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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모색야생여행기] 도대체 자연은 어디에 있는 걸까?

by 북드라망 2021. 8. 2.

『슬픈 열대』 레비 스트로스의 자연 개념

도대체 자연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바다는 넓으니까?

 

지난 4월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방류를 결정했습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이미 방류하고 있는 원자력 오염수보다 농도가 낮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안전하니 마셔도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안전보다 비용절감 택한 일본 : 아소, “방류수 마셔도 돼” 기사 바로가기) 과연 누구의 안전일까요? 어떤 인간을 표준으로 삼아 측정된 안전일까요? 어쨌든 인간의 몸에는 무해하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방류해도 되는 것일까요? 문어나 가오리의 입장에서도 안전한 일일까요? 바다는 넓고 방류수는 적다. 하지만 그 ‘바다’는 텅 빈 공간이 아닙니다. 

   

 

자연을 보호하자고들 합니다. 아이들은 지구를 사랑해야 한다며 학교에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려 옵니다. 저와 저희집 쌍둥이는 북극을 구하기 위해 30도가 넘어가는 여름날 에어컨과 선풍기를 잠시 끄고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뿐. 그런 노력은 노력대로 의미 있다고 치고, 돌아서면 손쉽게 배달앱으로 식사 주문을 해버리는 일이 잦습니다. 내일은 보호할 예정이지만 오늘은 그냥 나 편한대로 살아버리는 저를 봅니다. 어리석은 이 편의주의 이면에는 어떤 상식이 작동하는 것일까요? 바다나 북극이 한정 없이 나에게 뭔가를 줄 것 같은 이 기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증여’라는 키워드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마르셀 모스(1872~1950),『증여론』(1923~1924))에 따르면 인간의 관계맺음은 호혜의 틀 안에서 조정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이나 집단, 환경 사이에서 계산불가능한 빚을 지우고 갚아가며 상보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지요. 증여란 주지 않을 수 없고 받지 않을 수는 없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높은 윤리적 의무를 부여했습니다. 때문에 증여의 회로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방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 주의깊에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는 나고 죽는 동식물, 떠오르는 태양과 이지러지는 달, 이미 가버린 자와 아직 오지 않은 자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한 생을 꾸려가게끔 하는 복잡한 인연의 장을 바라보았을 겁니다. ‘증여’는 자신이 어떤 존재들과 함께 삶을 꾸려나가는지에 대한 통찰로 작동하는 총체적 관계 체계였습니다. 

   

나자카와 신이치는 자연을 향한 근대인들의 무지막지한 요구에서 부채(증여)에 대한 인류의 외면을 읽습니다(나카자와 신이치, 고쿠분 고이치로,『哲學の自然』atプラス叢書03(太田出版), 2013). 마르셀 모스도 주목하지만 인류가 느낀 원-증여는 태양으로부터였습니다. 사실 추석이나 할로윈 등으로 남아 있는 부채 탕감의 의례들은 자연으로부터 증여된 것을 자연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한 예식에서 비롯된 것이죠. 그런데 태양에 빚을 지고 살던 인류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증여의 회로로부터 성큼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기술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을 치유하기 위한 역할을 했었다고 하지요(이반 일리치,『그림자 노동』(사월의 책). 하지만 기술이 인류 진화의 징표이자 목적이 되는 과정에서 어떤 전도가 일어났습니다. 자연이 기술이 투여되어야 할 단순한 배경이 되고 만 것이죠. 인류는 이 과정에서 스리슬쩍 자연에 대한 부채감을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자연’ 개념 

 

레비 스트로스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현대인의 어리석음에 대해 그는 어떤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할까요? 저는 『슬픈 열대』를 쓰고 있는 레비 스트로스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남아메리카로 도착하기 직전부터 광막한 바다를 천천히 관찰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브라질 도시에 입성하기 전 「일몰」이라는 장에서 그의 인상기를 길게 풀어놓기도 하지요. 『슬픈 열대』에는 여행 당시의 일기가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이제 태양의 직사광선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늘은 작은 새우·연어·아마포·밀짚 등의 분홍빛과 노란빛을 나타내주고 있을 뿐이었고, 그 조용한 색채의 풍요함마저 사라지려는 것같이 느껴졌다. 천공(天空)의 풍경이 하양·파랑 그리고 초록의 색계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수평선의 몇몇 귀퉁이는 아직도 순간적인 독자적 삶을 누리고 있었다. 왼쪽에서는 신비스럽게 혼합된 초록색들이 장난을 치듯 예기치 못했던 너울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이들 초록색은 점차로 붉게 되어갔는데, 처음에는 강렬한 빨강, 다음에는 어두운 빨강, 그 다음에는 보랏빛 빨강, 그러고는 석탄빛처럼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깔깔한 종이 위를 스쳐가는 목탄 막대기처럼 고르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뒤로는 하늘이 알프스 같은 황록색이었으며, 줄무늬가 뚜렷한 윤곽을 지닌 채 불투명하게 남아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는 가로로 황금빛 작은 줄무늬들이 아직도 한순간 빛났으나, 북쪽 하늘에는 거의 어둠이 깔려 있었고, 젖꼭지 모양의 돌기가 있는 성채는 잿빛 하늘 아래 희끄무레한 볼록꼴들만을 보여주고 있었다.”(『슬픈 열대』, 185쪽)

