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엄마를 구할 것인가?
네 머리의 피를 보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줄거리를 붙잡기가 난해하다고 하지만 중심 사건은 세 가지이다. 윗세계에서 마히토가 자신의 머리를 돌로 찧은 것, 두 번째는 아랫세계에 내려가 키리코와 함께 와라와라를 구한 것, 마지막은 그 밑의 산실에서 나츠코를 깨운 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그 자체로는 개연성이 없다. 하지만 마히토의 모험 전체가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를 염두에 두면 이 사건들은 필연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마히토가 하굣길에 돌로 머리를 찧은 것은 이사를 온 그 다음날이다. 오프닝의 화재 씬이 지나고 얼마되지 않아 터지는 소년의 피여서 보는 관객은 누구라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소년의 머리에서 피가 꿀렁꿀렁 철철 흘러내리는 모습은 《원령공주》에서 증오에 찬 돼지의 신이 온몸으로 분노를 뿜는 장면을 바로 연상시킨다. 괴롭고 힘들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마음이 붉게 흘러내린다.
확실히 마히토는 미야자키 전작(前作)의 인물들과 다르다. 《라퓨타》의 시타와 파즈는 자신의 죽음을 감내하면서까지 라퓨타의 공포스런 무력행사를 저지하려 했다. 딸이라지만 4살 사츠키가 옥수수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아픈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은, 본인이야 잘 몰랐다 하지만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아찔하고 무서운 길이었다. 치히로는 돼지로 변한 부모와 저주에 걸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득히 먼 마녀 제니바의 집까지 아득한 여행을 했다. 소피는 자신을 할머니로 만든 황야의 마녀를 돌보기도 했고. 욕망쟁이 인어공주 포뇨는 자기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에 부모도 다 버리고 떠나오지만, 죽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 때 배가 고파 보채는 아기를 위해 자기 샌드위치를 양보할 줄도 알았다. 모두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마히토는 그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학교 친구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자기 머리를 찧는다.
자해하는 주인공은 미야자키 영화에서도 처음이지만, 사실 상상하기 쉽지 않은 설정이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인은 선한데 주변 환경이 어쩔 수 없이 곤경에 처한다. 그런데 마히토는 남이 틀려서나 환경이 나빠서라고 하지 않고 자기 악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 이 자해를 분석해보자.
마히토가 자기 머리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 가까운 원인은 학교에서의 다툼이다. 마히토는 전학 온 첫날부터 그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한다. 선생님이 마히토를 학급에 소개시켜주고난 뒤 맨 뒷자리 자기 책상에 가서 앉을 때까지 학급 전체가 화난 얼굴로 전학생을 흘겨보고 비웃는다. 결국 바로 그날 하굣길에 혼자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본 친구들의 시비로 싸움이 벌어진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근로봉사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마히토가 머리를 크게 다치고 오자 아버지는 학교 친구들이 머리를 쳤을 거라고 금방 의심한다. 정말 마히토가 자기에게 시비를 건 친구를 곤경에 빠트리려고 머리를 돌로 찧었을까?
