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카지 토모나리(형태학)
박영대 번역
형태는 다양하게 주어진다. 다양성은 미분화된 균일성에서 조작에 의해서 추출된 소여가 되고, 조작에 의해서 동일성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분류학을 배우려는 사람은 우선, 혼연한 무리에서 스스로의 대상을 선출하는 일을 찾게 된다. 선출된 대상은 그 영역(경계)을 확인됨 의해서 배경에서 분리된다. 대상은 무리로서, 복수의 미분화된 영역의 집합으로서 일시적으로 주어지지만, 계속된 관찰은 즉시 한층 더 다양성을 그 안에 현전시킨다. 관찰은 그 학술영역에 의존한 기능지를 따르게 된다. 어떤 이는 육안으로, 어떤 이는 현미경으로, 또 어떤 이는 더욱 고등한 기술을 사용함에 의해서, 단일한 무리를 복수의 영역으로 해체한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다양성은 즉시적으로 소여가 되고, 더욱 관찰에 따른 다양화를 가진 무리가 된다. 관찰의 연쇄는 계층을 이뤄서 다양성을 계속 산출하는데, 해체된 균일한 무리는, 그것들이 원래 영역이었던 부분의 근거를 소급적으로 찾는다. 비교라는 더욱 관찰을 통하여 다시 학술영역 의존적인 기능지가 조직되고, 차이는 동일성으로 회수된다. 동일성과 다양성은 기능에 의해서 조직된 무리가 되고, 여기에 분류학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도대체 다양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선천적 실명으로 개안수술을 받은 사람의 임상사례가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형태지각의 성립은 정확히 다양성을 형성하는 조작적 프로세스이다. 선천적인 실명상태를 수술로 제거한 환자는, 라이프니츠의 예상에 반해서 전혀 ‘볼’ 수 없고, 그 시각세계에는 압력으로서의 빛이 미분화된 균일성에 의해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계속적이고 신체운동을 동반한 관찰(여기에서는 학습한다는 것이 적절하겠지만)에서 그림과 땅은 분화되고 윤곽이 추상되어서, 시각세계가 다양하게 된다. 추상된 다양성을 만든 그 윤곽은 그것을 추상한 신체기능에게 동시에 동일성을 부여하고, 자각된 기능지에 있어서 그 나타남은 근거지워진다. 이렇게 주어진 다양성/동일성은 주어진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 있어서 즉시적으로 자명성을 갖고 나타난다. 유명한 달마시안 개의 사진(그림1)은 그 작용을 경험하기에 적절할 것이다. 무질서하게 배분된 듯한 검은 점의 집합은 어떤 한 순간에 모습을 바꿔서, 미리 관찰자에게 가르쳐 보인 개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 동일성의 원인으로 회수된다. 나타난 ‘개’라는 특성을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어쩌면 또 다시 그것 이외의 형태를 거기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들이 여기에 부여한 그 ‘개’라는 특성, 개를 개로 만들어 아이덴티티(동일성, 정체성)를 준 다양성을 형성한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에노씨가 한 ‘아이덴티티’ 개념의 계보학적 분석에 따르면, 동일성이란 동일화의 효과여서 원인이 아니다. 여기서 선험적인 원인으로서의 동일성이라는 관점은 배제되고, 과정과 효과라는 조작적 현장이야말로 동일성의 근거로서 접근가능한 장(場)이 된다. 원인으로서의 동일성, 혹은 이질성에서의 필연이 아니라, 그것을 동일하게, 혹은 다르게 하는 조작적으로 작용한 효과의 귀결로서 동일성, 즉 나타남은 위치지어진 것이 된다. 그 효과는 그것이 배후에 잠재한다고 여겨지는 한에서, 나타남의 자명성을 갖지만, 다양성이 만들어지는 국면에 있어서 그 자명성은 전환가능한 것이 된다. 검은 점의 분산에서 달마시안 개로 모습이 전환되었듯이,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도안(무늬)’으로 되는 것이 감상자의 눈길 속에서 단속적으로 동일성을 잃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동일성이 주어진다. 그것들 두 극은 결코 동시에 지각되는 경우가 없고, 한 쪽이 지각될 때는 그것이 철저한 자명성에 의해서 부여되고, ‘그것 이외의 모습들은 상정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 이극화된 확신 속에서 감상자는 요동치면서, 결코 두절되지 않은 자명성을 계속 현전시킨다.
