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리듬이었어!”
몸은 ‘오랫동안’을 싫어한다
양성의 도는 오랫동안 걷지도 말고, 오랫동안 서 있지도 말고, 오랫동안 앉아 있지도 말고, 오랫동안 누워 있지도 말고, 오랫동안 보지도 말고, 오랫동안 듣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수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허준, 『동의보감』, 동의문헌연구실 옮김, 법인문화사, 2012, 215-216쪽)
이 글을 읽자마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좀 일어나서 움직이세요. 그러다 진이 다 빠질 것 같아요.” 연구실 공부방에서 함께 지내던 학인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그분은 한 번 책상 앞에 앉으면 보통 한두 시간은 앉아 있다. 처음에는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왠지 저런 자세로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알고 한 말은 아니다.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중간 중간 일어나서 움직여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본인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분은 가끔 갑작스레 방전이 돼서 소파에 눕곤 했는데,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습관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몇 달 전, 옛 동료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이틀 뒤, 종아리에 생긴 하지정맥류 치료를 위한 시술을 하기로 했는데 걱정이 돼서 전화를 했단다. 몇 달 전 걷기를 하러 떠난다는 말을 들은 터라 근황을 물었다. 한 달을 계획하고 하루에 7-8시간 걷기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무릎에 통증이 조금 느껴지지만 계획한 대로 걸을 생각이라고 했다. 학생들 독서지도를 할 때도 이랬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빈틈없이 수업 시간표를 짰다. 하지정맥류의 원인이 아직은 다 안 밝혀졌지만 오래 서 있거나 오래 앉아 있거나 하는 직업군에서 흔하게 생긴다고 한다. 그때는 내리 앉아있더니 이제는 내리 걷기만 하다니…. 그의 하지정맥류도 앉든 걷든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는 생활 습관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로 글을 쓰는 중에 나도 허리가 뻐근했다. 그날 오후 2시간 정도 남산 산책을 했더니 한결 나아지는가 했다. 그런데 글 마감이 다가오니 그 동안 써 두었던 글을 모아서 주말 이틀 동안 마무리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좀 길게 시간을 잡고 글쓰기를 했다. 이때부터 다시 더 세게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수시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는데도 통증이 가시지를 않았다. 결국 계획한 시간만큼 글쓰기를 하지 못했다. 글쓰기를 하다가 요통을 겪는 경우가 처음이 아니다. 이럴 때 마음이 급해지고 생각은 더 막힌다. 그럴 때면, ‘그때 그렇게 유튜브를 보지 말았어야 해. 통화는 왜 그렇게 해가지고, 상담을 꼭 그때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등등 시간을 알차게 쓰지 못한 걸 후회하곤 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원인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중간 중간 딴 짓을 한 게 원인이라면 앞의 두 사람처럼 그렇게 진득하게 하면 된다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분들의 몸도 내 몸도 그렇게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있는 걸 거부했다. 그러면 뭐가 문제였나?
천지는 쉼 없이 움직인다
『동의보감』은 천지자연을 생명을 기르는 전범으로 삼는다. 태양은 한시도 멈추어 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들쭉날쭉 떠오르거나 제멋대로 지지도 않는다. 한결같이 제 궤도를 움직인다. 하늘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채로 천둥번개가 치면 그와 함께 제 길을 간다. 그러면서 만물을 길러낸다. 날씨 또한 한 순간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바람도 빛도 온도도 습도도 계속 바뀐다. 다만 우리의 감각이 거칠어서 미세한 변화를 다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렇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을 어긴 적은 없다.
우리 몸은 이렇듯 변화무쌍한 자연의 움직임과 끊임없이 기운을 주고받으며 그때그때 반응을 하고 있다. 아마도 매 순간 정밀한 기구로 측정을 한다면 체온도 혈압도 맥박도 수시로 바뀔 것이다. 길에 나서면 또 다른 상황들과 마주친다.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거나 갑자기 자동차가 끼어들거나 옆에서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면 순간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진다. 오르막을 오르면 숨이 차고 벤치에 앉아 쉬노라면 다시 호흡이 안정된다. 바람에 묻어오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도 몸의 세포들이 다르게 반응한다. 만나는 사람의 표정 하나 말 한 마디에도 생리적인 반응이 달라진다. 이렇듯 우리 몸은 한 순간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천지만물은 매순간 쉼 없이 변화하면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순간 생명은 끝난다. 그러니 『동의보감』에서는 양생(養生), 즉 생명을 잘 길러서 건강하게 장수하려면 ‘오랫동안’ 걷지도,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누워 있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변화 없이 한 자세를 오래도록 지속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나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공부’라고 하더라도 몸에 내재된 생리적인 메커니즘을 도외시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면 수명이 단축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천지자연의 이치대로라면 같은 자세의 지속이 몸에 해로운 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좀 혼란이 온다. 그렇담 우리가 늘 들으면서 자란 “꾸준하게”, “진득하게”, “항심을 가지고” 등등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생명을 잘 길러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려면 공부나 일에서 성취를 이루겠다는 꿈은 포기해야 하나? 반대로 공부에서 진보를 이루려면 몸을 잠시 후순위로 미뤄두고 엉덩이를 붙이고 진득하니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훈련을 해야 하는 건가.