조금 먼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히토는 왜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았나? 전학 온 첫날 아버지는 아들을 멋진 자동차에 태운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를 보고 근로를 지도하던 교사가 크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보다 신분이 높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마히토가 왜 다쳤는지 말하지 않자,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300엔을 기부하고 아예 학교 따윈 갈 필요도 없다고 크게 웃으며 만족한다. 이 젊은 아버지는 군수공장을 운영해야 해서, 같은 나이의 다른 남자 어른이 다 나가야 했던 징용을 피했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들이 보면 부럽기 짝이 없는 팔자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거나 큰 돈을 기부하면 사람들이 자기 앞에 머리를 굽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굶어 죽어가는 전쟁통의 사람들이 보면 부럽기 짝이 없는 팔자다. 그런데 마히토는 바로 이런 아버지가 싫다. 300엔을 기부했다는 아버지의 말이 듣기 싫어 차가운 수건을 눈 위에 덮고 아버지 말씀에 아예 대답하기를 피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눈길 돌리기가 오프닝씬에서 새엄마 나츠코를 만났을 때도 나온다. 처음 만난 사이나 다름없는데도, 나츠코는 마히토의 손을 일부러 배로 끌어 태동하는 아이를 느끼게 한다. 이때 마히토의 눈은 모자에 가려져 있다. 마히토는 나츠코가 자신을 만지는 것도 싫고 태어날 동생을 느끼는 것도 싫다. 나츠코가 싫은 것도 싫은 것이지만, 생명의 느낌 자체가 혐오스러운 모양이다.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 밑에서 커야 한다는 사실에 마히토는 이미 질려 있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것도 싫은데, 그 아버지 밑에서 또 누군가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바보스러움보다 마히토를 괴롭히는 것은 사랑하는 엄마가 더는 없다는 사실이다. 마히토는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 살아갈 어떤 이유도 없는데, 먹어라 배워라 사귀어라 등 주변에서 요구하는 일은 너무 많다. 그러니, 피곤하고 힘들어서 돌을 들고 머리를 찧으려 할밖에. 마히토의 적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없으니 나도 없다는 생각이 마히토의 적의이다. 마히토는 완벽하게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윗세계에서 마히토가 올라간 가장 높은 높이가 겨우 2층밖에 되지 않고, 탑의 계단은 첫 칸도 시작할 수 없었다는 점은 이런 숨 막히는 상태를 잘 보여준다.
내일의 쨈을 먹어라
이 자해의 악의는 아랫세계에 가서 비로소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된다. 마히토는 탑을 통해 의식의 밑바닥 세계로 떨어진다. 그곳에는 큰 바다가 있고 한 번씩 크게 파도가 일어나 온 세계가 동요했다가 잠잠해진다. 여기에서 마히토는 키리코라는 어부를 만나게 되는데, 키리코 아줌마의 난파선이자 집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런 여러 상황을 주도하는 핵심 이벤트는 먹음이다.
먼저 마히토는 아랫세계에서 거대한 무덤, 그 무덤 앞에 닫힌 황금 문을 본다.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아 굶주린 팰리컨들이 갑자기 나타난 마히토라도 먹기 위해, 무덤의 문을 밀치면서 마히토를 덮친다. 키리코는 무덤 문을 다시 닫기 위해 나서고, 마히토도 구한다. 그 다음 키리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히토에게 바닷속 대왕물고기를 자신과 함께 잡도록 하고, 성숙해지면 윗세계에서 아기들로 태어난다고 하는 와라와라에게 내장탕을 먹이게 한다.
마히토 입장에서 가장 큰 일은 키리코가 대왕물고기의 배를 가르라고 시킨 것이다. 생물을 처음 해체해보는 마히토는 칼질을 잘하지 못하고 때문에 물고기 내장이 마구 튀어 솟아오르게 되는데, 이때 터져 나오는 장기들에게 강타 당해 그만 피를 다 뒤집어쓰고 기절하게 된다. 깨어난 마히토는 이 물고기의 몸을 먹고 와라와라가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히토는 자신이 잡은 물고기의 내장탕을 먹고 생기를 얻은 와라와라들이 하나 둘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작품에서 처음 큰 미소를 짓는다. 미야자키 작품의 속도감은 바로 여기서 빛을 발하는데, 행복도 잠시 갑자기 다시 나타난 굶주린 팰리컨들이 이번에는 와라와라를 삼켜버린다. 그러자 불의 수호신 히미가 나타나 밤 하늘을 불꽃으로 쏘아 팰리컨과 와라와라를 함께 태워죽인다. 마히토는 히미가 와라와라를 태워 죽이는 줄 알고 ‘그만 둬!’를 외치지만, 실은 히미 덕분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와라와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기뻐한다. 살기 싫어 자기 머리를 찧기까지 했던 마히토다. 그런데 누군가 죽을까봐 온몸으로 막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탄생 자체를 기뻐할 줄 알게 되었다. 이는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와라와라는 토토로의 친구인 검댕먼지나 원령공주의 친구인 숲의 정령 고다마가 떠오르기도 하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빵빵하고 귀여운 생명의 정수이다. 마히토는 윗세계에서 어떤 아이로 태어나는지, 금수저인지 흙수저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생명이 태어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큰 감동을 맛본다.