동물형태는 그것을 창조해 내는 발생프로세스 넘어서 변해간다고 평가되는 쪽에 보수적이지만, 시간이 크게 표현이 변하는 것도 있다. 마치 지각 교대처럼, 조상형에서 큰 단속에 의해서 형태가 나타나고, 바로 그 자리에 자명성, 다시 말해 내적 통합성을 갖고서 계속 생존하는 영역이 된다. 현재에 있어서 고차분류군의 다양성은, 이런 다양변화의 귀결로 이루어진다. 신규성(novelty)이라고 부르는 문제는 이 단속을 조작한다는 말이 변화한 것이고, 최근의 진화학에서 주요 테마의 하나가 되고 있다. 언어야말로 새로운 것인데, 실제로 착상으로서의 출발은 오래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라마르크(Lamarck)와 다윈(Darwin)은, 동물에게 심리(의지)적 요인을 신규성의 창시메커니즘으로 상정했는데, 그 구체적인 틀은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자연선택에 의한 설명에 특화된 다윈주의가 발흥하기 위해 이 문제는 그림자를 숨겼지만, 20세기 후반에 진화발생학의 융성에 따라 구체적인 접근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생물의 다양성은 발생의 문제로 재정립하고, 신규성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발생구조의 변경이야말로 기술(記述) 대상이 되었다. 뮐러(Müller)와 바그너(Wagner)는 이것들의 상황을 총괄하고, 더욱 상동개념과의 균형을 신중히 생각하고, 신규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형질의 적응변화가 아닌 상동성의 소실을 따라 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상종의 어떤 구조와도 상동하지 않고, 동일 개체의 어떤 구조와도 상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들이 산출한 신규성의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규성이라는 게 없는 것, 즉 새로운 것과 새롭지 않는 것을 일의적으로 구별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은, 기준의 적용이라는 국면에 있어서조차도 평소에 늘 다양한 것을 가리키는 생명현상에 있어서는 불가능할 것이고, 그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상동이 아닌 것, 동일하지 않은 것, 서로 다른 것, 이 소박한 변별의 감득이야말로 신규성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기능이라는 문제
신규성의 실례를 바탕으로 논의를 나가보자. 물이류(魚蝨, 물고기진드기, Argulus japonicus)는 몸길이 1센치미터 쪽의 작은 갑각류이고, 물고기의 표면에 기생해서 그 생애를 보낸다. 그들의 큰 특징으로, 1쌍의 다리가 빨판으로 변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빨판은 훌륭하게 디자인된 구조를 보이고, 이것을 사용해서 물고기의 표피에 흡착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체발생의 초기, 즉 유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빨판을 가지지 못한 유체는, 대신에 갈고리발톱을 그 끝에 갖춘 다리를 사용해서 물고기에 달라붙는다. 이 다리야말로, 후에 빨판으로 변현되는 제1소악(작은 턱)이라고 불리는 다리다. 한 해 유체에게 제1소악은 네 가지의 다리마디(지절)에서 구성되어, 그 끝에 큰 갈고리 손톱을 가진다. (그림 3-A) 두 살, 세 살, 네 살로 탈피장성을 반복해서 데려온다. 다리의 제1, 2 마디가 비대화된다. 배 쪽에서 보면, 이것들 두 마디는 연합해서 하나의 큰 원판상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3-B) 더욱이 5세 유체가 되면, 이미 벌써 거기에는 빨판으로서의 가장자리가 형성되고, 빨판주변부에 존재하는 미세한 미끄럼방지구조도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6세 유체에 있어서, 처음 빨판은 빨판으로서 모양을 보인다. (그림 3-C) 여기서는 이미, 그것이 일찍이 제1, 제2 다리마디라는 분리된 형태요소였던 흔적마저 보이지 않는다. 제3다리 마디 이후의 말단부는 아직 빨판측면에 찌꺼기로 남지만, 계속 2~3회의 피에 의해서 완전히 소거되고, 빨판은 완성된다. 원통상의 외벽은 두꺼운 각피로 구성되고, 그 가장자리, 즉 숙주와의 접촉부위는 프릴(frill)모양의 구조로 가장자리가 완성된다. 완통상 내측부에는 등 쪽부터 자라는 근육(흡인근)에 의해서 작동하는 부드러운 막이 있다. 