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917년 7월 9일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과 지노비예프는 서둘러 페트로그라드를 빠져나갔다. 3개월 전 레닌은 「4월 테제」에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임시정부 타도!’라고 폭풍처럼 선언했었다. 임시정부는 곧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독일 스파이로 몰려 도피하는 처지가 되었다. 턱수염을 깎고 가발을 쓴 레닌은 호숫가 마을 라즐리프(Razliv)의 헛간 고미다락에 몸을 숨겼다. 간혹 인근에서 총소리가 나자 그는 “이제 어떻게 죽어야 할지 택해야겠군”이라고 내뱉기도 한다. 그만큼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벼랑 끝.
하지만 그런 긴박한 와중에도 레닌은 은신처 라즐리프의 거센 비바람 그리고 수도 없이 날아드는 모기떼와 싸우며, 『국가와 혁명』이라는 원고와 씨름한다. 놀라운 집중력이고, 엄청난 에너지였다. 그리고 벗들에게는 낡은 계급들, 낡은 당들, 낡은 소비에트를 넘어서야 한다고 외쳐 댔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쉼 없이 새로운 길을 냈다. 이런 레닌을 두고 정적이었던 한 당원은 “하루 24시간을 혁명에 몰두하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오. 그는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혁명에 관한 꿈을 꾼다오”라며 혀를 내둘렀다. 오직 혁명만을 꿈꾸었던 사람 그리고 그 꿈을 쉼 없이 실천하려 했던 사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고리키는 레닌이 "자발적인 금욕주의자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잡하고 힘든 일로 분주했으며, 자신을 돌보는 데는 정말로 무능했다"고 썼다.
─토니 클리프 지음, 최일붕 옮김, 『레닌 평전1』, 책갈피, 109쪽
스타리크, 창조적인 아웃사이더가 되다
레닌은 둥근 대머리의 사나이다. 그리고 몽골인의 작고 검은 눈에다 수염은 성기고 뾰족했다. 옷은 언제나 구김살투성이였고, 바지는 헐렁한 데다 너무 짧았다. 언뜻 보면 러시아의 여느 농민과 다를 바 없었다. 간혹 체스에서 승기를 잡으면 눈이 작아지고,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며 크게 웃었다. 훗날 레닌의 연인으로 알려진 이네사 아르망의 장례식에선 눈물을 펑펑 흘려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그만큼 시골 농부같이 털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사려 깊음, 조롱, 접근할 수 없는 차가움이 함께 서려 있었다. 구사하는 언어는 언제나 논리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전투적이었다. 이런 레닌을 동료들은 ‘스타리크’(starik, ‘노인’ 혹은 ‘현인’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라고 불렀다.
레닌은 1870년 볼가 강변 심비르스크에서 장학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 독일계이자 유대계인 어머니의 뛰어난 외국어 능력은 어린 레닌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레닌의 가족은 교육자의 집안답게 항상 독서와 토론을 즐겼다. 특히 레닌은 라틴문학과 러시아문학을 열성적으로 읽었다. 어느 순간 그것들은 학교 교육을 넘어서서 농민, 노동자 등 가난한 자들의 ‘또 다른 러시아’에 눈뜨게 한다. 푸시킨, 레르몬토프, 고골, 투르게네프 등은 그에게 일종의 반체제 교육을 한 셈이었다. 특히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Nikolaj G. Chernyshevskii)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는 청년 레닌의 의식을 새롭게 단련시켰다. 훗날 레닌은 이 소설이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회상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혁명공동체와 ‘특별한 인간’ 라흐메토프의 모습은 레닌에게 혁명과 혁명가에 대한 특별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87년 레닌에게 일생일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공모로 형 알렉산드르가 처형당한 것이다. 형의 죽음은 열일곱 살 레닌의 사고를 혁명가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체르니셰프스키에게 편지를 쓰고, 비밀 서클에 가담하고, 맹렬하게 책을 읽었다. 특히 맑스의 『자본』을 만난 것은 운명적이었다. 그것은 레닌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이 무렵 레닌은 혁명적 테러리스트의 뜨거운 마음에 공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려 깊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궁지에 몰리더라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 또한 분명히 깨닫는다. 그렇지 않으면 형처럼 헛된 죽음을 맞이할 뿐이었다.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묻어 둔 채 대담하면서도 논리적인 혁명 전략가로 변해 갔다.
맑스, 엥겔스와 레닌.
하지만 레닌은 언제나 주류 밖을 떠돈 아웃사이더였다. 카잔대학 시절, 그는 불법집회 문제로 대학에서 쫓겨나 ‘고졸’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했다. 심지어 변호사 자격증도 청강생으로 공부해 받았다. 1895년 스물다섯 살 레닌은 스스로 서유럽을 돌아다니며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등 러시아 망명객들을 찾아간다. 그는 아직 애송이였지만, 거물들과 대담하게 토론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훗날 정적이 될 친구 마르토프와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만든 일로 급기야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3년간의 유형 생활을 마치고도 또 다시 15년간의 길고 파란만장한 해외망명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아웃사이더 레닌은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그런 중에도 수백편의 논문, 기고, 팸플릿을 써 냈다. 그만큼 시간을 엄격하게 사용하고 관리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던 그의 취미도 이런 방랑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훗날 아내 크루프스카야는 “우리는 항상 여행 가방 위에 있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또 레닌은 늘 궁지에 몰렸지만, 매번 새로운 길을 낸 창조적인 소수자였다. 1903년 당원 자격에 대한 표결에서 계속 연패 중이던 레닌은, 잠시 두 표를 더 확보하자 그 짧은 순간을 놓치고 않고 자신들은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 정적 마르토프의 세력은 ‘멘셰비키’(Mensheviki, 소수파)라고 부른다. 이후 상대편인 마르토프조차 자신들을 멘셰비키라고 불러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이후 단 한번도 이름에 걸맞은 ‘다수’가 되지 못한 이상한 ‘다수파’였다. 차라리 레닌은 이 명칭을 깃발 삼아 비로소 혁명 대중을 만들어 갔던 ‘소수자’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훗날 돌이켜 보면 ‘볼셰비키’는 혁명을 향한 의지와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 준 창조적인 명명이었다. 실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을 ‘혁명’하다!
