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뿌리가 되어주는 사람들
와, 드디어 연말이다. 바르셀로나는 코로나19에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는 않지만, 심적으로 많은 변화와 부침을 겪었던 신축년이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자축하고 있다. 올 여름에는 올해의 끝이 너무나 멀게 보였더랬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흐른다. 낯설기만 했던 UAB에서의 첫 학기도 대략 끝이 보인다. 초반에 까딸란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마무리는 안정적인 편이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새 보금자리를 꾸렸다는 소식은 뉴욕과 쿠바의 친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다.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과 대화를 할 여유도 생겼다. 최근에는 뉴욕 친구 루시벨과 통화를 했는데, 그는 나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측은한 말투로 덧붙였다. 새 장소에 가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을 도대체 몇 번째 하고 있냐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선택권이 없었다고 쿨하게 응수했고, 인생을 미리 계획하는 건 별 소용없는 일 같다고도 말해주었다. 루시벨은 생각해보니 자기는 뉴욕에만 있었는데도 계획이 몇 번씩이나 뒤집혔다며 깔깔 웃었다. ㅎㅎ. 맞다. 이렇게 가든 저렇게 가든, 원래 인생에 쉬운 길은 없다.
유랑자가 친구를 사귀는 법
여하튼 바르셀로나에서 세 번째 이방인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명실상부한 ‘유랑자’로 각인되었다. 뉴욕, 아바나, 바르셀로나에서 내가 머물렀고 또 머무르게 될 시간을 계산해보면 평균 사 년 정도 된다. 사 년이면 외국인으로서 적응기를 마치고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할 시기다. 인간 사회에서 언어가 능통치 않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아기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시기를 통과하고 일상 소통에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대략 삼사 년이 걸린다. 그런데 나는 적응이 될 시점마다 자리를 옮겨버리는 셈이다.
유랑 생활에는 장점이 많다. 세상을 넓게 배울 수 있고,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겸손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늘 아쉬운 것은 친구들이다. 혈혈단신으로 외국을 떠도는 이방인에게, 친구란 곧 타지에 정착할 수 있도록 뿌리가 되어주는 존재다. 왜 뉴욕과 아바나가 나에게 특별한가? 그곳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자기 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도시가 예전처럼 친밀감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좋은 친구들과 열심히 우정을 쌓고 나면 나는 또 다시 그 자리를 떠나간다. 그간의 우정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종종 서로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바로 옆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는 없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뉴욕에서는 은연중에 존재하는 인종의 분리선을 뛰어넘는 게 쉽지 않았고, 아바나에서는 쿠바인과 외국인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많은 도전거리를 안겨주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나의 상황이 너무나 특수한 나머지 나보다 십년은 어린 동급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안하지는 않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배운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의 인연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곧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두를 필요도 없다. 열려 있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시점에서 진실한 우정이 찾아올 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나의 옛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콜롬비아의 다니엘라, 캐나다 언니 마라, 뉴욕의 루시벨, 쿠바의 마이델과 브라질의 라리사, 일본의 댄, 기타 등등. 짧게는 사 년에서 길게는 팔 년까지, 그들과 오랜 인연을 쌓게 될 줄은 나조차 몰랐다. 바르셀로나의 인연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열린 마음과 상냥한 태도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헌데 최근에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사 년마다 새 언어를 바닥부터 다시 배우는 경험이 이 인성 훈련(?)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절대로, 무의식적으로라도 잘난 척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간에 매 순간 겸손해지도록 온 우주가 도와주는 중이다!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지만 여하튼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나는 부족한 언어 때문에 매번 도움을 받는 ‘좀 모자란 친구’로 살고 있다. 그래서 동급생들이 늘 한 박자 느린 이 나이든 편입생을 옆에 끼워주는 것만으로도 심히 고맙다. 또 매번 도움을 받기만 할 수는 없으므로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지도 고민하게 된다. 시험 기간에 필요한 자료를 나눠주거나, 공부를 어려워하는 친구와 스터디를 조직하거나, 하다못해 밝게 인사해주는 일들을 소소하게 실천하는 중이다.
나의 부족함은 좋은 사람들을 곁에 모으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내 옆에서 꾸준히 도와주는 친구들은 다들 착하다. 인성이 좋지 않고서야 어찌 이 귀찮은 일을 자처하겠는가? 그러면 나는 추수철에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처럼 얼른 이 친구들을 우정의 바구니 속에 담는다. 물론 그와 동시에 나를 무시하는 친구들에게 화내지 않는 법도 연습하게 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속도를 답답해하는 것일 뿐이고,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나 역시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냉대에 상처받지 않고 호의 앞에 가식을 떨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진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도와주지 않는 사람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조건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불리한 상황에서도 얻는 것들이 생긴다.
