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 눈에 대한 이야기
송혜경(감이당 대중지성)
갑자기 세상에 없던 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얗고 가볍고 차갑고 또 금방 사라지는, 눈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풍경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그래서 눈은 사람의 마음 또한 부지불식간에 바꿔버리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눈의 혁명성!^^ 며칠 전 눈이 내리자 누구보다도 열일곱, 열여덟 살의 우리 아가씨들이 신이 났다. 방과 후에 얄짤없이 교문을 나서던 아이들도 눈으로 장난질을 하면서 꺄르르 웃거나, 손이 빨게 질 때까지 눈사람을 만드느라, 눈밭인 학교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눈이라는 게 참 이상도 하지. 대체 그게 뭐 길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이렇듯 무장해제 시켜버리는지 모르겠다.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차가운 눈. 오늘은 소설(小雪)에 이은 대설(大雪)이다.
양기, 고개를 들다
“눈 오는 날은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겨울에는 눈이 오는 날이 오히려 따뜻하다는 말이다. 잉?! 물보다 얼음이 더 차가운 게 빤한 이치거늘 이 무슨 소린가? 여기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밀거래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설명부터 하자면, 대기 중의 수증기가 고체인 눈으로 바뀌는데, 이때 물은 가지고 있던 열을 방출하게 된다. 즉 물은 열을 지불하는 대가로 형태를 바꿀 수 있었던 거다. 이 열 때문에 상대적으로 날씨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셈이다.
子의 원래 글자! 정말 아기처럼 생겼다^^
물론 이는 음양오행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대설과 동지가 든 달은 자(子)월이다. 맞다. 12지지 중 가장 선두에 있으며 하루로 치면 한밤중인 밤 11시 반부터 새벽 1시 반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 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子)라는 글자 자체도 팔다리를 벌리고 있는 머리가 큰 태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다. 이 달의 성격은 배속된 괘상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즉 지뢰복괘인데, 모두 음기 일색인 가운데 양기가 짠! 하고 틔워져 있다. 저번 해(亥)월이 음기일색이었다면, 자(子)월은 거기서 하나의 양이 살짝 고개를 든 달인 거다. 비록 음기와 비교해서 수적 열세이긴 하지만, 이 숨겨진 양기가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열쇠인 셈이다. 요컨대, 대설은 차가운 음기는 고체로 밀도 있게 뭉치고, 대신 음기의 빈자리에 양기가 들어서게 되는 절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양기의 출현, 이 다른 스텝이 끌어낸 천지만물의 변화는 무엇일까? 실망스럽게도 별 차이 없다.^^;; 되레 더 추워질 일만 남았다. 물론 자(子)월은 하늘의 봄이기에 땅에 붙어있는 우리에게까지 봄이 도달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명색이 몸과 마음으로 천지와 소통하는 소우주 아니던가?^^ 분명,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자(子)월의 괘상에 숨겨진 양기처럼 그것은 언뜻 혹은 슬쩍 드러난다.
마음이 눈(雪) 뜨다
자(子)월 즉 양력 12월에 들면 절기 이름에 걸맞게 눈이 내린다. 그런데 앞서 봤듯 눈이 내리는 날, 사람들의 마음은 확연히 달라진다. 동심으로 돌아가거나 첫사랑에 대한 애상에 빠지거나 등등. 그래서 눈은 영화 <러브스토리>와 <러브레터>에서처럼 첫사랑의 순수함과 아련한 정취의 공감을 끌어내는데 그만인 소재다. 그렇다. 눈이 일으키는 마음은 참으로 정(情)적이다. 정은 기본적으로 따뜻한 양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눈을 만지면 신체적으로는 차가운 감각이 느껴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동(動)하고, 추운 줄 모르고 뛰놀게 되는 거다.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활기찬 기운은 바로 언뜻 혹은 슬쩍 보이는 양기의 모습인 셈이다.
