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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휠체어 탄 공주, 이태원에서 맨탈해방되다

by 북드라망 2012. 8. 7.

내 친구 제이(J), 복지카드에는 ‘1급 중증 지체(뇌병변) 장애인’ 이라고 되어 있다. 나는 약 일 년째 이 친구의 활동 보조 일을 하고 있다. 제이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은 가족들이 도와주고 있고, 나는 주로 외출 보조-복지 일자리 근무하러 갈 때, 친구 만나러 갈 때, 교회 갈 때, 물건 사러 갈 때 등등… 동행한다. 서른 살 꽃다운 아가씨 제이는 장애를 통해, 장애와 함께, 세상 어딘가 있을 자신의 운명적 짝을, 새로운 삶의 출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드레스의 꿈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그동안 제이의 외출은 행선지가 분명했다. 어디에 뭘 하러 가는지가 뚜렷했다. 그런데 여름이 되면서 공부 모임이 방학을 하는 바람에 제이는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래서 여행 작가 양성과정이니 사진 강좌니 하는… 구청이나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몇 가지 프로그램을 알아 보았으나 일하는 시간과 겹쳐서 신청하지 못 했다. 고민 고민… 올여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뭐 꼭 정해진 프로그램 따라갈 필요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그래서 올여름 제이가 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활동은 ‘방황’이다.



거기에 왜 가? 몰라,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어서. 거기 가서 뭐 해? 몰라,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이러면서 그저 길을 나서보는 거. 제이는 그런 걸 한 번도 못 해봤다. 왜냐하면 제이가 한번 움직이려면 주변의 여러 조건들이 같이 따라줘야 하는데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일로 주위를 번거롭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이가 한번 외출을 하려면 아침에 엄마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제이를 씻겨줘야 한다. 아버지가 밥을 챙겨줘야 한다. 활보가 와서 이동을 도와줘야 한다. 전철역의 리프트가 운행되어야 한다. 이 리프트 운행을 위해 공익요원이 달려와야 한다. 그런데 “어디 가세요?” 할 때 “몰라요. 그냥 나가보는 거예요”라고 답하기는… 눈치가 좀 보이는 것이다. 혼자서는 집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내본 제이로서는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매장을 둘러보면서 아이쇼핑을 하는 것 말고 다른 방황은 별로 해보지를 못 했다. 막연하게 품고 있던 기대나 환상을 직접 가서 겪어보는 것. 그래, 올여름엔 그걸 해보자! 제이는 이렇게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우리는 이태원에 갔다.


이태원에 가면 볼거리가 많다고 해. 제이가 이렇게 말해서 길을 나서긴 했지만… 나는 짜증이 났다. 이태원에 가봐야 별 거 없다. 내가 얼마 전까지 그 동네 살아봐서 안다. 거긴 그저 미군부대 근처 유흥가 아닌가. 미국의 하위 소비문화. 돈이라도 많으면 한바탕 돈 쓰고 놀고 온다지만 제이와 나는 ‘수급자의 수급자’ 처지가 아닌가. 게다가 나는 아침 활보 마치고 바로 달려오느라 점심도 못 먹었다. 배는 고프고, 날은 덥고, 다른 할 일이 태산같이 밀렸는데 땡볕을 무작정 걸어다니자니 나는 죽을 지경이다. 아유 목말라. 여름엔 물을 얼려서 가지고 다녀야겠어. 하면서 쳐다보니 제이는 전혀 동요가 없다. 햇볕이 따가울 텐데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거리 구경에 여념이 없다.


여기 오니까 외국에 온 것 같아. 지하철 역에도 안내문이 영어로 되어 있네. 어머 저 흑인 여자 좀 봐. 붉은 드레스에 금박 무늬. 탄자니아의 여왕 같다. 여왕이 보행기에 아기를 태우고 가네? 세상에… 아기도 까맣다. 너무 귀여워. 아하하 길거리에 파는 이 커다란 팬티에 만 원 짜리가 그려져 있네? 이 모자 좀 봐! 노란색 가죽바지, 이렇게 짧은 걸 누가 입지? 와 이건 유러피언 스타일의 가방이래. 멋지지? 바이올린을 켜는 피에로 옆에서 사진 한 장 찍어줘…


이태원 하면 떠오르는 노래, 이태원 프리덤~♬



이러면서 이태원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제이가 완전히 열광한 한 가게가 있었으니… 그것은 ‘드레스’ 가게였다. 반짝이 드레스, 벨벳 드레스, 하늘하늘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등등 온갖 종류의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운 것은 물론이고 가게 입구와 거리에까지 쏟아져 나와 있었다. 드레스 가게 앞에서 제이는 잠시 넋을 잃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꾸어 온 운명의 장소를 이렇게 만나다니! 제이는 감격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서서 열광적인 박수는 받는 것. 이것이 제이의 오랜 꿈이다. 그런데 좀처럼 제이를 불러주는 무대가 없다. 드레스를 입을 기회가 없다. 어떻게 하면 드레스를 한 번 입어보나… 주위를 둘러봐도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없다. 드레스를 입으려면 파티가 열려야 하는데 사람들은 일하느라 바빠 도통 파티를 즐길 여유가 없다. 파티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잠깐 구경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리라!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내 인생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우뚝 서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제이는 20대를 매진해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주위 사람들이 대학 가라고 할 때 제이는 “대학엘 왜 가? 난 시집갈 거야!”라고 공언해왔던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짝을 찾겠다’는 제이의 집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정말, 몇 명의 남자들이 제이네 집에까지 찾아왔었다.


