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자유를 넘어선 자유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글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널리 이름을 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책을 읽고 글 쪼가리를 조금이라도 쓰다 보면 혹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이 쌓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런 기대가 허망한 것이란 걸 곧 알게 된다. 당최 나에겐 그럴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첫 번째 이유겠지만, 글쓰기의 세계가 그런 희망에는 도무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글을 쓰면 쓸수록 세상에 영향을 끼치거나, 이름을 알리는 것은 고사하고, 글쓰기만으로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은 더욱 후회막급이 된다. 글도 세상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정이 이럴진대 대체 글은 왜 쓸까?
글쓰기의 효용적 가치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글을 읽고 쓴다. 글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새벽이면 어김없이 현관문에 쓸리는 조간신문, 지루한 출근길을 벗 삼아 줄 옆구리 소설책 한 권, 사무실에 앉자마자 줄줄이 이어지는 회의록과 보고서들, 밤새 매복해 있다가 때맞춰 쏟아지는 업무 이메일들, 때때로 들여다보는 일상의 속살 같은 블로그와 트윗들, 그리고 잠자기 전 마음을 쓸어내리려 찾는 불경 한 구절. 세상이 온통 글들로 이루어 진 듯하다.
이런 글의 세상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대는 건 참으로 쉬워 보인다. 아마도 기자는 돌아가는 세상살이를 알리려고, 소설가는 어떤 이야기에 감동을 실어 전달하려고, 회사원들은 정확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려 더 많은 이익을 내려고, 일기를 쓰는 이들은 하루 일을 성찰해서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려고, 블로거는 친구들과 소소한 재미를 나누려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글을 쓸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감동과 지식, 성찰과 재미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들을 마음에 품고 글을 쓴다. 이런 점에서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답변으로 앞서 말한 실용적인 이유들을 들이대고 나열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명확한데 뭘 그런 질문이냐며, 차라리 그런 무의미한 질문에 매달리지 말고, 각자의 실용적인 목적에 맞추어 “어떻게 쓸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지 않느냐고 핀잔을 놓는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글을 쓰는 이유가 이런 실용적인 목적 때문 만이라면 굳이 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나 TV 드라마를 통해 감동을 전달하는 것이 소설보다 훨씬 효과적이지 않은가? 이런 의문과 지적은 앞서 나열한 모든 실용적인 목적에 적용된다. 신문기사보다는 TV뉴스가 더 사실적이며, 소설책 한 권보다 미국 드라마가 더 감동적이며, 역사책 한 권보다 다큐멘터리가 지식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며, 불경 한 구절보다 음악 오디오가 성찰과 치유에 더 효과적인 이 시대에 글쓰기의 역할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설사 각각 매체들에게 글이 필요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예컨대 ‘대본’이라는 형식의 글도 어디까지나 최종 매체인 영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작업단계로서 필요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는 “감동”이라는 정서를 만드는 목표 아래, 영상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가능한 글쓰기는 경제적으로 조절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체가능한, 그리고 조절되어야 할 수단일 뿐이다.
영화 <위대한 비밀> 중 한 장면.
_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도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결국 글은 지식과 감동, 기록과 성찰이라는 효용을 창출하기 위해 대체가능한 수단들 중 하나이거나, 보다 효과적인 수단들, 즉 영상과 음악 같은 매체들의 부분적인 작업요소로 전락해버렸다. 더욱이 기존 글을 재사용해서 더 큰 감동과 더 많은 지식을 줄 수만 있다면, 글을 쓴다는 작업행위는 더욱 필요 없게 되어 버린다. 영리한 자라면 글쓰기 같은 번거로운 과정들은 가능한 최소화하고 보다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수단들에 에너지를 더 많이 배분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우리는 지식과 감동, 기록과 성찰이라는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글을 쓰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이나 인터넷이 글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터넷이나 영상에서도 최소한의 의사전달능력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언어로 구성된 기존 문화들의 핵심들을 쉽게 빨아들이려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여전히 글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인 양 다룬다. 그러나 사회나 기업은 ‘효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한계를 치밀하게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기술적으로 쓰기를 강요한다. 이제 글쓰기를 둘러싸고 온갖 기만들이 횡행한다. 이 울타리 안에는 창조적으로 글을 생산하는 것에는 도통 관심을 갖지 않고, 단지 기존 문화의 성과들을 매끄럽게 잘 요약하고, 보다 효과적인 매체들로 탈바꿈해서 전달하는 능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 과정에서 글쓰기의 역량들을 전유한 여러 수단들(영화나 인터넷 등)이 감동과 지식, 성찰과 기록들을 대량으로 찍어낸다.
