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 긴 휴식을 위한 준비
송혜경(감이당 대중지성)
나에게 겨울은 아주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사주에 오행 중 비교적 차가운 기운인 금(金)과 수(水)로 똘똘 뭉쳐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추위를 탄다. 채식을 시도했던 해 겨울에는, 손이 너무 차서 불에 구운 오징어처럼 손이 오그라들어있을 정도였다.(이런 아이러니!) 전문용어로는 사지궐랭(四肢厥冷)이라고 한다. ‘겨울’이라는 이름의 위력은 벌써 나를 쫄게 만든다. 출근할 때마다 전신 패딩을 집었다 놨다를 수차례 반복. 그런데 이 감각은 꼭 나한테만 해당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쓰고 있는 달력은 ‘그레고리우스력’이라고 하는 것으로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 전엔 개성 강한 달력들이 꽤 있었다. 그 중에서 ‘로물루스력’이라는 달력은 희한하게도 11월, 12월이 없다. 1년은 304일로 치고 겨울은 숫자에서 제외시킨다. 이유는 혹독한 추위와 소금에 절인 고기로 근근이 버티는 겨울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다. 아흐~ 트라우마! 하지만 그런다고 이 추위가 사라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겨울이 주는 메시지를 정면 응시해볼밖에. 이제 막 땅에 따끈따끈하게 겨울이 도착했다. 입동(立冬)이다.
아~! 이건 추워도 너~~~~무 추워~! 어여 탕약을, 어서 내게 몸이 따듯해지는 부자탕이나 독삼탕을 대령하란 말이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 추위가 두려우세요? 그럼... 약을 권합니다.(약물중독자가 되어가고 있는 편집자의 조언)
순도 100%의 음기 세상
사실 하늘의 겨울은 추분(秋分) 때부터 시작되었다. 밤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을 기점으로 슬슬 밤의 길이가 길어졌다. 한 달 반이 지나자 땅에도 곧 겨울이 시작된다. 이것이 겨울 기운이 세워지는 절기인 입동인 것이다. ‘겨울 기운이 세워진다’는 게 무슨 말일까? 입동은 이름만큼 춥지 않음에도 기운 상으로 보면 24절기 중 음기가 가장 세다. 뭐든 시작할 때 발심의 강도가 그 일의 밀도를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법. 상강 동안 양기는 숨고, 입동이 되자 순도 100%의 순음(純陰)의 기운이 세상을 호령한다. 순음의 기운은 세상 만물을 드러나지 않게 하여 잠재운다. 이때부터 동물들도 굴을 파고 들어가 동면에 들고, 나무들도 남은 잎사귀를 떨구고 낮은 숨을 쉬며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한다. 입동 기간 동안은 물이 얼고 땅이 얼어붙는다. 무대엔 정적이 흐르고 사람도 할 일이 없어진다. 심심해진 사람 역시 휴면 모드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양은 문이 열린 모습을 불러오고 생식과 생산 그리고 발산하는 힘을 환기시킨다. 반면 겨울이면 마을의 출입문은 닫힌다. 겨울은 닫힌 문을 상징으로 하는 음의 계절이다. 양은 차가운 계절 내내 음에게 사방이 포위된 채 지하 은거지에 거처해야만 했다.
─마르셀 그라네,『중국사유』, 한길사, 2010, p.150)
이 때 사람이 하는 일은 전부 가리고 숨기는 일이다. 밀려오는 한파에 대비해 울타리를 보수하고 창호와 벽을 손본다. 빈틈없이 몸도 노출부위를 최대한 줄이고 목이고 손이고 칭칭 감게 된다. 사실 겨울이라는 말 자체도 ‘거실(居室)’ 즉 집[室]에 거처[居]하면서 지내는 때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추울 때 집 안에만 있고 싶고 두툼한 옷을 찾는 게 당연해보였는데, 이게 동물이나 식물이 월동 준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니 재미있다. 역시 우리도 자연이었어!
