水; 밝은 달빛에 조개껍질을 두고 받은 물),
반천하수(半天河水; 큰 나무 구멍과 대나무 울타리 위에 괸 빗물),
옥류수(屋溜水; 볏짚 지붕에서 흘러 내린 물),
모옥누수(茅屋漏水; 띠풀로 이은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
옥정수(玉井水; 옥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샘물),
벽해수(碧海水; 짠 바닷물),
천리수(千里水; 멀리서 흘러온 강물),
감란수(甘爛水; 많이 내동댕이쳐서 거품이 생긴 물),
역류수(逆流水; 거슬러 돌아 흐르는 물),
순류수(順流水; 순하게 흐르는 물),
급류수(急流水; 여울물),
온천수(溫泉水),
냉천수(冷泉水; 맛이 떫고 찬 물),
장수(漿水; 좁쌀죽의 웃물),
지장수(地漿水; 황톳물),
무근수(無根水; 산골에 고인 빗물),
생숙탕(生熟湯; 끓인 물에 찬 물을 탄 것),
열탕(熱湯; 뜨겁게 끓인 물),
마비탕(麻沸湯; 생삼을 삶은 물),
조사탕(繰絲湯; 누에고치를 삶은 물),
증기수(甑氣水; 밥을 찌는 시루 뚜껑에 맺힌 물),
동기상한(銅器上汗; 구리 그릇에 맺힌 물),
취탕(炊湯; 묵은 숭늉),
육천기(六天氣; 동東서西남南북北천天지地 여섯 방향의 기운
33종의 물이름 중에는 온천이나 정화수 같이 익숙한 이름의 물도 있고, 반천하수나 모옥누수 같이 생전 처음 듣는 이름도 많다. 위에 열거한 물들은 각각 성분이 다르고 약효도 다르다. 대개는 각각의 물이 가진 특별한 성질을 이용하여 약효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다. 예를 들어, 감란수 같은 경우는 만들어 쓰는 물이다. 물을 1말 정도 큰 동이에 부은 다음 바가지로 그 물을 퍼 올렸다가 쏟고 퍼 올렸다가 쏟기를 수백 번 하여 물 위에 구슬 같은 거품 방울이 수천 개 정도 생길 때까지 해서 그 거품물을 떠서 쓰는 것이다. 이 물은 성질이 따뜻하며 부드럽기 때문에 몸이 추위에 상해서 아플 때 치료하는 약을 달이는 데 쓴다고 한다. 역류수는 거슬러 흐르는 성질이 있어서 담음을 토하게 하는 약에 쓰고, 순류수는 성질이 순하고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아랫배나 허리, 무릎의 병을 치료하거나 대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약을 달이는 데도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육천기는 물이라기 보다는 기운인데, 이것을 물의 종류에 넣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
발자국에 고인 물
친구네가 20여 년 전에 집을 샀을 때의 일이다. 서울 중심부에 지은 지 수십 년이 넘은 한옥을 사서 목수를 불러 손질을 하느라고 부분적으로 집을 헐어냈다. 그러다보니 집을 지을 때 들어갔던 오래된 황토가 떨어져 내린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이 기웃기웃 거리더니 슬금슬금 들어와서는 흙 좀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더란다. 친구 어머니는 어차피 떨어져 내린 흙은 버릴 참이라 가져가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왜들 흙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더니, 동네 사람들 하는 말이 “요즘 깨끗한 황토 구하기가 어려운데, 오래된 집을 수리할 때 나오는 흙이 그나마 제일 깨끗하다.”고 하더란다.
사람들은 황토를 가져가서 뭘 하는 걸까? 물을 만든다. 수돗물을 옹기 항아리에 넣고 황토를 풀어 휘저은 다음 가라앉기를 기다려서 윗물을 떠내면 그 물이 바로 지장수이다. 『동의보감』 33종의 물에 당당히 들어가는 물이다. 황토가 없으면 그저 옹기 항아리에 넣고 수돗물의 독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서 먹기라도 해야 안심할 수 있는 세월이 되었던 것이다. 깨끗한 황토를 구하기가 20년 전에도 어려웠는데, 지금에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요즘은 그저 어딜 가나 정수기를 쓰거나 생수를 사먹는 형편이다.
이렇게 붉은 물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된다고!! 설마~ 과연? 정말?^^
집에서 만들어 쓰던 옹기항아리 지장수는 그야말로 도시에서 응용할 수 있는 약식 지장수이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진짜 지장수는 항아리가 아니라 제대로 생겨먹은 땅이 필요하다. 누런 흙이 있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물을 붓고 흐리게 휘저어 쓰는 물이 지장수였던 것이다. 이 물의 효능으로 대표적인 것은 여러 가지 중독을 풀어주는 것이다. 또한, 더위에 쓰러져 정신이 혼미할 때나 갈증이 심한 증상에도 지장수를 마신다고 한다. 지장수가 중독을 해결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한다.