이 지점에서 마히토는 엄마를 태운 그 불꽃, 그 화염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키리코는 무덤의 주인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무서운 팰리컨으로부터 마히토를 지키기 위해 불꽃 지팡이를 휘둘렀었다. 히미가 쏘아올린 불꽃(히미가 쏘아올리는 포즈는 토토로가 식물을 키우기 위해 취하는 동작과 같다! 두 손을 모으고 하늘로 쑤욱 뻗어! 그러니 히미는 토토로처럼 생장의 수호신이다)은 와라와라도 죽이지만 팰리컨도 죽이면서, 어쨌든 남은 몇의 와라와라에게 탄생을 보장한다. 생명의 탄생 과정은 위험하고 그 와중에 살리려고 했지만 죽일 수밖에 없는 일도 벌어진다.
그래서 와라와라의 승천을 보고 난 뒤, 식탁 밑에서 잠을 자다가 자기를 지켜주는 할머니 부적을 보고 ‘할머니들,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중요하다. 자기밖에 몰랐기에 자기따위는 죽어버려도 좋다고 함부로 생각하며, 죽음으로 계속 이끌리던 마히토였다. 이 마히토가 자기가 없어진 것을 알고 걱정할 윗 세계의 할머니들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작중 인물들의 대화가 서로서로 공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네 친구도 적도 뭣도 아니야!’라고 버럭 화를 내는 왜가리를 보면서 ‘그래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라고 묻는 마히토였다. ‘탑이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우니 일단 돌을 쌓으라!’고 재촉하는 큰할아버지는 정말 마히토가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식이어서 갑자기 왜 위쪽의 할머니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지 즉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말놀이의 연장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성숙에 대한 미야자키의 깊은 이해가 반영된 독백이다. 마히토에게 한 손으로 인사까지 하며 승천한 와라와라지만 윗 세계에서 마히토를 기억할 리 없다. 마히토는 자신이 누군지 알아주지도 않을 와라와라 하나하나의 안녕을 온몸으로 바랬다. 그러니 할머니들이 어찌 떠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훌륭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핏줄이어서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저 어떤 인연으로 돌보게 된 누군가를 걱정하는 이가 있다. 마히토는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돌로 내리쳤다. 하지만 마히토의 목숨은 할머니들의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탑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온몸으로 막아서던 그 든든한 어른들이 계시다는 사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면 너무 마음 아파하실 거라는 사실, 마히토는 자기 안녕이 아니라 ‘자기 안녕을 걱정할 그들의 안녕’이 걱정되고 미안하다. 와라와라가 내장탕을 먹고 성숙할 동안, 마히토는 할머니의 걱정을 먹고 자신이 컸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된다. 나를 걱정해주었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될 때, 슬프고 괴로운 일이야 많고 많지만 그런 나를 걱정하는 이는 더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사람은 큰다. 마히토는 죽음이 삶과 나란히 간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수많은 죽음과 수많은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죽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미안해’ 했다. 그것은 반성이 아니라 죄송이다. 자살과 같은 나쁜 생각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엉망인 내 삶도 응원했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이다. 나를 사랑해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힘 내며 살아갈 수 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키리코가 마히토에게 거대한 물고기의 배를 갈라보게 했다는 점이다. 북극의 사진사 호시노 미치오는 에스키모 아이들이 부족의 일원으로서 어른들과 함께 큰 고래를 잡고 해체해보는 경험을 부러워했다(星野道夫,『魔法のことば』). 단지 칼로 짐승의 배를 가르는 일 같아 보이지만, 마을 사람들 전부를 먹일 거대한 고래를 남김 없이 해체해 나누는 일은 아찔할 정도로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란다. 아이들은 생명의 숨이 모아졌다 흩어지는 과정에 나 자신을 온전히 던져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또, 막상 칼을 처음 쥐게 된 아이들은 거대한 고래 몸 어디서부터 칼을 찔러가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연장자의 경험에 의존해서 따라 해보게 된다. 칼로 고래를 찔러 보는 일 자체만 가지고, 에스키모식 교육은 잔인하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죽음과 삶의 경계에 생생히 서보게 되는 경험으로부터, 그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에스키모 아이들은 생명과 삶의 존귀함을 실질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했던 경험도 마찬가지다. 마히토는 키리코의 주방에서 엄마가 불에 타서 돌아가셨다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자신의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죽음도 온 생명을 향한 남김 없는 기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히토는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나서, 와라와라를 응원하게 된 뒤, 히미의 불꽃 공격을 받아 날개를 다쳐 쓰려져 죽게 된 왜가리까지 묻어준다. 죽을까했던 소년이 나쁜 팰리컨의 죽음을 경건하게 바라본다. 어떤 죽음도 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팰리컨이 죽는 자리가 화장실 옆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미야자키는 이전에도 한번 화장실 장면을 그렸었다. 첫 번째는 키키가 오소노의 빵집 2층에서 하숙을 하게 된 다음 날,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에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라퓨타》를 보고 누군가 지브리 공주들은 화장실도 안 가는 깔끔쟁이라고 비난을 했다 한다. 미야자키는 공주도 마녀도 화장실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일상적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굳이 화장실 장면을 집어 넣었다.