옳지 않다, 옳지 않아~~~~~~ 눈밭에서 다 큰 사람들이^^ 근데 뭔가 좀... 허전한 건 나만 느끼는 건가~~ 내가 이상하거니~~^^
그래서일까? 눈을 보면 차가울 거라는 생각보다는 포근할 거라는 착각이 든다. 눈이 따뜻한 이불솜을 연상시켜서 그런 건지, 아니면 먹을 걸 좋아하는 나에게 떡을 만들기 위해 뿌리는 쌀가루를 떠올리게 해서 그런 건지^^, 눈은 기본적으로 풍성하고 풍요로운 느낌을 준다. 팝콘처럼 틔워진 꽃이나 얼음으로 부풀려진 물은 오행이라는 기의 운동성으로 봤을 때 화(火)에 속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온도는 달라도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가는 화(火)기와 같은 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 때 내리는 눈은 심어 놓은 보리와 같은 작물들에게 보온을 해주는 이불 역할을 해준다. 말하자면 눈은 자라나고 있는 양기가, 동지(冬至)를 앞두고 어마어마한 음기의 역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방어막인 것이다. 임신 초기에 태아가 자궁에 잘 착상할 수 있도록 몸을 조심해야하듯, 이 꼬물거리는 양기를 잘 보듬어주는 것이 바로 눈의 내리는 자연의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야 이듬해에도 봄이 이어지지 않겠는가?
11월(양력 12월)은 화기가 잠겨 엎드리니, 막고 감추어서 그 본연의 진기를 기음으로써, 다음 해 봄에 발생해서 위로 오르는 근본이 되게 한다. (…) 양기가 처음 움직여 화력이 미미하므로 잘 보살펴야 하는 것과 같다.
─『보생심감』
삶의 서사를 틔우는 눈 오는 밤
대설은 대표적인 농한기다.『농가월령가』에서도 추수한 곡식으로 그간 밀린 외상값과 세금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특별한 일은 하지 않는다. 대신 한가한 농촌의 풍경이 이어진다. 아이가 글 배우는 소리, 왁자지껄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리고 할아버지는 천천히 왕골을 짠다. 아마 할아버지는 익숙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입으로는 손자, 손녀에게 자기 소싯적 얘기를 들려주었을 거다. 눈이 내리는 날, 만물이 얼음!하고 정지했을 때, 이와는 반대로 가가호호에 이야기와 삶의 서사가 펼쳐진다.
요즘이야 TV에서 재밌는 얘기도 들려주고, 웃겨주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덕에 이런 풍경을 보기는 쉽지 않다. 오늘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는 아줌마를 보았다. 그녀는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쉴 틈도 없이 구경꾼이 되어버리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있을까. 그녀는 자기의 무엇에 대해 얘기하게 될까. 생각해보면 TV처럼 구경꾼으로서 본 얘기는 잠깐의 화제로 아주 쓸모 있다. “어제 그거 봤어? 완전 웃기더라!”로 얘기의 포문을 열기는 어찌나 쉬운지. 그런데 아마도 30년이 지나면 그 얘기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거다. 두고두고 얘기해도 새로운 감흥이 우러나는 고전 같은 얘기는 자신이 겪고 느꼈던 아주 소박한 얘기들일 것이다. 지금도 나를 키워준 할머니가 별것 아닌 내 어릴 적 에피소드를 매번하시면서 웃으시는 것처럼.
아주 작은 양기 하나가 겨울의 풍경을 바꿔놓듯, 소박하고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의 발견이 삶의 풍경을 바꿔놓을 수 있다. 대설이라는 이름처럼 엄청난 눈이 내리면,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얘기를 하나씩 펼쳐보도록 하자. 각자 개성 있는 목소리의 울림으로 전해지는 삶의 전율을 느껴보자.^^ 덧붙여 ‘눈 올 때 제일 생각나는 나만의 노래 1위’(ㅋㅋㅋ)인 조하문의 ‘눈 오는 밤’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선물한다.^^
옹기종기 모여 정다운 이야기
서로의 즐거운 슬픔을 나누던 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시절
내 마음 속에 추억만 남아
오늘도 눈 오는 밤 그날 생각하네.
<조하문의 ‘눈 오는 밤’>
※ 임진년 대설의 절입시각은 12월 7일 오전 2시 18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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