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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씨가 들려주는 동의보감이야기

[복희씨가들려주는동의보감이야기] 병이 약이다

by 북드라망 2022. 9. 27.

병이 약이다

 


“이래 살아 뭐하노”
무병장수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지인이 있다. 짝달막하고 다부진 체격에 세상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실천하려고 애쓰시는 분이다. 한글 성경은 물론이고 영어 성경 필사도 수십 회를 하시면서 두뇌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여든이 다 된 연세에 자두 과수원을 손수 일구면서 인터넷 장학재단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피력하셔서 어머니와 나를 놀라게 했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여름에 자두와 몇 가지 농작물을 보내주심으로써 그 실행력과 노익장을 증명하셨다. 귀농 전, 서울에 계실 때는 가끔 어머니와 왕래가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뜸하게 안부를 주고받다가 코로나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며칠 전 『동의보감』을 읽다가 갑자기 그분이 생각났다. 전화를 드렸더니, 뜻밖에도 일 년 전에 뇌졸중이 와서 지금은 요양사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지내신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여쭈어 보았다. 올해 아흔이신데, 작년 이맘때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 쓰러지셨단다. 그런데 평소 워낙 건강하셨던 터라 뇌졸중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단다. 여행 끝에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방으로 와 쉬었단다. 그렇게 골든타임을 놓친 채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큰 일이 났구나 하는 걸 알아차렸단다. 언어 장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보행기를 밀고 마당을 몇 바퀴 도는 정도는 가능하고, 숟가락질도 힘겹지만 오른손으로 하고 있다고 하셨다. 손 운동도 할 겸 영어 성경도 타자로 치고 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만 하기 다행이라 말씀드렸더니, 몸이 이 모양이라 과수원도 방치 상태고 계획했던 인터넷 장학재단도 진척이 잘 안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평생 병원에도 한 번 안 가봤는데 하루아침에 이 지경이 되니 아무 의욕이 안 생긴다며 한참 신세 한탄을 하신 뒤 전화를 끊으셨다.

한참 동안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에이고, 이래 살아 뭐하노…” 라던 그분의 넋두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고령이신 데다가 갑작스레 닥친 변고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당신 몸을 받아들이기 어려우시겠지 싶었다. 그분의 심리적인 불안과 막막함에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90년 세월 동안 그분이 보여준 자신감과 여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 같았던 그 자유로움이 저토록 허약한 기반 위에 있었던 건가 하는 씁쓸함이 남았다.

 

 


아프거나 아플 예정이거나

 

“하늘의 형[天形]은 건(乾)에서 나오는데, 천형에는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있다. 태역이라는 것은 아직 기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고, 태초라는 것은 기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태시라는 것은 형이 처음 나타난 것이고, 태소라는 것은 질(質)이 처음 나타난 것이다. 형과 기가 이미 갖추어진 뒤에 아(痾)가 생기고, 아에서 채(瘵)가 되며 채에서 병이 되는 바, 병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허준, 『동의보감』, 동의문헌연구실 옮김, 법인문화사, 2012, 200-201쪽)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질병 탄생의 과정이다. 우주는 태역-태초-태시-태소의 단계를 거쳐서 생성된다. 다시 말해 기-형-질의 스텝으로 만물이 그 형체를 드러낸다. 그런데 기와 형이 갖춰지면 아-채-병이 함께 생겨난다. 여기서 아(痾)란 기와 형이 생기면서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순환 장애를 뜻한다. 그러나 아가 곧바로 병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병이 될 인자를 몸에 품고 있다. 채(瘵)는 아의 순환 장애가 더 심화되어 피로와 스트레스를 느끼는 단계다. 딱 부러지게 어떤 병을 앓고 있진 않지만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주로 채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채의 상태가 지속되면서 심해지면 병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와 형을 갖추면 반드시 순환 장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와 형을 갖추지 않고 투명인간으로 태어날 묘수는 없다. 그러니 질병은 몇몇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고통이나 장애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반드시 수반되는 생명 탄생의 필수 조건이다. 한 마디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아프거나 앞으로 아플 예정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니 태어나는 이상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오래도록 질병 치료에 매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의문이 든다. 특히 도저히 원상으로 회복되는 게 불가능한 질병을 앓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도 류머티즘으로 10여 년 고생한 끝에 어느 날 문득 “건강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나? 꼭 다 나아야 하나?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나?” 하는 질문들이 어디선가 날아왔다. 위 인용문을 읽어보니 이것이 오랜 병상 생활에 지친 환자들이 궁여지책으로 취하는 자기합리화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질병이 생명의 탄생 과정에 내재된 것이라면, 140억 년 인류의 진화 과정을 통해 병이 자연스런 생명활동임이 우리들의 유전자에 깊이깊이 새겨졌을 듯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병을 떼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산물이 아닌가.

 


그렇다고 병을 찬양하자는 말은 아니다. 아프면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럴 때조차 어떻게든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너무도 소모적이고 반생명적이지 않은가. 뇌졸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인의 넋두리가 내게 씁쓸함을 남긴 이유도 이 때문이었나 보다. 그분의 한탄이 당신의 90년 인생을 전면 부정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 나아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겠구나 싶어서 씁쓸했던 것이다.