마히토의 오줌 누기 장면은 일상성의 강조를 위해서 삽입되지 않았다. 마히토가 오줌을 누고 있는 화장실 안이, 물론 상반신만 보여주지만, 그려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창문 안으로 오줌을 누는 마히토에게 찬란한 달빛이 쏟아진다. 배설은 더러운 일이 아니다. 온 생명의 순환에서 보면 들어간 것은 나와야 하고, 먹은 것은 뱉어져야 하며, 산 것은 죽어야 한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품의 결말에서는, 붕괴된 탑을 통과해 앵무새들이 쏟아져나오면서 나츠코와 마히토의 몸에 새똥을 잔뜩 묻히기도 한다. 새 삶은 새 똥을 필요로 한다!
키리코의 집에서 훌륭하게 물고기 배를 해체하는 법을, 다시 말해 서로 죽이며 살리는 이들의 장엄한 운명을 배우고 난 뒤, 마히토는 앵무새-대장간에 이른다. 이때 굶주린 앵무새들이 칼을 들고 위협하면서 마히토를 빈 식탁 위로 유인한다. 여기서 마히토는 이제 그 자신이 잡아 먹힐 처지에 놓이게 된다. 키리코의 주방에서 누군가를 죽인 자는 이제 누군가에게 먹히는 자가 된다.
이때 히미가 나타나 앵무새의 식탁에서 히미네 집 부엌 화로로 이어지는 불의 길을 따라 마히토를 구한다. 두 사람은 히미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빵에 버터와 쨈을 발라 먹으며 힘을 내는데, 마히토는 얼굴이 온통 쨈으로 뒤범벅이 된다. 마히토가 두려워했던 붉은 피는, 이 붉은 쨈 덕분에 맛있어진다. 드디어 마히토는 죽음의 불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왜냐하면 그 쨈 병에 ‘TOMOR’이라는 단어가 보이기 때문이다. 토마토(TOMATO)쨈 병에 딸기쨈을 담은 것이 아니라, 그 쨈은 내일의 쨈이다. 피는 내일을 향한다. 죽은 엄마를 태운 화염은 여기서 이제 맛있고 단 식사가 된다. 아랫세계에서 불과 피, 피와 쨈은 이어져 죽음과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분신(分身)을 찾아라
마히토에게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건은 나츠코 엄마 구하기이다. 윗세계의 키리코 할머니는 나츠코를 구하러 가겠다는 마히토를 말렸다. 이때 마히토는 두 개의 이유를 들어 탑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나츠코를 구할 수 있는 이는 같은 피를 공유하고, 탑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기밖에 없다. 둘째, 엄마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확인해야 한다!
마히토는 엄마를 구한다라는 말로 친엄마와 계모를 구하는 일을 동시에 표현하지만, 친엄마를 구하면 계모는 계모일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은 모순이다. 마히토는 왜 ‘엄마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모순을 풀어보자.