이 막이 피스톤운동을 함에 의해서 원통내측에 넓어지는 빈 틈에 음압(빨아당기는 마이너스 압력)이 만들어지고, 빨판에 대해 흡착능력을 가지게 된다. 즉 물이는, 이 빨판의 말단 (프릴모양 구조)를 숙조로 밀착시키는 동시에 흡입근을 수축함에 따라, 빨판을 기능시키고 있다. 빨판 전체의 운동은 두 종류의 근육, 즉 외전근과 내전근에 의해서 끌어당겨진다. 이것들의 근육에 의해서 빨판은 능숙하게 제어되고, 물이는 물고기의 표면을 돌아다닌다. 우리의 연구가 보여주는 것에 따르면, 놀랍게도 빨판을 구동하는 근육의 거의 대부분이, 유체 시기에 갈고리 발톱을 발달시켰던 제1소악을 구동하고 있던 근육을 다시 사용한 것이었다. 즉 다리를 구동시키는 갈고리 발톱을 사용한 부착기능을 만들어 내던 근육이, 모두 그 배치를 유지한 채로 빨판의 운동과 흡착기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리와 빨판의 기능형태는 전혀 다르다. 다리는 다리로서, 빨판은 빨판으로서의 내적 합목적성 즉 자명성을 갖추기 때문에, 기능형태의 변환을 상정하는 건 곤란하다. 하지만 발생을 통해서 그것들이 변환되는 모양을 눈 앞에서 보면, 그 변환의 묘기는 즉각 느낄 수 있다. 그 발생, 그 변환은, 마치 지각교대처럼 결코 두절되지 않고 자명성을 계속 현전시키듯, 교묘하게 조직되고 있다. 교묘함의 근거는, 변하지 않는 근육배치를 내관한 후에 시행되는 외골격의 변형에 있다. 유체의 제1소악에 있는 제2다리마디 내전근의 부착부를 둘러싼 형태로, 즉 제1다리마디와 제2다리마디에 걸친 형태로 빨판이 형성되기 때문이야말로, 그 필연적 귀결로서 제2다리마디 내전근은 흡입근으로 그 기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외/내전근에 대해서도 동일하고, 그것들의 근내부착부위를 빨판의 기저부로서 다시 형성하는 것으로, 근육배치를 변경하지 않고 그 기능형태를 바꾸고 있다. 이 자명성을 유지한 변환에 의해, 그것들 양극의 중간형태(그림 3-B)에 있어서도 기능형태가 파탄되는 것은 아니고, 기생생활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기능형태의 유지, 즉 자명성을 계속하게 하는 것은, 물이 자신의 생존조건을 생애에 걸쳐서 유지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이렇게 교묘하게 형성된 빨판이지만, 모든 물이류가 이것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조상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종에 있어서는, 제1소악은 그 생애를 통해서 다리로의 기능형태를 유지하고, 빨판으로 변형되는 일이 없다. 즉 파생적인 물이류는 그 발생과정의 말단에 빨판형성이라는 이벤트를 부가적으로 진화하게 만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마치 발생과정이 진화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은 상태가 만들어져 나오고 있다. 조상종에 있어서 성체의 제1소악과 파생종에 있어서 유체의 제1소악은, 그 기능형태에 있어서 일치한다. 따라서, 파생종에 있어서 다리에서 빨판으로의 변형프로세스에 있는 내적 합목적성의 유지는, 빨판 그 자체의 진화프로세스에도 대충으로 꼭 들어맞는 것이 된다. 아마 중간단계에 있는 형태를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근육배치를 일정하게 함으로 외골격을 적확하게 변형시키는 프로세스 그 자체에 서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즉 빨판의 진화과정에 있어서 합목적성이 유지된 근거는, 그 발생과 같은 모양, 근육배치의 일치와 즉응하는 외골격이 스스로 있어서 출현한 형태의 관측에 있다.
기능, 혹은 합목적성. 유기체를 시간 아래에서 말할 때, 이것들의 개념은 불가피적으로 사용, 혹은 사고된다. 여기까지 물이류의 제1소악에 대해서 설명을 했왔지만, 그것을 빨판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 순간, 정확히 그것은 흡착하기 ‘위한’ 합리적인 구조를 가리키는 언명이라는 말은, 암암리에 밝혀질 것이다. ‘~를 위해서’ 이정도로 비생물학적이면서, 생물학에 있어서 높은 빈도로 사용되는 단어도 없다. 이 어법은 쉽게 디자인으로 향하는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총괄하는 지성의 존재를, 상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좋든 싫든 상기시킨다. 설령 이것을 ‘무엇에 사용하는가’ 혹은 ‘어떻게 사용할까’라는 말로 바꿔도, 그것이 함의하는 점은 동일하다.