옛날 어느 마을에, 동네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깊은 산으로 버섯을 따러 몰려갔더란다. 버섯도 따고 야유회도 즐기면서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처음 보는 버섯을 따서 자랑을 했다. 냄새도 맡고 혀끝에 대보면서 독물 검사를 해본 뒤에 쫄깃하게 구워서 동네 사람 여럿이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그 다음 얘기는 뻔한 순서대로, 얼마 뒤에 버섯을 먹은 사람들이 아픈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러져서는 미친 듯이 웃는 것이 아닌가? 웃다가 울다가 그야말로 어디에 털이 날 지경으로 웃는데, 숨도 못쉬고 웃는 꼴이 아무래도 큰 병에 걸린 것이 확실했다. 마침 비가 쏟아지면서 날도 어둑해져서 성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을 등에 업고 급히 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낯선 산길에 해가 가리어져서 방향을 잡지 못해 한동안 산을 헤매게 되었다. 그러다가 작은 암자를 발견하고 그곳의 스님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불시에 들이닥친 단체 환자들을 앞에 두고 스님이 하신 말씀. “자네들이 밟고 지나온 길에 발자국이 패였을 것이네. 그 발자국에 고여 있는 물을 모아오도록 하게나.” 그래서, 그물을 마시고 아픈 사람들이 금방 나아서 무사히 귀가를 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스님이 가져오라고 했던 물은 다름 아닌 지장수이다. 발자국에 고인 빗물은 비가 그치면 맑게 가라앉는다. 그것이 원조 지장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곳의 버섯을 먹고 중독이 되었으니 그 독을 풀어줄 약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 이어진 스님의 말씀이었다.
『동의보감』에는 지장수가 독버섯에 중독된 것을 풀어준다고 하고, “단풍나무버섯을 먹으면 계속 웃다가 죽는데, 이런 때는 오직 지장수를 마셔야 낫지 다른 약으로는 구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야기 속 동네 사람들은 나들이를 겸해서 나온 탓에 마음이 풀어져서 처음 보는 버섯을 용감하게 먹는 무모한 짓을 했는데, 마침 그 버섯이 단풍나무버섯이었던 모양이다. 요즘은 단풍나무버섯이 멸종을 했는지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찾을 수가 없다. 웃다가 죽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험한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좀 아쉽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버섯을 먹고 웃다가웃다가 진짜로 죽을 것 같으면 얼른 지장수 한 사발 퍼마시면 다시 살 수도 있을 텐데.^^
나도 지장수 한 사발 해보고 싶다. 맨날 삼다수만 먹었는데... 그건 없네?^^
지장수(地奬水)는 말 그대로 ‘땅이 권하여 힘쓰게 해주는 물’이다. 즉, 땅의 힘을 빌린 물이라는 뜻이다. 땅은 만물이 기대고 있는 곳이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덮어주는 곳이다. 오염된 것을 받아서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해주는 힘이 여기에 있다. 땅 없이는 물이 정화하는 힘을 가졌다고 말할 수가 없다. 물은 그 자체로 정화하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게서 그 힘을 나눠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장수는 땅이 물에게 준 정화의 능력을 가장 많이 가진 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압축된 발산력
앞에서 육천기(六天氣)를 어째서 물의 종류로 포함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천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든 기운은 물이 흩어진 것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물은 예로부터 우주론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서양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신화적인 신이 아니라 자연적ㆍ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양에서도 천지가 생기면서 가장 먼저 생긴 것이 물이라고 본다. 오행론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숫자 1은 물을 뜻하는 것이다. 불은 그 다음이다.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져 나올 때도 양보다 음이 먼저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양음이라고 하지 않고 음양이라고 한다. 생명은 음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육천기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이것을 마시면 배가 고프지 않고 오래 살며 얼굴이 고와진다.『능양자명경(陵陽子明經)』에서는 “봄에는 조하(朝霞)를 마시는데, 해뜰 무렵에 동쪽을 향해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가을에는 비천(飛泉)을 마시는데, 해질 무렵에 서쪽을 향해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겨울에는 항해(沆瀣)를 마시는데, 밤중에 북쪽을 향하고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여름에는 정양(正陽)을 마시는데, 해가 중천에 올 때 남쪽을 향해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여기에 천현(天玄)과 지황(地黃)의 기를 합하여 육기(六氣)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섯 하늘의 기운이라는 뜻의 ‘육천기(六天氣)’는 각 계절마다, 각 계절의 대표적인 시간에 각각의 계절을 대표하는 방향의 하늘을 향해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물론 머리 위의 하늘과 발 아래 땅의 기운도 함께 포함해서 말이다. 계절이 주는 시공간의 기운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프지 않고 오래 살며 얼굴마저 고와진다는데, 마침 그 시간에 딴 볼일이 많은 우리들은 이렇게 맨날 배가 고프고 날마다 늙어 가는 것이다. ㅠ.ㅜ 간단히 말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실 시간을 못 내서 이렇게 산다.(아~, 우리 잠시 산다는 게 뭔지에 대해 1분 동안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 창밖의 하늘을 길~게 쳐…다 보면서…….)
