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단비, 영화 수업
시험이라는 노동
요즘은 시험기간이다. 돈을 받지 않는 책상 노동자가 된 기분이다. UAB에서 두 학기를 보내면서 내 공부 방식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쿠바와 큰 차이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수업을 해보니 상당한 차이점이 보였다. 첫 학기에는 UAB의 스타일을 ‘의학’이라는 학문의 시야를 폭 넓게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이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긍정적인 해석은 내가 아직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수업 계획이 균일하지 못한 편입생의 슬픈 운명에 따라서 나는 이번 학기에 수업의 양을 불가능할 정도로 늘려야 했는데, 학기가 진행될수록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 사이의 교류와 교수님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걸까? 배움은 일방적으로 벌어졌다. 강의 때 공부 내용을 잔뜩 던져주고는, ‘알아서 공부하시오’라고 명령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시험 출제 방식은 더 고약했다. 강의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이 많이 나왔는데, 배운 내용을 얼마나 잘 소화했는지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시험을 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때문에 학생들은 낙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학기 내내 달고 살았다. 강의를 듣자마자 곧바로 시험을 준비하는데, 이 정도면 공부가 아니라 노동이다. 즐길 사이가 없다.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UAB 의대에서 제대로 된 공부는 병원에 나가는 3학년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병원에 가면 학생들 사이의 유대관계도 두터워지고 시험도 강의 내용과 더 일치하기 때문에 한결 더 수월하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그 대신 처음 1~2학년은 학생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걸러내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즉 이 관문을 통과해야 의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다. (물론 쿠바에서도 처음 1~2학년은 그런 컨셉이긴 했는데, 이곳과 비교하면 쿠바의 ‘체’는 구멍이 훨씬 큼직하게 뚫려있다.) 그 방법론도 물론 이해할 수 있지만, 친구들이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심리상담가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는 걸 보면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든다.
생뚱맞은 영화 수업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까? 틈틈이 제프리를 꼬셔서 산책도 가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같은 기숙사 동에 사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식으로 숨을 돌리고 있다. (한국에서 이고지고 온 책들도 읽고 싶지만, 책을 손에 잡기 시작하면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을 내팽개치고 책을 마구잡이로 읽기 시작할까봐 자제하고 있다ㅠㅠ. 이번 학기만 ‘금독’ 해보자 다짐하는 중이다…)
또 하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영화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수업의 제목은 <의학, 문학, 영화>다. 문학은 교수님이 틈틈이 소개해주시는 정도이고, 실제로 수업의 골자는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문화에서 ‘의학’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또 일상생활에서 ‘의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영화 명작들을 통해 살펴보는 시간이다. 처음 커리큘럼에서 이 수업을 발견했을 때 참 생뚱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반가웠다. 삭막한 의대 생활에 내리는 단비 같은 수업이군! 나중에는 학기 수업양이 부담되어서 이 수업을 내년으로 미룰까 잠시 고민했지만, 수강 신청 변경 과정이 귀찮아서 그냥 듣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밝혀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수업이 내년부터는 폐강될 예정이었다. 나는 이 독특한 수업의 막차를 탄 행운의 학생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대여섯 개의 영화를 보았다. <프랑케슈타인>, <시계태엽 오렌지>, <주정뱅이 천사>… 장르가 극히 다른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의사가 등장인물로 나온다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 의사는 주연이 되기도, 조연이 되기도 했다. 캐릭터도 달라졌다. 정치의 전락한 명실상부한 악인이 되었다가, 사회의 고통을 직시하는 증인이 되었다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 힘이 부쳐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도 했다.
영화를 틀어놓는 세 시간은 일주일 중에서 내가 숨을 돌리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영화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였다. 결핵에 걸린 젊은 야쿠자와 술주정뱅이 의사 사이의 우정을 다룬 <주정뱅이 천사>는 학교에서 그토록 강조해온 ‘의사-환사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치료의 핵심이라는 것은 모든 의대생들이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학교 수업에서는 항상 핵심을 비껴나가고 껍데기만 핥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한다. 내가 쿠바 꼰술또리오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이 모든 말들이 공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헌데 <주정뱅이 천사>에서는 의사-환자의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교과서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 폭력적이고 무례했으나, 본질이 살아 있었다. 늘 술에 반쯤 취해 살면서도 전후 일본에서 고통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의사의 마음, 그리고 큰 소리를 떵떵 치면서도 죽는 게 무서워서 몰래 의사를 찾아오는 야쿠자의 약한 모습이 관객의 마음과 공명한다. 야쿠자가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고 떠났을 때 의사는 거기에 대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저 녀석 어차피 다시 올 거야. 그리고 병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좋은 신호야. 아직 인간적이라는 뜻이거든.”
여하튼 수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숙제는 없다. 영화만 보고 가면 된다. 그러면 영화광인 교수님이 열과 성을 다해, 과한 제스처와 함께 영화를 해석해주신다. (교수님은 우리들도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기를 바라시지만, 늘 반쯤 폐인 상태로 사는 의대생들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세상에 이런 호사가 다 있나 싶다. 영화 수업은 이번 학기 내 최애 수업이 되었다.