편입생 삼인방
이제부터 지금까지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사귄 친구들을 소개해보겠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알아가는 단계이긴 하지만, 다들 따뜻한 기운으로 내 학교생활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
내가 기적처럼 만난 편입생들부터 소개하겠다. 지난 화에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UAB는 매년 외국 대학 출신 중에서 세 명의 편입생을 뽑는다. 그런데 나는 나 외에 누가 편입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UAB가 합격자의 실명 대신 접수 번호와 출신 학교만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나 같은 경우는 접수 번호 옆에 ‘아바나의과대학교’라고만 적혀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분명히 나를 쿠바인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다른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편입생 중 한 명은 동유럽 조지아의 의과대학 출신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코스타리카의 의과대학에서 편입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 조지아인이고 코스타리카인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편입생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같은 편입생끼리 뭉치면 유용한 정보도 나눌 수 있고 여러모로 서로 도울 일도 많겠지만, 천 명이 넘는 의대에서 이 두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를 바 없었다. 설사 나처럼 1학년과 2학년 수업을 동시에 듣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 학년에 존재하는 반이 열일곱 개나 된다. 우리들이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 모래사장의 바늘 같은 확률이 현실이 되었다. 수업 첫 주, 의학사 교수가 출석을 부르다가 조지라는 학생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조지는 조지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조지아가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도 아닌데, 조지아 출신 학생이 많을 리가 없다. 어쩌면 이 친구가 나와 같은 편입생 동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냉큼 다가가서 물어보았고, 내 짐작은 사실로 드러났다. 조지는 어머니가 까딸루냐 출신 새아버지와 결혼을 하면서 조지아에서 다니던 의대를 그만두고 올해 바르셀로나로 건너왔다. 장난기 많은 부잣집 도련님인데, 스페인어와 까딸루냐어를 반년만 배우고 바르셀로나로 직행할 정도로 용감한 친구이기도 하다.
한편 나는 우리 반에서 루이스라는 친구를 특별히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반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 안 되는 친구였는데, 원래는 간호사로 영국에서 오 년 간 일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의사의 꿈에 도전하고 싶어서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UAB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인 그라나다 출신이었는데, 그쪽 지방의 특색을 고스란히 닮아서 성격이 쾌활하고 부드러웠다.
어느 날 나와 루이스는 우리가 삼학년부터 가게 될 UAB 소속 병원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대화 중 그에게 ‘나는 너와 달리 편입생이라서 과정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대꾸했다. “나도 너랑 같은 편입생인데?”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알고 보니 루이스는 영국에서 코스타리카를 가서 그곳에서 일 년 동안 의대를 다니다가 UAB로 넘어온 것이었다. 이럴 수가! 네가 그 마지막 ‘코스타리카’ 편입생이란 말인가? 한 반에 학생이 스무 명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편입생 세 명이 전부 같은 반에서 만날 수가 있나? 우리 셋은 이 필연 같은 우연에 탄복했다.
그 후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한동안 마음이 든든했다. 이제 더 이상 UAB의 미로 같은 행정 시스템 속에서 홀로 헤맬 필요가 없다. 헤매기야 계속 헤매겠지만, 최소한 그 길에는 루이스와 조지가 함께 할 것이다!
까딸란어 동지
10월부터 나는 교내에서 제공되는 까딸란어 수업을 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본 수업을 따라갈 수 없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까딸란어 수업은 의외로 새 친구를 사귀기에 안성맞춤 현장이었다. 의대 바깥에서 타전공 학생들과 섞일 수 있는 기회인데다가, 모두들 까딸란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동병상련의 처지였기 때문이다. 국적들도 화려했다. 스페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 중국, 유럽 출신들도 많았다.
이 중에 까딸란어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나와 계속 연을 이어가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수의대 학생인데, 교환학생으로 일 년 간 UAB에서 공부한다고 했다. 이름은 엘레오노라. 몇 번 말을 섞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서로에게 좋은 느낌을 받았다. 엘레오노라는 뉴욕과 아바나를 거쳐 바르셀로나에 온 나의 여정에 깜짝 놀랐고, 의학 전에 철학을 공부했다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탁 쳤다. 자신 역시 문학을 공부하다가 나중에 수의대로 진로를 바꿨다는 것이다. 나 역시 엘레오노라의 따뜻한 눈빛과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나중에 시간이 빌 때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다.
몇 주 뒤 엘레오노라는 잊지 않고 나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교내 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으며 친해졌다. 엘레오노라의 고향친구이자 수의대 동기인 니콜도 알게 되었다. 그는 가녀린 체구의 청년이었지만 졸업 후에 말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싶다고 했다. 대형 동물을 다룰 때는 눈빛으로 주고받는 기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재미있는 말도 들려주었다. 우리는 기말고사를 끝낸 후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니콜과 엘레오노라는 자신들처럼 교환학생으로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는 다른 유럽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었고, 덕분에 그날 밤 나의 우정의 영토는 프랑스와 폴란드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중국인 이웃들
나는 기숙사에서도 알음알음 친구를 만들고 있다. 내가 사는 기숙사 Y동에는 중국인들이 꽤 많이 산다. 요즘 나와 제프리는 앞집의 샤오와 옆집의 보와 말을 트고 지내고 있다.