이제 모두의 글쓰기 역량이 이런 효용에 따라 위계 지워진다. 아이들은 이 효용성의 가치에 맞추어 기존 글들의 기교를 빨리 습득하기만을 바란다. 또 육체노동자나 주부들은 그런 불필요한 글쓰기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사무 노동자들도 회의록이나 보고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정도의 문장만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더군다나 블로그나 트윗을 이용해서 비효용적인 글을 쓴다고 생각할 때도 주어진 형태에 생각을 맞추어 문장을 만든다. 긴 생각과 문장은 소통 목적을 해칠 뿐이다. 어떤 이들은 치유와 성찰을 위해 글을 쓸 때에도 감상적인 잠언들로만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 결국 ‘수사적인 기교’와 그 기교를 구사하기위해 필요한 ‘지식’들만 익히고 유통된다. 이제 글쓰기는 특수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사람들의 특수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처럼 실용적인 목표에 대한 강박은 사람들을 글쓰기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아가서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특수한 사람들조차, 효용성 목표에 부합하는 수사적인 기교만을 요구받으며 감동, 지식, 성찰을 산출하느냐 아니냐에만 매달린다. 그들은 글을 수단으로 유용한 감동을 잘 찍어내는 품질관리자가 되어버린 듯하다. 감동품질관리자.
글쓰기의 재현적 기능들
그러나 이 효용적 가치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혹시 어떤 한쪽 입장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흑인은 어떤 조건하에서만 노예이다”라는 맑스의 말을 기억한다면, 글에 대한 이 관점도 또한 어떤 조건하에서만 인정되는 관점인지 자문해봐야 할 것 같다. 바로 소비자의 입장, 즉 독자의 입장 말이다. 사실 소비자의 입장에서만 글을 바라본다면 지식과 감동, 기록과 성찰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추호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소비는 효용이라는 가치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설탕을 사는 사람들이 달콤한 맛 이외에 설탕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설탕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달콤함 때문에 설탕을 사지만, 설탕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달콤함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글’이 주는 효용이 여러 가지 일 것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그 효용을 얻기 위해서만 글을 쓰지는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 효용성이라는 우산을 걷어치우고 다시 정의해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감동도, 지식도, 성찰도, 기록의 효과도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사람들은 느낌이나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글쓰기일거라 생각한다. 자연현상에 대해 묘사할 때조차 단순한 서술이기보다, 그것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정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들의 감동을 글로 써서 보다 오래 남기고, 공부한 지식을 글로 써서 보다 선명하게 하고, 정신의 내용을 글로 써서 보다 잘 치유하는 것들이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이유들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상한 길로 접어든다. 만일 그 정의가 맞다면, 아마도 표현되어야 할 그 느낌과 생각은 글을 쓰기 이전에 이미 완결된 구성물로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꽃이 없는데 꽃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즉, 먼저 찍고자하는 피사체가 있어야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이로부터 유추할 때 결국 ‘글쓰기’는 ‘느낌과 생각이라는 피사체를 문장으로 똑같이 베껴내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건 참으로 기이한 결론이다. 창조적인 글쓰기가 결국 ‘느낌과 생각이라는 의식을 스캔하는 행위’일 뿐이라니! 그렇다면 의식의 갖가지 작용을 잘 기억하고 메모해서 그것들을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수사학적 기술만 필요한 게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다시 그 길로 접어들다니!