우리도 자연의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은 몸을 관찰하면 금세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건 아침의 눈꺼풀이며, 식후 땡으로 또 졸리다. 추우니 따뜻한 방에 배 깔고 눕고만 싶다. 밥도 잘 먹었는데 귤은 엄지손톱이 누렇게 물들도록 까먹는다. 엉덩이와 허벅지의 경계에 살이 붙는다. 우리 조상이 곰이었다는 신화가 진짜가 아닐까 싶다. 요즘 부쩍 이런 분들 많이 계실 게다. (사계절 내내 그랬던 분들, 드디어 제철 만났습니다.^^) 맞다. 이건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이치다. 천지만물이 시킨 걸 한낱 미물인 내가 어쩌랴! 근데 갑자기 궁금해진다. 차고 냉랭한 음기밖에 보이지 않는 세상, 한 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그 많던 양기는 다 어디 갔을까?
귤은 박스로 놓고 먹는다. 이게 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오직 먹을 뿐! 오직 갈 뿐! 먹는 순간 만큼은 양생에서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음(陰), 양(陽)을 끌어안다
음양의 개념은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를 자주 헷갈리게 한다. 음이 100%라면 양은 0%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음과 양은 늘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음이 100%라면 양도 100%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음기 혼자 세상을 뛰어다니는 것 같지만 그것의 실체는 양기다. 헉! 이 무슨 황당한 소리?!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따라가 보자.
우선 상강기간 동안 비가 내렸던 것을 떠올려 보자. 비는 어디에서 떨어졌나? 그렇다. 하늘이다. 하늘은 음과 양으로 따져보면 양의 기운이다. 결국 양기는 비의 모습으로 하강하고 땅에서는 음기로서 활동한다. 이렇게 보면 동양에서 늘 말하는 체용(體用)관계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입동이 겉으로 보기엔 음기 일색이지만 본체 혹은 바탕[體]이 되는 것은 양이고 그것이 음의 다양한 스펙트럼[用]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제 상강 동안 내렸던 비가 겨울을 준비하는 자연의 시스템이었다는 게 이해가 간다. 그렇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을 조정하고 있는 양의 모습이 어딘가에는 드러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나에게 겨울은 혹독하게 추워서 견디기 힘든 계절인 한편, 다른 면에선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은 흩어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이는 계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옷깃을 여미고 사람들이 난롯가에 모여 정답게 음식을 나눠 먹는 장면이 절로 그려진다. 내가 발견한 양(陽)의 모습은 이렇듯 안에 숨겨져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입동의 세시풍속 가운데에는 치계미(雉鷄米)라는 나눔의 풍속이 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꿩과 닭과 쌀이다. 평소에 쉬이 먹어볼 수 없는 한 상이 그려진다. 원래는 사또의 밥상에 올릴 반찬값으로 받는 뇌물을 의미하는 것인데, 입동 기간 동안 마을 어르신들을 대접하는 풍속을 가리킨다. 겨울을 맞아 마을 노인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인데, 아무리 살림이 없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이 풍속은 지켰다고 한다. 몸이 가장 음(陰)한 노인들에게 겨울철 추위를 잘 견디시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그동안 수고한 소들에게도 여물을 풍성히 주고 이웃들과도 음식을 나눠먹는 풍습도 있었다.
입동은 축복의 시간이구나! 음식도 나눠 먹고 따듯한 양기로 나누고 겨울은 그렇게 나는 것이로구나!^^ 간절히 기도한다. 어서 나에게도 나눔의 풍속이 당도하길^^
표면적으로 입동은 기온은 뚝 떨어지고 찬바람 불어, 각자 덮고 싸고 어딘가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반면 그 안에서는 양기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시기가 입동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밖이 찬만큼 안은 더 뜨거워져야 하듯이 말이다. 겉으로는 얼음처럼 차가운 입동의 순음(純陰) 안에 용광로처럼 뜨거운 양이 있음을 놓치지 말자.