생물학에 있어서 사용되는 기능개념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 ‘인과적 시각(etiological view)’는 기능을 적응과 동일하게 본다. 빨판으로 예를 들어보면, 빨판의 기능이 흡착이라는 말은, 과거의 빨판이 흡착이라는 기능에 의해서 적응적이었기 때문이라 는 말이 된다. 이 기능개념은 주로 신총합설의 문맥에 있어서 쓰여졌다. 즉 그들이 기능이라는 말을 한 경우, 그것은 과거의 적응에 대해서 의미하고 있는 가능성이 높다. 이 언어용법의 경우, 기능은 개체 속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진화과정에 준거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인과적 역할의 기능(causal role function)’의 경우, 예를 들면 전체의 태스크를 개체가 유지함으로서 설정된 경우, 빨판의 기능은 흡착으로서 정당화된다. 이것들은 생리학이나 해부학에 있어서 사용되고, 진화과정과는 무관하게 개체내부 또는 기관내부에 있는 부분의 역할을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들 어느 쪽의 기능개념에 있어서도, 그것이 전체에 있는 부분의 역할을 나타내는 말인 이상, 해당 기관에 있는 기능은 그 기관이 놓여진 문맥성을 빼놓고는 결정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맥을 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을 위해서’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의 귀결, 그리고 기능이라는 개념을 성립시키기 위해 구동하는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문맥을 지정한 때, 그 이 해당 기관의 존재를 기초 짓는다. 말하자면, 기능을 말하고 문맥을 지정한 정확히 그 순간, 인과관계는 쌍방향적으로 된다. 예를 들면 빨판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보면, 개체를 따라서 만들어진 빨판은 그것이 흡착을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개체의 생존조건을 구성하고, 동종 개체의 반복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생존과 생산은, 문맥으로서의 흡착작용을 쌍방향적인 인과 속으로 묻어두는 것에 따라 잘못을 만들며 진행한다. 이 인과 속에서는, 모든 부분이 서로 다양한 형식의 원인도 되고 또 결과도 되며, 미래의 인력이 과거의 추진력으로 바뀌게 된다. 부분은 서로 문맥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의 ‘목적으로(위해서)’ 생존하는 합목적적 전체를 구성한다.
신규성의 출현은, 새로운 문맥의 출현과 떼놓을 수 없다. 빨판은 빨판으로서의 문맥을 구성하는 합목적성 혹은 루드윅(Rudwick)이 말한 ‘패러다임’없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를 다리로서 동일화하게 만든 문맥성에서, 빨판으로서의 문맥성으로 시프트(shift)한 것에 의해서야말로, 빨판은 빨판으로서 성립한다. 이런 것은 문맥이 합목적성과 같은 뜻이고, 혹은 그 속에 위치지어진 이상, 그 변환은 쉽게 일어날 수 없다. 합목적인 전체는 그것이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부분의 개별적 변경을 허락하지 않고, 부분-전체가 총체로서 구성되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에 의해 생존의 조건을 보장한다. 또한 자주 말해서 진부하지만, 이른바 개체-환경 사이에 있어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은, 이미 방향지어진 목적성을 가진 형질에 대해서만 효과를 미칠 수 있고, 새로운 문맥을 기능적으로 창시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맥/신규성의 창시, 즉 합목적성의 변환은 가능한가. 만약 반(半)자율적인 상호작용계를 개체 내부에 상정하고, 그것을 합목적적인 전체에 있어서 잉여라고 한다면, 설령 그 반자율계가 파탄하려고 해도 개체 전체에 있어서 합목적성은 유지되기 때문에, 변환의 문제는 일시적으로 회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도적으로 격리된 반자율계조차도 기능론적으로 해석되고, 내부에 있는 합목적성을 일정하면, 그 자신의 변환에 관계되는 해당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다.
현대미술가인 Felice Varini는 그의 작품군에 있어서, 문맥의 전환(shift)과 전환에 따른 표현의 변화에 대해서 일관된 표현을 전개한다. 일상공간으로 묘사된 언뜻 무작위로 보이는 모양, 그것은 관찰자가 공간 상에 어떤 한 점에서 응시할 때만 통합되는 특징의 형태를 표현한다. 그 형태는 마치 눈 앞의 공간구조에서는 독립되어 부유하는 형상인 듯이, 관찰자 앞에 강한 사실감을 갖고 나타난다. 무작위로 생각된 여러 모양들은 시선 속에서 연속된, 아니, 연속‘했던’ 것조차 이미 확증할 수 없는 쪽의 자명성을 띠고, 그 형태는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밝은 곳과 지하의 차이에 따라서 각 부분의 색조(성격)로 흐트러지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러난 형상의 투명성의 귀결로 해석되기 때문에, 부작용으로서 표현의 자명성을 구성하는 근거, 즉 동일화의 효과 중 하나가 된다. 이토록 강한 표현이지만, 관찰자가 그 한 점보다 조금이라도 이동하면 그 형태는 금세 사라지고, 거기에는 벽이나 기둥에 그려진 무작위한 모양이 잔재로 남을 뿐이다. 이 운동에 동반한 표현의 변환을 몇 번이나 경험한 관찰자는, 그 변환과 자명성을 구성하는 구조를 ‘이해’하고, 그 표현을 예술작품으로서 작가의 의도성에 정위한다. 형상의 자명성은 관찰자 자신의 의도적 운동 즉 행위에 동반해서 만들려고 계획된 인공물(artifact)이 되며, 그 장을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미리 예정조화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것이 확인되고, 그 변환의 과정(이 얼마나 역설로 가득 찬 표현인가!)에 있어서 어떤 근원적 변화도 생기지 않게 된다.