레닌은 혁명의 과정 자체도 창조적으로 접근했다. 이런 그의 창의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저서가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1902)이다. 임금인상이라는 경제주의에만 매몰된 당시 주류적 노동운동은 대중이 자발적이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무기력한 믿음에 의지하고 있었다. 레닌은 이를 간파하고, 이른바 ‘전위당’을 통해 지식인 등 ‘외부의 의식성’을 새로이 끌어들여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남들과 달리 혁명 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 있었다. 레닌에게 혁명은 자생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성과 함께 ‘창안’해야 할 것이었다. 혁명은 창조적으로 구성해 가는 것이지, 스스로 무르익는 열매가 아니었다. 혁명이 혁명일 수 있으려면 혁명의 대상(사회)뿐 아니라 혁명의 과정(운동) 그 자체도 끊임없이 바꾸어야 한다!
이런 창조적 사유는 그후에도 계속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사회주의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된다. 당시 레닌은 스위스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또 다시 찾아온 궁지였다. 하지만 묘하게도 전쟁은 ‘스타리크’, 레닌에게 새로운 통찰, 새로운 돌파를 선사한다.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생산한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였다. 카우츠키류 정통파들의 자동붕괴론과 달리, 제국주의와 전쟁은 파국이 아니라, 새로운 단계, 새로운 과정이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대중은 이 전쟁에 연루되면서,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대중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전회였다. 사회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없었지만, 전쟁은 대중들의 ‘세계혁명’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은 전쟁 속에서도 혁명 자체를 ‘혁명’한 혁명의 발명가였다.
1917년 가을, 핀란드에 피신해 있던 레닌은 마침내 포문을 연다.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실패로 부르주아 진영은 엉망진창이었고, 전쟁과 경제 파탄으로 대중들은 더 이상 잃을게 없었다. 레닌은 확신에 차서 “지금이라면 승리할 수 있다. 아니 내일이면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라고 선동한다. 10월 24일, 넉 달 만에 귀국한 레닌은 면도를 깨끗이 한 모습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긴급회의 단상에 올라선다. 임시정부가 아직 제거되지도 않았고, 페트로그라드 시내는 여전히 아수라장인데도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성취되었습니다. 억압받았던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권력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낡은 국가기구들은 뿌리까지 철저히 파괴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헛간과 오두막을 전전하며 집필한 원고 『국가와 혁명』(1917)은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레닌의 성격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반쯤은 스스로 만들어낸 특징인데-그의 의지였다. (…) 의미심장하게도 러시아어로 자유와 의지는 똑같은 단어다.
─『레닌 평전1』, 109쪽
마침내 20세기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부, ‘소브나르콤’(Sovnarkom, 인민위원평의회)이 탄생하였다. 의장은 레닌이었고, 외무 인민위원은 트로츠키(Leon Trotsky)였으며, 스탈린(Iosif Stalin)은 민족 인민위원이었다.
프랑스 맑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가 오직 레닌에 의해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늘 “꿈꾸어야 한다!”(『무엇을 할 것인가?』)고 외쳤던 꿈꾸는 혁명가 레닌, 그리고 항상 새로운 실천을 창조했던 아웃사이더 레닌. 그는 러시아혁명과 함께 20세기 모든 저항하는 자들의 영원한 전위투사가 되었다.
21세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고리키시(市)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레닌은 스탈린을 후계에서 배제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오랫동안 레닌은 스탈린 진영이 만들어 낸 ‘맑스-레닌주의’라는 가면을 통해서만 유통되었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산되고, 이어서 레닌 동상마저 크렘린궁 중앙광장에서 철거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제 레닌의 혁명도 함께 사라졌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레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레닌은 시베리아 유형, 1905년 혁명의 실패, 오랜 망명과 당내 분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등 늘 파국적인 상황 속에서 매번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물으며 항상 새롭게 혁명을 창안하고, 늘 책임 있게 그것을 실천하였다. 우리가 레닌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정신, 그 실천일 것이다.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시 금융자본주의가 위기를 맞고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제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이거 보라구, 친구들. 이제 새로운 걸 꿈꾸어 보게나. 낡은 계급, 낡은 당들을 넘어 좀 새롭게 시작해 봐! 혁명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닐세. 하하하.”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혁명은 힘의 집중과 증대를 요구합니다. 대중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힘의 약화도, 힘의 낭비도, 힘의 파괴도 안 됩니다. 자제와 자기 규율은 야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지요.
─레닌이 절친 클라라 체트킨에게 한 말
※ 이 글은 『인물 톡톡』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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