"공부가 독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으로부터 받은 지식을 세상 속으로 다시 순환시켜야 한다." ─『고전 톡톡』, 「책머리에」 중
이 기이한 결론은 곤혹스럽게도 우리를 또다시 실용주의의 프레임으로 몰아넣는다. 기성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히 베껴놓기 위해서 글을 쓴다? 하지만 기성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히 베끼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글쓰기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소리는 음향이, 시각 형상은 사진과 영상들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를 넘어서서 생각과 느낌을 서술하면 오히려 효과적인 재현을 방해할 뿐 아니라 타인들의 접근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작가가 되겠다고 마지막에 가서 결심하는 프루스트의 수천 페이지 소설이 느낌과 생각의 단순한 재현일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오히려 글은 느낌과 생각을 똑같이 재현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자꾸 옆길로 벗어나려는 것 같다. 그래서 글쓰기의 세계에 들어서면 온통 균열뿐이다. 글로 표현된 느낌과 생각은 원래의 느낌과 생각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그래서 자꾸 꼬여만 간다. 요컨대 글쓰기는 재현의 유일한 수단도 아니고, 오히려 한계를 넘어선 글쓰기는 재현적 효과를 약화시키며, 기성의 느낌과 생각을 불편하게 한다. 결국 글은 쓰면 쓸수록 기성의 생각과 느낌을 허물어 버릴 뿐, 기성의 생각과 느낌을 온전하게 재현하질 못한다. 따라서 이 첨단기술의 세계에서 재현주의자들은 글쓰기의 세계를 하루빨리 떠나야 할 것이다.
글쓰기를 위한 나의 반격
이 지점에 와서 그렇게 자명해 보이던 글쓰기의 온갖 이유들은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린다. 우리가 통념으로 알고 있던 이러 저러한 목적들이 대개 기만적인 효용들이거나, 기껏해야 베끼는 것들이라니! 이런 관점에 서면 반드시 글쓰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모조리 사라지고 없다. 오히려 글만 쓰면 이 험한 세상에서 몰락해 버리지 않을까 고민해야 할 정도다. 또한 자신을 성찰하고 치유할 때조차 기만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 허황할 따름이다. 이제 여러모로 글은 쓰더라도 되도록 잘 조절하여 써야 하거나, 차라리 쓸 필요 없거나,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되고 만다. 난처하기 그지없다. 글쓰기의 이유를 찾기는커녕,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만 잔뜩 나오니 말이다.
에르테, <거울>
그러나 바로 효용적 가치들과 재현적 기능들이 사라진 이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시작된다. 그것은 니체의 방식대로 참과 거짓에 대한 통념이 사라진 곳에서만 진리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야말로 “글쓰기”를 왜곡으로부터 구출하여 그 본연의 모습과 생생하게 대면할 수 있는 지점이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효용성 가치의 허구와 재현적 기능의 무능함이 드러난 바로 이 지점에 와서야 우리에게 글쓰기를 위한 반격이 마련된다.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미지의 대륙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잃을게 없는 우리는 이런 반격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차라리 온갖 유용성을 무너뜨리고, 생각과 느낌의 재현을 허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생각이 구성되고, 그 구성된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만, 그 글은 나의 생각과 느낌을 배반하고, 다시 그 배반 때문에 글을 고쳐야하는 이 과정, 글이 생각에 어깃장을 놓는 이 끊임없는 원환 속에서 생각이 계속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바로 그 과정, 그곳에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가 숨져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원환 속에서 글쓰기는 끊임없이 기성의 생각과 느낌을 동요시키고 공격하는 가차 없는 저항이 된다. 글쓰기는 기성의 생각과 느낌을 항상 적으로 삼아서 막장까지 몰아세운다. 그래서 글쓰기는 위험하고 불편하다. 글로 표현되는 순간,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가 숨기고자 했던 것들이 만천하에 폭로되어, 내 이름을 명예롭게 하기는커녕 그것에 먹칠을 하고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초보자가 써내려간 서투른 문장에서조차 쓰는 자의 숨기고 싶은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글쓰기의 저항에는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숨기려는 그 미세한 마음까지 남김없이 드러나서, 갈수록 사태를 꼬이게 할 뿐이다.
따라서 글은 흔히들 생각해왔던 모든 실용적인 배치들을 하나하나 깨트린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실용적인 목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진한다. 만일 기성의 생각과 느낌들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 글은 베낀 글일 가능성이 크다. 남들의 생각을 그대로 기억해서 자신의 생각인 듯 기만적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수사적인 기술로 그럴듯하게 베낀 것이다. 자기 고유의 경험을 쓸 때조차 그렇게 하곤 한다는 점에서 이 기만은 지독히 노예적인 것이다.