물이의 빨판이 제1소악과 제2 다리마디에서 구성되고, 순수한 형태학적으로는 어떤 변환도 생기지 않는다 라는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Varini의 작품에는 어떤 변환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 겉보기의 변환이 관찰자의 행위에 바로 즉응해서 만들어내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그 행위, 즉 시점의 이동에 의해서 사물이 적절하게 배치된 때만, 벽에 그려진 여러 모양들은 관찰자의 시점을 구성하는 판단특성에 응해서 재편성되고, 거기에 새로운 형상이 나타난다. 무질서한 모양에서 자명한 형상으로의 변환을 가능하게 한 문맥은 관찰자의 시점이고, 그 시점 속에 있는 합목적적인 변환은, 스스로의 의도성을 갖고 운동하는 것에 의해 그 목적론적 성질에 새로운 표현을 유도한다. 의도적인 운동, 혹은 행위에 동반된 문맥의 형성, 작가에 의해서 표현된 이 과정이야말로 합목적적인 전체의 변환을 표현하는 열쇠가 된다.
운동이 형태를 만든다
운동을 빼놓고 유기체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의존하는 요소의 총화(總和)인 유기체는, 요소끼리가 산출하는 다원적 운동을 그 생존의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근육이나 외골격에 의해서 구성된 공간배치도에 따라 빨판을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해서 기술된 빨판은 이미 정적으로 고정화되어 결코 유기체의 구성요소로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흡인력은 흡착을 ‘위해서’, 빨판은 개체의 위치제어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상, 그것들은 개체 즉 유기체의 특정영역의 생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기능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능하고 있다고 여기는 상태에 있어서는 보통 구성요소 간의 상호의존적 운동을 수반한다. 이 운동이야말로 기능개념에 있어서 지정된 문맥성의 내실(內實)이다. 그리고 이 문맥을 기초짓는 운동특성조차도, 가소성(可塑性)이라는 성질 아래에 있어서 동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요소는 그 발생과정에 있어서 가소성, 즉 그것들이 놓인 환경조건에 응하여 표현을 변화시키는 성질을 갖는다. 요소가 놓인 환경조건에는, 당연히 그것이 속하는 기능적 문맥에 있는 상호의존적 운동도 포함된다. 상호의존하는 부분끼리 서로 가소성 속에서 서로의 표현의 상호규정하고, 움직임 속에서 전체를 만들어낸다. 척추동물의 심장이 정상이면서 적응적인 발생에 대해 자신이 만들어낸 피와 박동에 의한 물리자극이 불가결하듯이, 자신에게 운동 그자체가 소급적으로 자신의 표현을 어떤 한계로 계속 제약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을 동일화하는 효과가 되고, 그 유기체의 생존을 귀결시키는 것이 된다. 모든 부문이 서로 이러저러한 형식의 원인도 되고 또 결과도 된다는 기능개념의 특성은, 정확히 그것이 발생하는 국면에 있어서 구체적 사건으로서 [심지어] 관찰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운동에 있어서 모순되는 인과는 유기체의 발생조건으로 되지 않고, 그 문맥을 능동적으로 변환해가는 힘을 갖고 있다. 네발동물에게 이족보행으로의 적응사례는, 운동양태의 변경에 따른 기능형태의 가소적 변경에 대해서 훌륭한 시사를 준다. Slijper의 보고에 의하면, 선천적으로 앞 다리의 기능을 잃고 후천적으로 뒷 다리의 사용하는 이족보행을 습득한 염소의 근-골격계는, 골반을 시작으로, 흉부, 배부(背部)에 있어서도 현저한 조화적 변형을 볼 수 있다. 이 현형된 기능형태는, 캥거루 등 선천적으로 이족보행을 한 동물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West-Eberhard가 제창한 ‘(표현형 적응)phenotypic accommodation’의 현저한 일례가 되고 있다. 골격이나 근육은 그것들이 자신에게 대해서 부과된 환경조건을 소급적으로 받거나, 자신이 있는 가소성에 응해서 변형된 결과, 전체로서 합목적적인 기능형태를 산출했다는 말이 된다. 유기체의 운동이 바로 그 유기체 자신을 목적론적으로 변형하는 구체적인 힘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 변경은 확실히 운동양태의 변경에 동반해 산출된 새로운 문맥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수동적동보행현상이 보여주는 것에 따르면, 확실히 보행양태는 그 자신으로 문맥을 이룰 수 있다. 보행양태는 그것을 실현하는 설계물의 구조나 운동제어를 시행하는 명시적인 의도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자체가 의도성이라고 말해야 할 안정화기구(機構)를 가진 문맥이 되고, 동시에 설계물의 한층 더 세련됨을 계속 요청한다. 동물은 그 요청에 응해서 의도적으로 근육을 수축시키고, 힘줄이나 뼈에 역학적 부하를 걸 것이다. 그 부하에 응한 가소성이 총체로서 합목적적 구조를 산출한다고 해도, 아무런 불가사의는 없다.