아~~ 예뻐라^^ 너는 양생의 비법을 일찌감치 터득했구나 ㅋㅋ 하늘의 기운을 마시기!
수(水)는 오행론에서 계절로는 겨울이요, 빛깔로는 검은색이다. 계절이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지만, 다시 봄은 오고 겨울도 다시 돌아온다. 봄에 촉발한 생명은 여름에 활짝 피어나며 절정에 이르고는, 가을이 시작되면 불요불급한 것을 떨어내고 다음 해를 위한 씨앗을 만든다. 겨울이 되면 씨앗은 땅속에 묻힌 채로 잠을 자면서 다음 봄을 기다린다. 여름이 무한히 발산하며 나아가는 힘이라면, 가을은 끝없이 발산되어 소멸해버릴 힘을 거두어들이는 힘이다. 가을이 거두지 않는다면 여름은 단 한번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다음을 기약하는 시작이다. 그러나 가을의 힘으로는 봄의 촉발을 이끌기가 어렵다. 그저 가두기만 하는 정도의 힘으로는 생명의 탄생이라는 고통스런 과정을 감내할 힘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겨울이다. 겨울은 가을이 거둔, 팽창하는 에너지를 압축하는 일을 한다. 씨앗은 가을의 힘으로 팽창하는 에너지를 가둔 곳이다. 씨앗은 겨울 동안 땅속에 묻힌 채로 땅의 압력을 받다가 봄이 되면 어느 한 곳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된다. 그렇게 발아하기 직전까지 높은 압력을 줌으로써 생명을 땅위에 올려 보내는 로켓발사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겨울이다.
물은 이러한 겨울을 상징하는 것으로 수렴된 것을 더욱 수렴시키면서, 모든 것을 하나의 점으로 만들려는 속성을 가진다. 우주 빅뱅설에서는 우주가 초고밀도의 한 점으로부터 폭발했다고 하는데, 겨울이 가진 속성이 빅뱅 직전의 한 점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만물을 하나로 모아 압축하고 저장하려는 힘이 물의 힘이다. 지금은 검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 파렴치한 전쟁도 불사하는 세상이다. 동물의 에너지가 땅속에 묻혀 압축된 결과 만들어진 것이 석유다. 식물의 에너지가 땅속에 묻혀 압축된 결과는 석탄이다. 검은 물과 검은 돌덩어리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가지고 인류가 현재의 문명을 누리는 셈이다.
외곽으로 난 길을 지나다보면 드물게 가스를 운반하는 트럭을 보게 된다. 트럭은 앞뒤가 둥근 형태의 대형 탱크를 싣고 있다.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LNG선도 갑판 위에 둥근 탱크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왜 둥근 형태의 탱크가 필요한가? 액체를 싣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둥근 통 안에 들어 있는 액체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힘과 둥근 통에 부딪혀 다시 안으로 모이는 힘이 균형을 이룬다. 가스라고 하면 집에서 매일 사용하는 천연가스를 떠올린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주구장창 사용하는 가스를 배로 운반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탱크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액체가 아니라 기체라고 생각을 해보라. 운반비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가스요금~ㅠㅜ. 그래서 천연가스를 대기압에서 영하 162℃로 압축해서 600배로 용적을 줄인다. 이것이 액화가스다. 이 정도 압축해줘야 나 같은 서민도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튀어 나가려는 기체의 발산력을, 쇠로 만든 통에 붙잡아 넣고, 고밀도로 액화시켜 운반한 뒤에, 기체 에너지로 다시 사용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거쳐 봄의 힘이 폭발하는 순서와 같지 않은가?
물에 대해서 쓰다 보니 압축되었던 무엇이 튀어 나오듯이 말이 너무 길어졌다. 입춘 전에는 끝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삐져나오려는 것들을 꾹꾹 밟고 잘라낸다. 다음에는 물은 물인데, 단물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봄의 에너지가 삐죽 튀어나온 맥아를 사용한 식혜~~. 넘넘 맛나겠지?
가슴이 뻥 뚫리는 식혜, 본초팀한테 말하면 한 잔 주려나 ㅋㅋ 먹고 싶다~~
'출발! 인문의역학! ▽ > 본초서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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