우선 이 말 자체는 탑에 들어가자마자 해결된다. 탑 안에서 왜가리-남자는 등 돌리고 누워 있는 엄마를 보여준다. ‘함정’이라며 키리코가 말려도 마히토는 성큼 다가선다. 하지만 이 엄마는 왜가리-남자가 만든 찐득하게 녹아내리는 허상이었다. 엄마 구하기란 일단 여기서부터 이미 해결된 미션이다. 그리운 엄마, 괴로운 엄마의 죽음,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빚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왜가리-남자의 말대로 마히토는 엄마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불꽃 속에서 고통받기만 했으리라는 것은 자신의 상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허상에 매달렸던 마히토였기에 그는 윗세계에서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다. 녹아내리는 엄마를 확인하기란 끔찍한 일이지만,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하는 그 엄마란 과연 무엇이었나를 확실하게 생각해보게 했을 것이다.
구해야 할 ‘어떤 엄마’란 따로 없다. 이제 마히토는 큰할아버지가 불러서도 아니고, 왜가리-남자가 잡아 끌어서도 아니고, 스스로 결심하고 아랫세계로 내려가게 된다. 이는 키리코가 내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 장면과 비교해보면 마히토의 심정이 대단히 확고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히토는 왜 아래로 내려가는가? 구해야 할 두 번째 엄마인 ‘나츠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히토가 탑으로 들어오기 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불탄 도쿄를 피해 시골로 이사 간 마히토 부자를 맞아주는 것은 아름다운 외모에 단호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새엄마 나츠코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보자마자 ‘이 사람은 엄마를 완전히 닮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골 저택에 도착한 마히토를 보고 어릴 적 히사코와 나츠코를 돌본 적이 있는 할머니들은 ‘완전히 제 엄마를 닮았다’고 한다. 순서대로 정리하면, 히사코-나츠코-마히토는 똑 닮았다.
마히토와 나츠코는 실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신발 정리를 잘 한다. 두 사람 모두 활을 쏜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이자 남편인 남자에게 어떤 불만을 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둘은 서로를 잘 이해한다. 특히 머리를 다치고 돌아온 아들 앞에서 ‘누가 헤코지를 했는지 찾아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르는 아버지를 말리려는 나츠코의 모습은, 나츠코가 마히토를 이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적어도 나츠코는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 학교에 가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마히토가 싫어할 것임을 충분히 짐작한다. 마히토도 나츠코가 탑으로 간 이유를 짐작한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뭔가에 이끌려서 들어간 것이라고. 이사 온 첫날 마히토도 탑으로 이끌리듯이 걸어 들어 갔었다.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있는 집을 등지고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마히토가 나츠코의 심정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나츠코 역시 지금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면이 사람만 바뀌고 반복될 때도 많다. 마히토가 돌로 다친 머리 때문에 쓰러지자, 나츠코도 피곤해서 방으로 물러간다. 표면적으로는 입덧 때문이라고 하지만 동시 사건이다. 마히토가 사라지자 나츠코가 일곱 할머니들과 함께 활을 들고 마히토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나츠코가 탑으로 사라진 뒤, 이제는 마히토가 일곱 할머니들과 함께 나츠코를 찾아 나선다. 이처럼 외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설정으로 보아 나츠코는 마히토의 분신이다.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엄마를 구한다는 말은 자신을 구하겠다는 뜻이다. 환영의 엄마가 아니라 즉 아버지가 바라고 시대가 바라는 어떤 환영의 나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히토는 아래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럼, 엄마를 구하기 즉 나를 구하기가 이루어지는 장면은 어디에 있는가?
답은 나츠코의 산실에 있다. 나츠코는 아랫세계에서 아이를 낳으려 한다. 사실, 그런 아이는 태어나서는 안 된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와라와라처럼 생명의 정기로 성숙하여 윗세계에서 새 숨을 부여받는 일이어야 한다. 키리코는 오직 이런 생명만을 눈물로써 먹이고 키우며 응원한다. 히미의 불꽃 전쟁도 와라와라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써, 저 세계에서의 최종적 승천에 대한 기도였다. 맨 처음 아랫세계에 도착한 마히토는 어떤 무덤 앞에 이른다. 이때 항해중이던 키리코가 갑자기 나타나 굶주린 팰리컨에 의해 열린 그 문을 닫는다. 키리코는 절대로 그 문이 열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 무덤이 고인돌을 닮았고, 나츠코의 산실 역시 고인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랫세계의 수호자인 히미와 키리코의 입장에서 보면 고인돌에서 뭔가가 나와서는 안 된다. 즉 나츠코는 아랫세계에서 출산해서는 안 된다.
