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비평공간 규문에서 공부하시는 선생님들의 이반 일리치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내 인생의 일리치"!! 선생님들은 일상 생활에서 질문을 던지시고 일리치의 해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십니다. 각자의 일상이 다 다른만큼, 글의 주제 또한 다양합니다. 건강, 도구, 노동, 젠더 등등! 선생님들의 글을 통해 미리 고민해볼 수 있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약보다 책! : 노년의 새로운 건강법
한현정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트로이의 왕자 티토누스를 사랑하여 그에게 영생을 달라고 신들에게 간청했고 신들은 청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에오스가 영원한 젊음도 함께 달라고 청하는 걸 깜빡 잊는 바람에 ‘영생’을 얻은 티토누스는 늙고 병든 몸으로 언제까지고 꾸역꾸역 살수밖에 없게 되었다. 티토누스는 병듦으로 인한 신체의 고통을 어떻게 참아내며 살았을까? 오늘날의 우리처럼 병원을 드나들고 약을 먹으며 해결했을 리는 없을 텐데.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백 세를 넘기며 살게 될 것이라는 우리가 바로 티토누스의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병들어 아픈 몸을 지금처럼 병원과 약에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는 걸까?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약으로 출렁댄다. 매스컴에서는 약 광고가 넘쳐나고 길거리는 약방이 즐비하다. 우리는 조금만 피곤해도 피로회복제를 마시고 속이 조금만 더부룩해도 소화제를 먹는다. 어디 이뿐이랴. 약의 홍수에 젖은 우리는 나날이 더 좋아지는 건강을 소망하며 너나없이 한 움큼의 비타민을 먹고, 아이들에게는 성장을 촉진하고 면역력을 길러야 한다며 영양제를 먹이며, 젊은이들은 건장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 보충제를 먹는다. 또 늙음으로 인해 아픈 데가 많은 노인은 노화 때문에 생긴 몸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약을 먹는다. 그런데 우리가 애정하며 먹는 이 약들은 과연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줄까? 우리는 다만 막연하고 불확실한 기대에 매달려 약만 먹어대는 건 아닐까?
87세이신 친구의 어머니에게는 고혈압, 만성 당뇨, 통풍, 관절염, 백내장, 갑상선 저하증 기타 등등의 겹겹의 노환이 있었다.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는 당신을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픈 다리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돌며 받은 처방전으로 약을 열심히 드셨는데 급기야는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고를 겪으셨다고 한다. 친구는 내게 어머니가 복용하신 약이 무려 열 가지가 넘더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사고가 중첩되는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한 탓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약을 줄여 주지 않은 의사를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그리스어에서 약을 뜻하는 단어- ‘파르마콘pharmakon’-는 치료의 힘과 살인의 힘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한다.(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미토, 54쪽) 이는 약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성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가 되는 성분도 함께 있으므로 신중하게 선택하고 적절한 기간만 복용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파르마콘’의 의미를 떠올리며, 친구의 원망에 근거가 전혀 없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치료의 힘과 살인의 힘이 함께 있는 약을 먹느니 약을 먹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의 몸 상태를 개선한다면 그게 가장 최선이겠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요즘은 잘 이루어지지 않지만 내게는 풋풋하던 시절 교정에서 사귀었던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다. 우리는 매달 만나 박물관도 가고 근교로 나들이도 하면서 나눈 이야기로 20대였던 때로 돌아가기도 하고 자신이 여행한 곳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을 소개해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화의 내용이 변해 요즘 나누는 대화 내용 중 거의 대부분은 의료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통증 호소로 시작해서 병원 나들이와 용한 의사 이야기로 이어지다가 약으로 맺어지는 패턴을 되풀이한다. 어떤 친구는 심지어 며칠 동안 기운이 없어 누워만 있었는데 약을 먹으니 상태가 나아져 여기에 올 수 있었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그녀를 우리 모임에 오도록 이끈 힘이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는 기쁨과 서로 간에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이 아니라 약이었을까? 친구의 생각처럼 약은 과연 몸의 상태를 좋아지게 만들었을까? 약에 대한 믿음은 혹시 ‘플라시보 효과’, 즉 환상이 아닐까? 그저 누워만 있을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도 먹고 잠도 푹 자고 공원 산책도 하면서 스스로 활기를 찾으려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인간은 교통과 교육이 없으면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환경은 인간이 스스로 걷고 배우며 자신의 신체를 통제함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느끼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어떤 약을 먹는다고 하면 약을 먹는 것으로 인해 자기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고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자기의 신체에 간섭할 기회를 잃고 만다. 약의 침략이 자기 또는 타인에 의한 투약에로 인간을 이끌어, 아직까지는 스스로 돌볼 수 있었을 자신의 신체와 투쟁하는 능력을 상실케 한다는 것이다.(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미토, 86쪽)
삶은 활동이다. 옛사람들은 팔다리를 움직여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반가운 이를 만나러 먼 길을 걸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닌데 2, 3층의 계단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내리고 불과 몇 백미터의 거리도 차로 이동한다. 이동이 발과 다리가 아니라 교통수단이 되자 우리는 걸어서 이동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약도 마찬가지다. 과식으로 속이 불편하면 몸을 움직여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소화제부터 사 먹고, 몸이 피곤하면 따뜻한 물에 몸을 잠시 담근 뒤 숙면을 취해 피곤을 풀려 하지 않고 피로 회복제부터 벌컥벌컥 들이킨다.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과 약과 같은 의료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잃었다.