 


‘정상’이라는 환상
며칠이 지나면서 지인의 그런 반응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도 5,6년 전부터 하나 둘 여기저기 통증들을 호소했다. 자기가 왜 이렇게 아픈지를 모르겠다며 갑자기 신세를 한탄하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나이 들면 아픈 게 당연한 것 같은데 본인이 나이를 먹을 땐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 같다. 작년 겨울 여든을 눈앞에 둔 큰오빠가 엉치가 아파서 걸음을 걷는 게 불편하다며 괴로움을 호소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머니도 돌아가기 몇 년 전부터 엉치뼈의 통증으로 불편을 겪으셨다.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또 곁에서 지켜본 오빠가 “내가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 인생이 서글프다”고 하니 뜻밖이었다. 게다가 막내 동생인 내가 20대부터 지금까지 류머티즘과 함께 살고 있고 오빠 역시 나를 돌보며 함께 살기도 했는데, 이 모든 걸 보면서도 왜 자신은 예외일 거라 생각했을까?

여기에는 건강에 대한 어떤 전제와 환상이 있는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건강하다는 기준에 못 미치면 몸이 비정상인 것이고 그러면 내 존재가 훼손되고 삶이 훼손된다는 강력한 전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제 위에 나는 그리고 내 가족은 안 아플 것 같은 환상. 아파서는 안 된다는 환상, 병에 걸리더라도 원상회복이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쌓으면서 살아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어른들은 아픈 걸 당연하게 여겼다. 특히 나이 들어 아픈 건 사람이 누구나 죽는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치료 또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동의보감』에는 일상적으로 먹는 식재료 한 가지만으로 된 처방이 수두룩하다. 물론 병원도 의사도 흔치 않았던 의료 환경도 한몫을 했겠지만. 병을 삶과 분리시키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금만 몸에 이상이 느껴져도 곧바로 병원에 달려간다. 그러면 첨단 기계가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수치와 도표로 몸 상태를 정상 비정상으로 구분해준다. 그 수치와 도표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그걸 정상으로 만들기 위한 치료행위가 이어진다. 게다가 그건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 밖의 사람이 치료에 개입하는 건 불법이거나 미신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병도 치료도 내 삶과는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병이란 것이 내 몸에서 일어나는 한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이걸 삶과 분리시켰을 때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다음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존 머리라는 의사는 아내와 함께 소말리아 난민 수용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유목민들에게는 빈혈이 흔하고, 이들은 말라리아, 결핵, 브루셀라 균 등 다양한 악성 병원체에 노출돼 있었다. 그럼에도 눈에 띄게 병원체에 감염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 의사는 이들 유목민 중 일부만을 먼저 철분으로 치료해 보기로 했다. 일부 유목민에게 빈혈 치료를 위해 철분보충제를 주었더니 갑자기 감염률이 급등했다. (샤론 모알렘, 『아파야 산다』, 김영사, 38-39쪽)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철분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세균 역시도 생명체이니 철분을 자양분삼아서 생명을 유지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철분이 많은 개체군일수록 전염병에 더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각종 전염병에 노출될 기회가 많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소말리아인들은 오랜 진화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철분 부족을 선택한 것이다. 현대의학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은 모두 빈혈 환자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감염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기에 정상비정상의 척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 유지에 최적인 철분 함량으로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러니 정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환상인가.

 


질병과 잠재력
현대의학이 심어놓은 정상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병은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출구가 될 수 있다. 심각한 질병일수록 그리로 가는 문은 더욱 크게 열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습관, 그것도 지속적인 습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힘으로는 굳어진 습관을 바꾸기란 쉽지가 않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고는 기존의 운동 상태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게 물리법칙이다. 이 관성의 법칙을 거슬러 살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해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원상회복을 하려는 이유다. 그러니 절대 회복 불가능한 질병일수록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실제 병을 앓게 되면서 인생을 바꾼 사례는 부지기수다. 심각한 병일수록 그것과 함께 살아가려면 더 이상 살던 대로 사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살던 대로 살아서는 일상을 꾸릴 수가 없다. 다른 감각을 키워야 하고 다른 감정을 써야 한다. 화를 내면 바로 몸이 경고를 보내고 욕심을 내어 무리를 할 수 없도록 제재를 가한다. 취침 시간을 바꾸도록 하고 식습관의 변화를 요구하고, 즐기던 취미활동을 멈추게도 하고, 활동 패턴을 바꾸게도 한다. 하지 않던 산책을 하게도 하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게 한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을 데가 없으면 자신도 모르게 생전 안 쓰던 일기를 쓰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안 하던 생각도 하게 되고 건강할 때는 만날 수 없었던 참 많은 것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병은 삶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발현되지 않던 내 안의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 안에는 길게는 인류의 진화 과정 전체가 짧게는 내 생애 전체가 잠재되어 있다. 거기서 우리가 평생 동안 사용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특히 지속적인 습관에 안주하는 것이 안정된 삶이라고 생각하는, 변화를 싫어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늘 쓰던 근육, 늘 하던 생각, 늘 만나는 사람들, 늘 하던 말, 늘 하던 일, 늘 좇던 욕망에서 벗어나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능력을 펼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그런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질병은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문제는 나를 힘들게 하는 병을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지인도 이미 뇌졸중이 왔고 곧바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그걸 당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삶이 그보다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싶다. 평소보다 더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지금의 몸이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 안의 새로운 힘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자두 과수원과 인터넷 장학재단에 비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크나큰 베풂이 될 터이다. 어느 성인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으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신 말씀이 새삼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글_복희씨(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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