운동에 의해서 시작된 새로운 문맥은 여러 차례 유전성을 획득하고 후세에 계속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유전적 적응(genetic accommodaion)”이라고 부르고, 변화한 가소성이 유전적인 기반을 획득하는 현상이다. 살아가면서 타조의 흉부에 있는 ‘경결’이 이 현상의 고전적 사례가 되고 있다. 선조에 있어서는 지면과의 마찰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형성되었을 경결이지만, 피부의 가소성 그 자체로의 선택을 겪고, 앉는다 라는 운동을 개의치 않고 알 속에서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운동/사용에 따른 가소성의 적응적 발현과 그 유전은, 체제 레벨에서의 진화를 재촉하는 일이기도 하다. Palmer는 가소성에 대한 선택의 방향성이 사용에 따라 인도되는 것에 따라 동물의 좌우이형(左右二形), 특히 갑각류에게 있는 한 쪽 집게발의 대형화/특수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논의된다. 특히 연갑류(Malacostraca)에 속하는 갑각류에게는 흉부전방의 다리가 집게발 등의 용도에 특수화되고 대형화되는 경우가 있다. 특수화된 다리에 있는 기능형태나 크기는 자주 좌우가 현저하게 다르다. 좌우 어느쪽을 특수화시키는가 결정하는 구도는, 종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종에서는 유전적으로 결정되지만, 또 다른 종은 유체기에 사용빈도에 따라 결정되는, 즉 보다 많이 사용한 쪽의 집게발이 크고 특수한 성장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진화적으로 보면 후자가 조상들의 특징이라고 여겨진다. 원래는 사용에 의해서 임시변통적으로 발현하는 가소성의 한 측면이었던 것이, 보다 세련된 유전적으로 적응되는 과정을 겪고, 파생종에 있는 훌륭한 좌우이형이 생겨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Palmer는 이것을 받아서, 형질의 사용은 현실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표현형 변이(variation)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이족보행의 염소에서도 보이는 사용=의도적 운동에 따른 문맥의 창조가, 여기에서도 유전적 적응의 귀결로 현실적으로 동물분류군을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서는 동물군에 모순없는 다양성을 주는 동인이 되고 있다.
운동은 의도에 따라 목적성을 갖고, 목적성은 새로운 표현을 모순없이(조화롭게) 인도한다. 다만 의도는 운동 그 자체로 환원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운동은 그것이 합목적적 자명성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 이상, 의도성을 갖지 않고 계속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동적동보행이 보여주듯이, 그 운동을 떠맡은 구조에 소박한 의미에서의 의도성을 상정하지 않고도, 적응성=의도성은 그것을 실현하는 운동 그 자체 안에서 인식할 수 있다. 소박한 의미에서의 의도적 주체는 완성된 개체 등 강고하면서 변화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을 뿐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의도가 자신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는 작용은 대단히 제한된다. 따라서 가소성 연구가 가르쳐주는 문맥의 창조는, 소박한 주체성에서 거리를 둔 곳, 그런 주체성의 힘이 멀리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런 곳에서 찾아야 한다. 동물형태에 있어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발생의 후성설적 과정이다. 그것은 계시적(metachronism, 繼時性)으로 문맥을 만들어내고, 다원화된 영역을 항상 변용으로 열어가면서도 안정된 것으로 계속 생존시키는 합목적적인 운동이다.