자유를 넘어선 자유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베끼지 않는 것, 그래서 재현된 생각과 느낌, 효용에 매인 족쇄를 해체하는 전투이다. 글들은 기만적인 망상들을 하나씩 소환하여 무자비하게 심문하고 몰아세운다. 글을 쓰는 순간은 기존의 생각과 느낌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을 새로운 거점으로 확보하는 순간이다. 그 균열을 딛고 구성된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공격하기 위해 글을 고치며, 또 다시 쓴다. 이 무한한 반복을 거듭하던 중에, 글은 마침내 그 글이 대면할 생애 첫 독자인 바로 “나”에게 제출된다. 나만의 유일한 독자 “나”, “나”만을 위해 글을 쓰는 나. 나로부터 시작된 글은 다시 “나”에게로 향하여 회귀하는 것이다. 이 ‘저항으로서의 글쓰기’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것으로 보호하고 강화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며,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해온 일체의 장치를 파괴하는 데 있다...오늘날의 사회에서 최하층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층의 구조 전체를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도, 허리를 펼 수도 없다.
─『공산당 선언』, 60쪽
이 말을 빌려 말한다면 글은 “나”라는 국가에서 기존의 것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나만의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망상이라는 계급에 지배당한 “나”라는 국가에 저항하여, 이 망상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일으키는 끊임없는 시도이다. 그것은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 현재의 기만적인 자유를 넘어서 가기 위한, 그러니까 나만의 필사적인 삶의 투쟁인 것이다. 만일 자유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이 무너짐의 자유, 자유를 넘어선 자유만 있을 것이다. 이 투쟁을 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하면 이 망상 전체를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도, 허리를 펼 수도 없다. 이 인식에 도달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최소한 일어서고, 허리를 피기 위해, 그러니까 지금의 기만적인 자유를 넘어서 자유를 얻기 위해 글을 쓴다고. 따라서 살기 위해 글을 쓴다.
"분명 나는 종종 남을 해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더 사정없이 나 자신을 해부한다." ─루쉰, 『무덤』 중
글이 사람들을 치유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는 나의 관심 밖에 있다. 다만, “글이 사람들에게 감동과 성찰을 주고, 이 감동과 성찰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라는 따위의 실용주의적 접근에 부합하는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관점에서의 위계와 효용만 요구하는 작태에 우리는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글을 통해 사람들이 치유되고, 이런 저런 효용들을 얻을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거나 반대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거야 개인에 따라 그 글을 통해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수도 있으며, 그리고 자기가 목적한바 효용을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동이나 행복과 같은 갖가지 효용을 설정하고, 그런 효과를 낳아야만 한다는 목적 아래 모든 것을 ‘기술화’하면서, 그런 기술을 습득하기를 강변하는 처사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글을 둘러싼 이런 은폐들로부터 기만당해선 안 된다.
내가 보기에 글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역량을 착취하는 것들에 대한 사유의 빛나는 저항이며, 지금의 자유를 넘어서서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내 신체에 도사리고 있는 망상이라는 적들과 투쟁하는 ‘자유의 피투성이 전투’이다. 감상에 취해서 감동적으로 읊는 시 구절, 술 마시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쏟아내는 철학적 미문들, 자의식으로 넘치는 감상적인 문장들, 살기위해 그런 것들이 뭔 필요란 말인가. 오로지 글은 나를 다시 살게 할 뿐이다.
* * *
이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상의 온갖 글들을 다시 보자. 나의 모든 글은 글쓰기 국가의 유일한 시민인 “나”에게 전투 소식을 전하는 전시호외(戰時號外)이며, “이성”이라는 행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견제하는 입법부의 회의록이자 보고서이며, 나의 사파티스타가 “나”의 기만과 거짓을 폭로하며 쏘아대는 저항의 이메일들이며, 글쓰기 국가의 유일한 시민인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끊임없이 온 담벼락에 써대는 대자보이다. 나는 나를 쓴다. 이를 통해 잃을 것은 정신의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자유의 세계이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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