나츠코는 이런 금기를 어기고 죽음에 이끌리듯 아랫세계에 내려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이럴 때에 마히토가 들이닥쳐 나츠코를 깨운다. 위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자 다정하기 이를 데 없던 나츠코가 세상 무서운 얼굴로 마히토에게 경악하며 소리친다. ‘네가 정말 싫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마히토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미야자키는 히사코=나츠코=마히토의 방식으로 캐릭터를 응축했다. 나츠코의 ‘네가 싫다’는 말을 바꾸면 ‘내가 싫다’가 된다. 만약 나츠코와 마히토가 윗세계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둘 모두 살기 싫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모양 이 꼴로 여기 이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다. 산실에서 나츠코와 마히토는 둘 모두 금기의 흰 실로 칭칭 감긴다. 생명을 흰 천으로 꽁꽁 감싸고 싶은 상태 속으로 둘 다 들어간다. 이때 둘은 다시 도플갱어처럼 같은 옷을 입은 같은 존재가 된다. 마히토가 ‘네가 싫다’라는 말을 듣고 엄마에게 위로 올라가자고 했다면, 그것은 싫어했던 자신을 직시하게 된 뒤 새롭게 살아갈 것을 결심할 수 있어서다. 엄마 돌아가자라는 말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이다. 이제 살아가자!
여기서 다시 떠올려볼 수 있는 설정이 있다. 작품에 고인돌 모양의 침실이 하나 더 나온다는 것! 바로 키리코네 주방에서 마히토가 잠들었던 식탁이다. 고인돌과 식탁 모두 아래에 발, 위에 상판을 가진 구조로 되어 있다. 건드려서는 안되는 금기의 주물(呪物; 무덤의 경우라면 황금 문이나 흰색띠이고 식탁이라면 할머니 인형들)에 의해 보호받는다. 이 식탁 아래에서 마히토는 몇 번이나 깨어난다. 키리코는 무덤 주인이 깨어나면 안된다고 했다.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나츠코이고 마히토다. 하지만 둘 모두 금기를 깨고 일어난다.
아랫세계의 제일 첫 장면으로 돌아가자. 무덤의 황금문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었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마히토가 무덤에서 깨어났다면 그는 이제 배우지 않는 자, 따를 무언가가 없는 자, 허상인 뭔가를 쫓지 않는 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히토는 허상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정했던 자신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기 안의 어둠, 밉고 싫은 것을 많이 품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고 했던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라퓨타》에서부터 줄곧 모성을 탐구했다. 그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지만 한쪽 끝에 강하게 키우는 훈련사 같은 도라(《라퓨타》) 할머니가 있고, 다른 쪽 끝에 모든 것을 품어 안는 그란맘마레(《벼랑 위의 포뇨》)가 있다. 미야자키는 낳는 자도 키우는 자도 전부 이런 거대한 모성성으로 표현해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표면적으로는 ‘엄마를 찾는다’고 하지만 실은 미야자키가 그려왔던 엄마는 없다. 새엄마 나츠코는 마히토의 분신이고, 친엄마 히미도 엄마가 아니라 친구로 나온다. 미야자키는 낳거나 키우는 일이 더는 불가능한 시대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런데 전통적인 모성성이 그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와라와라나 마히토의 남동생이 태어나는 등, 생명 탄생의 이야기는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풍부하다. 가장 성숙했던 나우시카도 비행에, 치료에, 연구에 바빠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치히로가 사랑한 소년은 작은 강물의 신이었다. 소피는 하울과 사랑을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황야의 마녀나 마르클과 같은 자식 아닌 관계들이 있었다. 그런데 마히토에게는 피를 나눈 동생이 생긴다. 엄마에 대한 형상화 없이도 말이다. 물론 이 동생과 형제애를 나누라는 작품은 아니다. 마히토는 아랫세계에서 자신의 악의를 온전히 품고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하면서 나아가야 함을 배운다. 하지만 엄마나 형제와 함께는 아니다. 그렇다면 미야자키가 수많은 마히토들에게 던지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자, 다음 주를 또 기대하시라!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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