후성설적 생성
미리 구성되어 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금 구성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전성설일까 후성설일까. 유기체의 기원으로 향하는 물음은 이 두 극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다. 전성설으로의 대항으로서 언급되는 것도 많은 후성설이지만, 그 의의는 유기체의 설명원리를 정적인 과거에서 동적인 과정으로라고 찾는 점에 있다. 기능적으로 통합된 영역은, 미리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구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있는 현장에 있어서 그렇게 구성되기 때문이야말로, 그렇게 구성된다. 일견 동어반복(tautology)으로 생각되는 이 설명원리는 20세기 초기에 있어서 실험발생학의 조류를 만들고, 현대에는 진화발생학에 의해서 다시 그 설명적 가치가 발견되었다. Gred Müller는 후성설적 과정에서야말로 신규성을 설명하는 장이 있다고 말한다. 후성적 진화 이론(Epigenetic Innovation Theory)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발생에서 세포/조직 사이의 물리화학적 상호작용에 주목하고, 그것들의 구조와 과정에 잠재하는 특성에 응한 부작용으로서 신규적 형태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후성설적 시점에 있어서, 유전자 산물, 세포, 조직 등 발생을 구성하는 요소는 그것들이 적절한 형태에서 구동하는 구조적/동적 체계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들은 발생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위시킨다. 그 체계는 다양한 유기체나 부위에 특유한 형태를 갖기 때문에, 각개의 체계는 고유한 특성을 갖게 된다. 그 체계는 통상 동일한 유기체를 반복적으로 계속 생산하는데, 어떤 조건에서 변경이 일어난 경우, 그 소란에 대해 비선형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 반응은 개별의 특성에 의존한 부작용으로서 만들어지고, 최후 산물로서의 형태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단속적인 형태를 더해간다. 그렇게 해서 창시된 신규형태는, 그것이 체계의 부작용으로서 성립된 것에 의해, 이미 내적인 합목적성을 갖고 있고, 자명하면서 고유한 영역으로서 계속 생존하게 된다. 그것이 후성적 진화 이론에 의한 설명의 내실이다. 예를 들면 아래의 사례가 이 말을 예증한다. 원시적인 파충류에서 조류로 말한 뒷다리 형태진화에 있어서, 기계적 스트레스 의존적인 결합조직의 가소적 변형이 깊게 관계하고 있다. 원시적인 파충류에게 정강이뼈(경골)과 종아리뼈(비골)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가설적인 중간단계에서는, 종아리뼈의 축소로 응하고 정강이뼈와의 사이 결합조직에 역학적인 스트레스가 발생한 이유로, 간충조직이 자신의 가소성에 응해서 스트레스의존적인 힘줄에 미치는 종자연골을 발생시킨다. 그 후, 이 연골이 종아리뼈 모서리(비골능)을 형성한다. 비골능에 따른 정강이뼈와 근육의 직접적 연결은, 더욱 종아리뼈의 축퇴(縮退)를 가능하게 하고, 조류에게 고유한 후지형태를 만들어냈다. 이 진화과정은, 현생 조류을 사용한 실험발생학적 연구에 의해서 강하게 시사 된 것이다.
이 사례에 있어서, 소박한 의미에서의 주체성 혹은 의도성을 가진 영역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골능의 형성을 도입한 근-골격계에 있는 운동에는, 수동적동보행에 있는 그것과 같은 의미에서, 운동 그 자체에 잠재하는 주체없는 의도성이 어른거린다. 그 의도성은 보통 이미 존재한 것으로서의 이해에 반해서 열리고, 모든 변환은 합목적적 과정으로서 일거에 얻어진다. 근육-골격계가 그런 배치를 취하고, 그렇게 움직이면, 간충조직에 있는 가소성이라는 전제가 있는 한, 비골능이라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도출 될 것이다. 비골능이 만들어지는 문맥은, 그것들 형태요소의 배치와 운동이 개시된 시점에 있어서 이미 주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해되는 문맥성은, 비골능 혹은 전구적 연골이 이미 거기에 주어져서 소급적으로 성립하는 합목적인 논리다.