첫 번째 남자는 손발이 조그만 왜소증 남자라서 제이가 싫다고 했다. 두 번째 남자는 저 멀리 제주도에서, 그야말로 ‘물 건너서’ 찾아왔는데, 선보러 온 남자가 옷차림이 어찌나 꾀죄죄한지 잔뜩 구겨진 와이셔츠 목깃에 때가 꼬질꼬질하더란다. 그래서 제이 남동생 옷을 몇 가지 챙겨줬는데… 세상에나 만상에나, 이 남자가 그 옷을 들고 제주도로 가서 소식이 없더라고. 제이 얼굴 보고 달려왔는데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세 번째 남자는 대체로 무난했다. 그래서 얘기 재미나게 하고 있는데… 그때가 여름인지라 이 남자가 더웠던지 저기요… 죄송하지만… 하면서 머리통을 훌러덩 벗는데… 세상에나 만상에나, 대머리 총각이었던 것이다!



거 봐라. 얼굴 보고 찾아온 남자들이란 다들 그 모양이다. 이제 남자 믿지 말고 능력을 길러라! 서른살이 되면서 제이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리지 않겠다. 내가 찾아 나서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하고, 시도 쓰고,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하는데… 이 모든 활동이 제이에게는 ‘짝을 찾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20대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면서 제이는, 서른이 되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으나 못 했던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드레스 까페’에 가 보는 일이다. 홍대 앞에 그런 까페가 있다고 한다. 온갖 종류의 예쁜 드레스들을 진열해 놓고 잠시 입어보도록 빌려주는 까페. 제이는 거기 가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세상에나 만상에나, 그 집 커피 값이 2만 원이래나? 3만원이래나? 그래서 제이는 안타깝게도 그토록 동경했던 드레스를 한 번 만져보지도 못 하고 20대의 마지막 겨울을 쓸쓸하게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서른 살의 여름날, 낯선 거리에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을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다니! 제이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본다. 난 이 드레스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면서 살구색 깔깔이 천으로 된 드레스 앞에서 사진도 한 장 찍는다. 이 드레스는 어깨가 드러나고 가슴 부분이 리본 모양으로 묶여졌다. 엉덩이와 허리 라인이 살짝 드러나면서 우아하게 발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다. 다른 드레스에 비해서 얌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난 제이의 이 욕망이 이해가 안 된다. 튀고 싶어서 드레스를 입는 건데… 튀려면 화끈하게 튈 것이지 은은하게 튀고 싶다는 이 욕망은 무엇인가. 드러나되, ‘살짝’ 드러나고 싶다는 이 욕망은 무엇인가 말이다.

어쨌건, 드레스 구경을 실컷 했으니 땡볕에 이태원 거리를 헤맨 보람은 있다. 나는 또 배가 고프다. 우리 뭐 좀 먹고 가자. 그런데 둘러봐도 우리가 들어갈 만한 식당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간판이 죄다 영어로 되어 있으니 당최 읽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는 어떤 빵집에 들어가서 팥빙수를 한 그릇 시켜서 먹는다. 브라우니도 한 조각 같이 곁들여서. 제이는 오늘 우리들의 활동-방황이 흡족한 표정이다. 다음에는 여기도 가보자, 저기도 가보자 하면서 다음 일정을 구상한다. 물론, 자세한 계획은 없다. 그냥 한 번 가보는 거. 낯선 거리를 헤매보는 거. 무작정 우연과 한 번 부딪쳐보는 거. 방황의 동기로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태원에 와서 우리는 그런 방황의 감동을 이미 가슴 벅차게 체험하지 않았는가. 팥빙수의 시원한 얼음 알갱이들이 여름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자, 제이의 가슴에는 조금 전의 감동이 다시 한 번 밀려온다.

그 아름다운 드레스들 속에 파묻혀 죽어도 좋으리! 여름날 이국의 낯선 거리를 찾아간 제이를 가게 바깥의 거리에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준 마네킹들은 제이의 꿈속 정령들 같다. 꿈속의 정령들이 현실에 나타나 제이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제이는, 자신이 그동안 열렬히 찾아 헤매던 미지의 연인과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감격스럽다. 훌쩍!


“코 좀 닦아줘.”


중요한 순간에 꼭 콧물이 흘러서 분위기를 깬단 말이야. 제이는 축농증이 있다. 수시로 코를 닦아줘야 한다. 한 달에 한 번쯤 이비인후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제이의 중요한 일과이다. 병원에 가서 막힌 코를 뚫어주고, 부은 콧살을 진정시키고 하는 증기 치료를 받으면 일주일 정도는 상쾌한데 다시 코가 답답해진다. 심해지면 병원에 가고, 병원 갔다 오면 얼마 동안 살 만하다가, 힘들면 다시 병원에 가고… 그러고 있다. 드레스 입은 아가씨가 콧물이라니! 뭔가 좀 이상하지만… 콧물이 흘러도 제이는 간다. 방황하러!





정경미
사십사 년째 시인 지망생이다. 어쩌면 전생의 더 많은 세월이 있는지도.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최선을 다해 써왔는데 이건 시가 아니라고 하니 도대체 언제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지금까지 기다려온 게 억울해서… 활보 일 하면서, 감이당 공부하면서, 나는 여전히… 시인 지망생이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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