세상 종말 이후의 가족주치의
물론 이 수업에도 시험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면 점수로 평가받는 시험은 아니고, 교수님이 요구하는 글쓰기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 나는 끽해야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하나를 골라서 분석하는 과제이겠거니 예상했다. 그런데 중간고사 시즌이 오자 교수님은 폭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중간고사 대체 과제의 정체는 바로 영화 시놉시스 창작하기였다! 시놉시스를 쓸 때 염두에 둘 것은 딱 하나, 지금까지 우리가 본 영화들이 ‘의학’을 다룬 것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의학이라는 주제를 창작물에 연결해야 했다. 그 외에는 어떤 제한 조건도 없었다.
이런 기상천외한 과제가 다 있나? 하필이면 과제 제출 직전에 시험 두 개가 연달아 있었고, 마지막 시험은 과제 제출일 당일이었다. 시험을 끝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다섯 시간 밖에 없는데… 결국 나는 시험공부를 하는 틈틈이 시놉시스 구상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너무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일단 주제를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자기한계를 인정한 의학의 본질은 무엇인가’로 잡자, 이를 ‘현대 과학 기술이라는 물질적 기반이 사라졌을 때 과연 의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구체적인 상황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이야기가 저절로 하나씩 떠올랐다.
주인공은 한국 청년 의사다. 이제 막 인턴을 끝내고 내과 레지던트가 되기 직전이다. 이 친구는 레지던트 수련에 돌입하기 전 마지막 방학인 셈 치고 자기 친구가 사는 바르셀로나로 놀러왔다가, 그 직후에 세계3차대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온 세계가 핵전쟁에 들어가고 이 청년은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에 발이 묶인다. 전쟁은 이 년 간 온 인류의 문명 기반을 파괴하면서 지속되었고, 그 여파로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서 해수면이 급속도로 상승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섬이 된 산꼭대기에서 살게 되었다. 주인공은 이 년 후에야 가까스로 배를 타고 (이제 비행기는 없다)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온 청년은 이제 자기가 더 이상 ‘의사’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건이 그 사이에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원래 자기가 일하던 병원은 물에 잠겼고, 익숙하게 사용했던 각종 의료 기계들은 새로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청년의 의학 지식이 전부 이제는 사라진 첨단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통제와 민간요법에 의존해서 병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때 같이 의대를 졸업했던 의사 동기들이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이들은 모두 의사라는 직업을 버린 지 오래였다. 첫 번째 친구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신앙심이 깊을수록 병도 빨리 나을 수 있다고 연설하면서, 집에서는 신도들에게 나누어줄 대마초를 몰래 키운다. 두 번째 친구는 금수저 집안이라 개인 배를 소유하고 있는데, 수도에서 진통제를 구매해서 고립된 섬 지역에 유통시키면서 폭리를 취한다. 세 번째 친구는 장기 밀매 사업을 꾸리면서 떼돈을 벌고 있다. 공부밖에 할 줄 몰랐던 마지막 친구는 서양의학을 버리고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네 명의 친구들은 모두들 주인공을 자기 사업(?)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데…
여기까지 이야기를 발전시키면서 나는 스스로의 기발함에 감탄했다. 오, 이 정도면 나름 시놉시스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야기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감이 안 잡혔던 것이다. 이 청년은 무엇을 택할까? 무엇을 할 것인가? 내 머릿속의 주인공은 소심하고, 딱히 소명의식도 없고, 부모님이 의대를 가라고 해서 그냥 의사가 된 청년이었다. 이 주인공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택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런데 과제 제출 마감시간은 매초마다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라서 필터 없이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주인공은 결국 자기 클리닉을 연다. 친구들의 사업에 동참하기는 싫고, 그 외에 할 줄 아는 게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들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클리닉을 열었다고 멋대로 오해한다. 첫 번째 친구는 주인공의 클리닉 뒤뜰에다가 대마초를 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친구는 주인공의 클리닉을 통해 자기 사업의 손님들(희생양들)을 더 끌어 모을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클리닉을 방문해서 주인공과 한의학 세미나를 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지만 정작 주인공이 기다리는 동네 환자들은 누구도 클리닉을 방문하지 않았다. 결국 너무 지루해진 주인공이 자발적으로 왕진을 나가면서 얼떨결에 동네 가족주치의가 된다. 그리고 왕진에 필요할 때마다 친구들을 살살 꼬셔서 이들의 자원을 활용한다. 혈액, 진통제, 약초…
그런데 다 쓰고 나서 보니 내 이야기가 영락없이 ‘뻬스끼사’를 나가는 ‘쿠바 꼰술또리오 의사’의 이야기였다. 글을 쓰면서 쿠바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나는 내가 살아온 대로만 상상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발견하고 깔깔 웃었다. 아, 뿌리 깊게 박혀버린 쿠바의 기억이여! 이 과제를 끝내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나 시나리오 작가를 하는 게 아니다. 역시 창작과 상상의 길은 어렵다.
글_김해완
'메디씨나 지중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디씨나지중해] 언어 속 균형감각 (0) | 2023.01.04 |
---|---|
[메디씨나지중해] 첫 번째 마무리 (0) | 2022.12.07 |
[메디씨나지중해] 집 찾아 삼 만리 (0) | 2022.11.01 |
[메디씨나지중해] 병원 배정 이벤트 (0) | 2022.08.02 |
[메디씨나지중해] 색색의 스페인, 빛바랜 로마, 반가운 친구 (0) | 2022.07.19 |
[메디씨나 지중해] 먹는데 진심인 사람들 (0) | 2022.04.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