미수라 Andy Goldsworthy는 그의 작품 ‘Japanese Maple’에서, 후성설적 생성에 있는 운동과 목적성을 미니멀하게(아주 작은 규모로) 추상한다. 사슬모양으로 짜넣어서 띄워져서 작품화된 단풍잎은, 그 다음 날 자율적으로 모여서 중앙에 현저한 원형의 빈 공간을 형성한다. 사슬모양으로 띄어논 잎은 작가의 의지를 문맥으로서 성립하지만, 원형으로 모인 것이 의존하는 문맥은 작가의 의지로부터 단절한다. 그것은 물과 바람이 만들어낸 미세한 흐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진 잎들의 공간적 상호작용, 그것들의 운동특성이 만들어낸 문맥에 의존해서 형성되는, 잠정적인 형태였다. 사슬과 원, 작가는 이 양자를 작품화하고, 자신의 의도성의 아래로 회수한다. 의도성 혹은 문맥은, 설령 그것이 원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도, 항상 이미 구성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태로서 거기에 나타난다. 물, 바람, 단풍잎의 관성력이 여기에서 보이고, 후성설적 기구를 구성하는 운동은 원래 다원적이며, 그렇게 서로 포개지는 것이 조직하는 운동의 특성은, 그것을 그것으로 인식하기 위한 문맥을 사전에 알지 못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후성설적으로 만들어진 고정화된 새로운 형태를, 그것이 출현하는 이전의 상태에서 문맥성을 빼놓고 예상할 수 없다. 변형의 기구 그리고 그것들의 체계가 가진 특성이 소급적으로 이해된 순간에 있어서만, 변형은 자명하게 된다. 자명으로서의 변형은, 여러 특성을 가진 체계끼리 그 중첩의 묘(신비)에 있어서, 마치 우연히 만들게 한 것인가 하고 볼 수 있다. 이것이 Müller에 의해서 부작용으로 칭해지는 이유다. 다만 그 우연은 목적성을 가진 운동에 의해 소급적으로 유도된다. 비골능이 근육의 긴장에 의한 기계적 운동에 의해 유도된 것처럼. 그것들의 운동은 서로서로를 구성하는 요소의 가소성을 중첩시켜 서로 형성한 것에 의해서 보통 문맥을 만들어내고, 안정해로 식별되는 상태로 형태를 종착시킨다. 뛰어난 디자인이 최소의 요소를 적절하게 조형해서 조직을 만드는 것에 의해서 미리 의도해서 얻는 만큼 단순하면서 최적의 형태로 도입되듯이, 형태는 운동 속에서 만들어지는 내적/외적 요청=문맥에 응하여 예측불가능한 자명성을 창시한다. 생존조건의 파탄으로 죽어서 기존의 유기체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생각된 자명성의 변환이지만, 해당 유기체를 만들어내는 운동 속에 있어서 기존의 자명성을 변환해 가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는 그것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변환을 항상 이미 구성되고 있음에 의해서만 소급적으로 식별된다. 경찰관의 부름에 응해서 ‘돌아보는’ 행위야말로 그 사람을 사회적 주체로 구성/교란되는 계기가 인 것처럼, 운동은 그 자신이 관습적=문맥참조적인 점에 있어서야말로, 그것을 만들내는 교란하는 계기를 잠재시키고 있다.
운동이 후성설적으로 문맥을 만들어 낼 때, 운동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미 총체로서 변환되고 새로운 합목적성의 속에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반드시 모든 요소에 대해서 절대적인 변형이 부과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합목적인 전체성에 있는 요소는 다른 곳에 있어서야말로 의미를 획득하고, 상대로서 변환의 근거를 얻는다. 와타나베는 ‘분열증’환자와의 대화/치료과정을 철저하게 기술하는 일을 통해서, 타자성과 생성에 대해서 특필해야 할 통찰을 이루었다. 분열증이라는 약정에 있는 행위수행성으로의 자각에서 저자는, 환자가 말하는 세계로 스스로를 집어넣어 변용시키는 방법에 의한 대화/치료법을 통해서, 치료라는 것이 말하자면 환자가 아니라 치료자의 변환(metamorphose)에 있다는 강한 인상을 기술한다. 타자를 변용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자기를 변용시키는 것과 같은 뜻이고, 결코 안전지대에서 손을 놓고 말하는 종류의 사태가 아닌 것이다. 골격이 근육을 그 근육으로서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소급적인 운동으로서=행위수행적인 약정으로성 위치지어진다. 왜냐하면, 근육이 골격을 그렇게 결부시켜 운동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결부시켜 운동해야 할 문맥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고, 그 문맥성을 가진 바로 그 순간에 근육과 골격은 상호의존적인 전체로 위치지어지기 때문이다. 즉 그것을 그것으로서 인정하고, 운동을 구성한 때에 이미, 그것을 인정한 주체조차도 인정된 측과 불가분의 위상에 있고, 변용의 와중에 놓여있다. 골격은 근육에 있어서, 근육은 신경에 있어서, 신경은 감각모에 있어서, 저마다의 의미를 획득하고, 변용의 계기를 얻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육은 골격과 관계하고, 관절면은 서로 합치하고, 치아는 서로 맞물리고, 신경은 적절하게 이어지고, 빨판은 중앙에 흡인근을 가지고, 교미기관은 자웅으로 결합하고, 벌레나 바람은 꽃가루를 연결하고, 밀은 흙이나 습기를 총합하면서 그 몸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때 형태학자는 합목적성이 맞지 않는 틈으로 과정으로서의 변환을 계속 서술한다. 이 서술 속에는 서술자의, 서술대상의, 그리고 유기체 전체로서의 생성이, 끝까지 맞지 않는 이치로서 넓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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