샤오와 보는 진심으로 대단한 친구들이다. 우선 보는 동물보호법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스페인어도 모르고 영어도 능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자기가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교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UAB를 선택해서 용감하게 왔다고 했다. 보는 가정도 있고 아이도 있다. 법조계에서 일한 경력도 몇 년 된다. 그러나 동물보호법을 공부해서 동물들에게 이바지하고 싶다는 마음을 접지 못하고, 남편의 지지를 얻어 홀로 공부하러 스페인으로 나왔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 오자마자 팬데믹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는 일 년이 넘도록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족이 그립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이가 이제는 영상통화를 해도 자신을 잘 못 알아본다며 시무룩해했다. 그렇지만 보는 강단 있는 사람이다. 외로움 때문에 공부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
샤오는 남미역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중국에서는 스페인어 통번역 전공을 했고, 바르셀로나에 온 후로 까딸란어 수업도 차근차근 들어서 중급까지 도달했다. 한 번은 샤오가 자신의 칠레 친구가 박사 논문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자신이 출판기념회 사회자가 되었다면서 나를 초대했다. 기념회에 가보니 샤오는 남미 사람들 속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으로서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칠레와 페루의 역사적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언젠가 아시아인으로서 스페인어를 배우는 경험에 대해 샤오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샤오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박사과정을 밟는데도 자신이 아직 부족한 게 많고, 소화해야 하는 텍스트는 많은데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왜 이 친구는 자신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모를까? 외국어로, 그것도 언어가 얇디얇은 이과가 아니라 언어의 바다와도 같은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왜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 할까? 나는 샤오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에 중국에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스페인인이 있다고 해보자. 어떨 것 같나’라고 물었다. 샤오는 기적 같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기적이 바로 너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광활하고 스펙터클한 ‘정신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도 말해주었다. 스페인인들은 하루 종일 스페인어밖에 안 쓴다. 포르투갈인이나 까딸루냐인들이 모국어에서 스페인어에 도달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매일 같이 영어, 스페인어, 까딸란어, 거기에 아시아어(중국어/한국어)까지 왔다 갔다 하는 우리들은 뇌 운동을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이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나이 들어도 치매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순간 샤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내 기분도 개운해졌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쓸데 없이 스트레스 받지 말자. 이왕 여기까지 오게 된 것, 한 번 제대로 즐겁게 공부해보자.
바다 건너, 자랑스러운 나의 뿌리들
그 외에도 통 연락을 안 하는 나를 괘씸히 여기지 않고 기억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다. 특히 일 년 전에 쿠바에서 헤어진 친구들이 연락을 자주한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힘겨운 길을 걷고 있다. 나처럼 쿠바에서의 학업을 접고 타국으로 편입한 사람도, 그곳에 남아있기로 결심한 사람도, 본국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음식을 구할 수 없고, 누구는 시간과 돈을 잃었다. 다들 예기치 못한 장애물 앞에서 고전하고 있다.
최근에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나이라는 나와 내 룸메이트였던 라리사가 쿠바를 떠난 후로 몹시 외로워하고 있다. 그는 앙골라에서 온 유학생인데, 행복한 미소와 맑은 눈, 고운 목소리를 지녔다. 나이라는 나와 라리사를 친구 이상으로 여겼고 ‘자매’라고 부르면서 아껴주었다. 그런데 팬데믹 이후로 의지가지 했던 가까운 사람 둘이 동시에 쿠바를 떠났으니, 게다가 하필이면 음식도 찾기 어려운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으니 허전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는 고전한 끝에 최근에 마음에 맞는 새 친구를 사귀는데 성공했다. 또 내가 소개시켜준 한국 친구(현재 쿠바에서 영상을 공부하고 있다)와도 대화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라리사는 아르헨티나로 가서 의대를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라리사가 여덟 살 어린 동생을 손수 돌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어떤 고생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의대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결정을 했을지, 너무 잘 상상되어서 내 마음이 쓰라릴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라리사는 벌써 마음 정리를 다 한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한 번 주어진 길을 끝까지 가겠다고 내게 말했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라면 여기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이 둘과 대화를 주고받는데, 낯선 감정이 내 안에서 강하게 맴돌았다. 나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적어서 보냈다. 이때까지 나는 이 말을 거의 써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허나 이제는 알겠다. 그 어떤 대단한 스펙을 지닌 청년들보다도 나는 내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온 세계가 뒤집히고 있는 이 기막힌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 그 생명력이 자랑스럽다. 내 곁에 남아서 나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그들이 자기 시간을 성실하게 만들어가는 게 백배는 더 기쁘다. 아, 왜 공감능력은 항상 고생을 직싸게 한 후에만 증진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이 마음을 이들과 함께 빚어낸 시간 속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친구들,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나의 뿌리들. 세계 구석구석에 자리한 그들이 넘치는 생명력으로 어떤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고 뻗어나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들의 친구로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므로. Estic molt orgullosa de vosaltres, amics!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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