변해야 오래간다
『주역』은 천지자연의 이치에서 인간 삶의 윤리를 도출한다. 그리고 그걸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말-괘사, 효사-을 붙여놓았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양생이든, 『주역』에서 말하는 삶의 윤리든 모두 천지자연의 이치를 준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그 둘은 모순 될 리가 없을 것이다.
『주역』에는 총 64가지의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들이 이 64가지로 수렴된다고 본다. 그 중 서른두 번째가 뇌풍 항(恒) 괘다. ‘항’이라고 하면 ‘항상성, 항심, 지속하다, 꾸준하다, 변함없다’ 등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사람은 자고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한다고 하면 엉덩이를 붙이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절로 연상된다.
그런데 『주역』 항 괘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하고 있다. “세상의 이치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움직이면 끝마쳐서 다시 시작하니, 곧 오래 지속하면 궁지에 몰리지 않는 이유다.” 움직이면 끝마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끝마쳐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유독 눈에 들어온다. 생각해 보면 특별할 게 없는 말이다. 이번 봄이 맘에 안 든다고 여름으로 안 가고 봄을 고집한다면? 낮이 생각만큼 멋지지 않았다고 밤을 거부한다면? 사계절의 순환도 낮과 밤의 순환도 우리의 생명도 일찌감치 끝이 났을 것이다. 이어서 “항구성은 한 가지로 고정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한 가지로 고정되면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오직 때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바꾸는 것이 곧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도”이다. 변화하고 바꾸지 않으면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는 게 천지가 가르쳐주는 이치다.
그런데 하나의 진술에 모순되는 듯한 개념들이 나란히 등장한다. 움직임과 지속, 변화고 바꾸고 지속하고. 이게 공존 가능한가?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필자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인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치를 상세히 밝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한 가지를 고정하여 집착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2015, 656쪽)
한 마디로 ‘변화하며 지속하기’ ‘끝마치고 다시 시작하기’. 이것이 항상성의 비결이란다. 태양이 떠오르는 걸 잘 생각해 보자. 늘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것과 우리가 책상에 앉아 오래도록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것과 뭐가 다른 걸까? 고작 100년을 살다 가는 우리에 비해 얼마나 오랜 시간 태양은 뜨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는가. 그런데 어떻게 태양은 만물을 살리는데 우리는 내 한 목숨마저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가.
다시 태양을 보자. 한 순간도 같은 자리, 같은 모습일 때가 없다. 그렇지만 절대 궤도를 이탈하지는 않는다. 일정한 궤도를 돈다는 것은 원을 그리면 돈다는 뜻이다. 그리고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방향을 바꾸지 않고 원을 그릴 수는 없으니까. 같은 움직임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순간 방향을 바꾼다. 이걸 거부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우주의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이 이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의 일상도 이와 비슷하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강의를 하고(또는 듣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다시 세미나를 하면서 생각을 주고받고, 다시 저녁이 되면 잠자리에 든다. 이러한 다양한 일상에는 이미 방향전환이 포함되어 있다. 이걸 잘 이끌어 가면 그 자체가 순환이 될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하나에 집착하면 방향전환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원을 그리면 움직이는 순환의 리듬을 놓쳐버리고 만다. 문제는 리듬이었다. 리듬을 만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걸 왜 그렇게 고도의 어떤 경지로, 그렇게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했을까.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아서다. 생명이 살아가는 기본 원리인 생리적인 조건을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 * *
그렇다면, 해법은 나왔다. 궤도(비전)를 분명히 설정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순환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일단 ‘오랫동안’ 한 자세로, 같은 활동을 하는 걸 피하도록 일정을 짜는 거다. 그렇다고 산만하게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말에 오랜 시간을 글쓰기에 투자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리듬을 만들어 주라는 것이다. 40분 쓰고 20분 쉬고, 이런 식으로. 이 비율은 자기 몸에 물어보면 될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가 반복적으로 앓고 있는 요통의 원인은 내 몸의 생리를 무시한 탓이 가장 크다. 아마 다시는 이런 통증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침 몇 대로 수습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몸 아니고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 걸까. 몸이 원하는 건 바로 리드미컬한 움직임이었는데. 바보같이 몸의 생리적인 리듬을 무시하다니!
글_복희씨(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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