은근하고도 은밀하고 뜨겁게
입동은 해(亥)를 품은 달(月)의 시작이다. 각 계절의 시작 즉 입(立)절기에는, 다가오는 계절과 다음 계절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그런 고로 입동의 해(亥) 안에는 겨울[壬水]과 봄[甲木]이 무토(戊土)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 있다. 즉 겨울로 가는 발걸음은 이미 다음 해 봄을 염두하고 있는 셈이다. 이후 입춘까지 봄기운은 등장하지 않는다. 즉 봄을 품되 봄이 없는 듯 기나긴 휴면상태로 돌입하는 길목에 입동이 있다. 이를테면 씨앗처럼. 단단한 껍질로 품고 있는 것은 다음 해 봄에 펼쳐질 꿈이다. 작은 공간에 싱싱하게 뻗은 줄기와 화려한 꽃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해보라. 겉보기엔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씨앗 안에 엄청난 양기가 똘똘 뭉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이 천하일색인 가운데 숨어있는 양기의 정체는 뭘까? 겨울에 봄을 품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내 생각에 이 고농도의 양기는 저절로 품어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겨울엔 생명이 감축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음이 몸 안에서 활발하게 작용해서 생리적 활동을 자꾸 정지시키려고 하는데 밖에 있는 음이 또한 왕성해서 안팎이 합세해서 마침내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조헌영, 『통속 한의학 원론』, 학원사, 2007, p.61) 여름이 제 아무리 뜨거워도 우리를 녹여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진 않는다. 그런데 겨울은 다르다. 물이 얼고 땅이 어는 순간 먹거리들은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물과 땅이 언다는 것은 그것과 같은 성분인 몸도 얼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숨겨진 양기와 봄이라는 것은 다음 해에도 살아남겠다는 생명의 강한 의지를 말한다.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생기면, 내부에 쌩쌩 도는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뭐든 붙잡고 버티고 싶어진다. 내부의 뜨거움이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남산의 절경은 역시 밤이다. 밤에 아무도 없는 남산을 걷는 맛을 그 누가 알리.^^
근데 이 양기의 용법은 절기마다 차이가 있다. 오늘도 나는 남산에 올라갔다왔다. 그런데 망종 때 올라갔던 때와는 확실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망종 때는 남산에 올라가더라도 무작정 정점 즉 팔각정에 도달하는 데 집중했었다. 그래서 땀을 내면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입동 무렵에는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초점이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땀을 내지 않도록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이다. 땀을 내면 피부로 귀한 양기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입동 무렵에는 과도하게 정점을 향해 달리기보다 은밀하면서도 뜨겁게 양기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동의보감』에서는 겨울철 양기에 대처하는 자세를 이렇게 얘기한다. “마음속에 무언가 감춘 듯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사사로운 마음이 있는 듯하고 무언가 귀한 것을 얻은 것처럼”(「신형」) 하라고 말이다. 양기를 지키는데 저렇듯 정성스러울 수가 없다. 양기는 곧 생명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는 사생결단을 내어 양기를 길이 보존해야 한다. ‘은근하고도 은밀한 뜨거움’. 요게 겨울을 여는 우리의 행동강령이다. 좀 다루기 어려운 뜨거움 같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마음을 나누는 상대를 넓히는 것이다. 몰빵하여 한 군데에 쏟아 붇는 게 아니라 손에 손 잡고~♪ 겨울을 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치계미 역시 겨울이 힘든 노인들도 같이 버티자는 것이며 소에게 충분한 휴식과 여물을 주는 것도 내년 농사를 위해 동료(?)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입동엔 절대로 혼자 있지 말 것! 겨울맞이 월동준비는 다름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곰살맞은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관계 안에서 은근하고 은밀한 뜨거운 양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이다. 양기는 난로가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다. 기운의 교류를 통한 활발발한 운동성이다. 이 겨울을 버텨내고 내년에도 살아남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귀중하게 모셔보자.
* 독자 여러분들에게
가을의 끝자락 상강은 잘 보내셨나요. 이 기간 동안 비가 제법 내렸죠? 하늘에 맺혀있던 음기들이 땅에 스미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겨울을 재촉하는 비 소식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진눈깨비와 우박도 내렸지요. 상강이라는 이름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꼭 맞출
필요는 없는데.ㅋㅋ 아무튼 추위에 약한 저는 바바리코트 깃 한번 세우지 못하고 그만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저에게 서정적인
가을 분위기…… 그딴 거 없습니다. 죄송합니다.(--)(__) 절기서당스럽지 못해서.ㅋㅋ 하지만 절기라는 게 누구나에게 다 같은
일기예보가 아니라는 거 아시죠?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사주팔자, 대운, 세운 게다가 일진까지 다 함께 어우러져 빚어지는 기운이라는
거 새삼 기억해보시고 겨울을 맞이하세요!^^
※ 임진년 입동의 절입시각은 11월 7일 오전 9시 25분입니다.
※ 갑오년 입동의 절입시각은 11월 7일 오후 9시 07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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