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을 함께 걷다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모양이다. 오래된 것들은 시간을 되돌려놓은 효과가 있나보다.
오랜 만에 맑은 날씨였다. 파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따라 강기슭으로 접어들었다. 부라우 나루터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루터가 있는 기슭에서 강 건너 강천면의 한 마을을 연결하는 나루터였다는 내용이었다. 나루주변의 바위들이 붉어서 붉은 바우라는 명칭이 변해서 부라우 나루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붉은 바위는 안 보였다. 대신 커다란 너럭바위가 평평하니 넉넉하게 드러나 있었다. 친구는 나루터가 번성하던 때에는 이 바위 가까이까지 물이 찼을 거라고 했다. 나룻배가 접안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쉽사리 가늠되지 않았다. 너럭바위에는 오후의 햇살이 푸짐했다. 우리는 잠시 바위에 드러누웠다. 늦겨울 햇빛에 달궈진 바위의 온도가 깜빡 졸기 딱 좋았다. 혼자 왔을 때는 멀찌감치 보고 지나쳤는데, 친구랑 함께 오니 이런 호기도 누린다.
여강길 1코스는 여주역에서 출발해서 도리마을까지 18키로가 넘는 길인데, 옛 여강의 나루터들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옛 여강에는 총 18개의 나루터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세 곳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길에는 아홉구비를 가파르게 돌면서 걷는 오솔길도 있는데 이름이 ‘아홉사리 과거길’이란다. 경상도 충청도 쪽에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걸었던 길로 전해지는데, 강을 타고 오는 배삯을 아끼려는 이들이 낸 길이다. 굽이굽이 아홉구비를 돌아 쉬어가기 맞춤인 나루터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도 있다. 우만리 나루터도 그중 하나였다. 나루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했다. 수령이 4백년을 넘겼다고 한다. 한양으로 오르내리던 수많은 발길들이 다져놓은 길 위의 쉼터 아래서 다시 한번 오래된 것들을 우러러 보았다.
오래된 나무는 언제 봐도 그 위용이 당당하다. 지난번에는 늦가을 물든 느티나무 잎들이 바람을 타는 소리에 홀려 오래오래 서 있었다. 이번에는 한 겨울을 통과하느라 오롯이 드러난 나뭇가지들의 굴곡이 눈에 들어왔다. 4백년의 시간이 새겨진 굴곡이었다. 일본 큐수 남단 야쿠시마 깊은 숲에는 7천2백년을 넘긴 조몬스기라는 나무가 살고 있다고 한다. 야마오 산세이의 『어제를 향해 걷다』를 읽다가 알게 된 나무다. 저자가 1977년에 야쿠시마로 삶터를 옮긴 것도 이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느티나무의 굴곡을 따라가며 그 섬의 나무는 도대체 어느 만큼일까 상상해보았다. 언젠가는 꼭 한번 보고 싶은 나무, 딱딱한 껍질에 손을 대면 성스러운 기운이 스며든다는 그 나무를 떠올려 보았다.
이번 걷기는 우만리 나루터지점에서 코스를 벗어났다. 1코스 종점인 도리마을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나루터에서 마을로 접어들었는데, 낡은 집터 앞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여주역으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을 물었다. 한 분이 마침 가는 길이니 태워주겠다고 했다. 여강길 1코스를 걸으면서 충만해졌던 마음에 화룡점정의 응대였다.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돌아올 시간이 하염없이 늦어질 수도 있었는데 운수 오진 날이었다.
여강길 1코스를 함께 걸은 친구는 올해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고향 근처로 삶터를 옮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자주 못 볼 테니 그전에 한 번 걷자고 약속한 끝에 함께 여강길을 걸었다. 야마오 산세이처럼 오래된 나무의 부름을 받은 건 아니지만, 친구도 나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오래 간직해 왔다. 꿈을 향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친구를 응원했다. 도시를 떠나 “회귀하면서 동시에 천천히 자라는”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의 글을 선물로 전하면서.
글_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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