일리치는 약에 의존하게 되면 자율적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는 능력을 상실하여 신체에 관한 자신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몸을 약으로 지키려 한다면 약에 대한 의존이 강화되어 자기 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나 행위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 감각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약부터 찾지 말고 몸에서 생겨나는 여러 증세를 민감하게 살펴서 그 증세에 대해 스스로 알아본 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의 몸은 각 기관의 상태도 그 수행 능력도 각자 다 다르다. 스무 살 청년이 가진 위의 소화력과 여든 노인의 소화력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개별적이고 고유한 자신의 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에 대해 고민해서 몸에 해로움을 초래하는 자신의 나쁜 생활 습관을 스스로 고치고, 생활 속에서 신체 활동을 늘리는 노력으로 체력을 강화하고, 명상 같은 활동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런 비의료적인 방법으로 몸에 대한 자기 인식과 자기관리를 꾸준히 실천하면서 몸을 돌보는 것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능동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일 것이다. 핵심은 결국 약에 의존해서 자기의 몸을 지키려 하지 말고 몸과의 관계를 자율적으로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지인은 통증 때문에 무릎 수술을 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을뿐더러 그나마 몇 년이 지나자 통증이 더 심해져 재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처음부터 수술이 아닌 방법을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 고통을 완화하고 무릎 병을 개선하는 여러 정보를 모으고, 모은 정보로 스스로 낫기 위한 실천을 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 노력했더라면 적어도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노인이 약을 복용하여 자신의 신체를 개선하고자 한다는 건 자기 몸을 노환이 없는 상태로 되돌리고 싶다는 바람에서 출발한다. 세월로 인해 구멍이 나는 뼈 조직을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자신의 얼굴에 생긴 검버섯을 지워 옛날의 피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약에 의존하려는 무력한 신체를 낳는다. 그러나 늙음으로 인해 쇠약해지고, 쇠약해진 탓으로 병이 드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노화도 노환도 세월이라는 불가항력으로 인해 생기는 생물학적이고 필연적인 변화이므로 약을 아무리 먹은들 해결되지 않는다. 노환을 약으로 해결하려 하면 오히려 친구의 어머니처럼 구급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필연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깊이 새기는 것이다. 늙음은 아무리 거절해도 저절로 찾아와 우리에게 덥석 안긴다. 우리는 이미 안겨버린 늙음을 떨쳐 낼 수가 없다. 따라서 수술이나 투약 같은 의료 서비스로는 노화도 노환도 개선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젊었을 때의 몸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가차 없이 내던져야 한다. 늙음을 긍정하고 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품위와 존엄을 찾으려는 용기를 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 관한 문제를 의료제도에 내맡길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건전한 비의료화”(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미토,182쪽)의 방법으로 노환을 잘 다스림으로써 병과 더불어 더 성숙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늙음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생각의 길을 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생각의 길이란 병원 나들이나 약과 같은 의료에 들이는 공을 자신을 가장 즐겁고 유쾌하게 해 주는 활동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기를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인지를 찾아 이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올려놓고 여기에 집중하며 산다면 노환의 고통은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행을 좋아한다면 병원 나들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자신의 에너지를 자기 신체 능력에 맞는 여행에 투입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소설 읽기를 좋아하면 소설을 읽고.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한다면 즐거움이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고 즐거움은 노환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이므로 살인의 힘이 들어 있는 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만일 어떤 노인이 스케치북을 펼치고 공원의 풍경이나 공원을 오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또는 돋보기를 쓴 노인이 바람 솔솔 부는 한적한 공원에서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의 주름진 얼굴만이 아니라 그의 돋보기와 화구 옆에 놓인 낡은 지팡이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내 글을 읽는 독자는 그렇지 않은가?
노인들이여! 우리 더 이상 남들이 좋다고 떠드는 약에도, 치료라는 허울만 두른 의료에도 기웃거리지 말자. 그 대신 우리 자신을 가장 즐겁고 유쾌하게 해 주는 일을 찾아 이를 즐기자. 그래서 노화한 신체를 긍정하는 능력을 키우고 능동성을 발휘하는 자율적 존재로 살아가자. 이것이 노화나 노환을 해결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필자 소개: 한현정은 이십여 년 전 병원에서 겪었던 경험으로 의료제도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고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읽으며 크게 공감했다. 지금은 세상과 사람을 폭넓게 이해하고 싶어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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