 

일출과 일몰은 절대 같지 않다며, 레비 스트로스는 하루를 되풀이하면서 저물고 있는 장엄한 바다 노을을 천천히 써갑니다. 제가 이 장에서 가장 감탄하는 대목은 레비 스트로스의 어휘입니다. 해가 지는 바다가 얼마나 다채로운 색의 농도와 질감을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 레비 스트로스 자신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저라면 ‘아! 멋져!’하고 끝날 일입니다. 『슬픈 열대』를 읽다보면 레비 스트로스가 글쓰기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요, 그것은 그가 주변의 풍경을 묘사할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명사, 형용사, 동사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발밑과 손끝을 스치는 어떤 것도 하찮다고 보지 않는 것이지요. 그 주변의 모든 존재들은 위의 인용에서처럼 고유한 색감을 가지고 그의 정신을 통과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객관적 실체로서의 자연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순수한 자연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도처에서 실감합니다. 7장 「일몰」에 이어 제3부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아메리카의 도시들이 나오는데요, 식민자들에 의해 몇 백년 전부터 개발되고 있는 도시와 그 주변의 지형지물을 바라보며 레비 스트로스는 계속 자신의 인상기를 써 내려갑니다. 그 자신이 일몰을 하루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완전하게 재현”하는 것으로 새로이 해석하듯, 상파울로와 리우데자네이루의 수로와 수목, 언덕들도 끊임없이 해석되고 있었습니다. 구세계인들, 그러니까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신세계라고 불렀지요. 그들이 이용을 막 시작할 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열대의 모든 장소는 이미 그 땅의 인간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해석이 이뤄지고 있는 장소였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을 제 필요에 따라 해석합니다.     

   

20세기 초까지도 서양인들은 유럽 바깥에서 순수한 자연 같은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요? 순수하다는 것은 순진하다, 어리다, 세상 물정 모른다라는 뜻으로, 딱 그 반대편에 세속적이다 성숙하다 물정에 능통하다라는 의미를 전제로 둡니다. 소위 순수란 ‘문명’의 반대라는 뜻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에는 순수가 금방 ‘야만’이라는 말고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문명의 손길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자연으로서의 야만이었던 것이죠. 제국주의는 이런 상호배타적이며 위계적인 이분법을 이용해 문명과 야만, 과거와 미래, 남성과 여성을 구별지었습니다. 그래서 조셉 콘래드 같은 작가는 이런 이분법이 얼마나 망상적인지를 『암흑의 핵심』(1899)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아프리카의 장엄한 자연을 여성으로, 다시 야만으로 치환한 뒤 그 앞에서 홀려 버립니다. 결국 화자는 아프리카의 검은 마수에 빨려들어 자신의 모든 인간성을 내려놓게 되면서 다시는 문명으로 회귀할 수 없는 광인이 됩니다.   

 

“그녀는 야만적이었으면서도 화려했고, 야성적인 눈초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장엄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신중한 걸음걸이에는 불길하고도 당당한 무언가가 있었네. 슬픔이 감도는 대지 전체에 갑자기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거대한 야생이, 다산의, 신비한 생명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마치 자신의 어둡고도 정열적인 영혼을 닮은 형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에 잠긴 채 그녀를 보고 있는 듯하였네.”(조셉 콘래드, 『암흑의 핵심』, 민음사, 133쪽) 

 

이처럼 제국주의의 초기에는 원시의 자연을 찾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로 들어간 사람들 중에 거대한 숲 안에서 길을 잃고 홀로 죽어간 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 역시 그러한 예를 하나 언급합니다. 그는 빌게뇽(Villegaignon; 1510~?)이라는 프랑스 사람으로 자신은 카톨릭 교도였으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열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터키인, 아랍인, 이탈리아인, 스코틀랜드인, 영국인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과 다투었으며 자기만의 왕국을 세워놓고 원주민이든 유럽인이든 닥치는 대로 이용했습니다. 결국 오만하고도 자인하게 열대를 함부로 대하고 사람들을 학살한 끝에 모든 이들의 증오를 받으며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빌게뇽 이야기를 열대가 낳은 비극으로 보지 않습니다. 런던이 되었든 아마존이 되었든 주변의 동식물이나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를 성찰할 수 없는 인간은 미쳐버리게 되어 있다고 보았지요. 레비 스트로스에게 열대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추상적인 신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풍경의 세부에 눈길을 두는 자에 의해 또다시 해석될 구체적이고도 풍요로운 세계였습니다.   

 

 

신화, 호혜의 우주론

 

레비 스트로스는 유럽인이든 열대인이든 인간에게는 주변의 동식물을 관찰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통찰합니다. 『슬픈 열대』의 5, 6, 7, 8부에서 이는 보다 자세히 설명됩니다만, 우선 레비 스트로스가 주목한 인류의 원초적 사고법에 대해 알아보면서 레비 스트로스의 ‘자연관’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적 사고의 보고를 ‘신화’라고 합니다. 이때 ‘신화’란 신이 나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특정한 부족민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만물의 기원담 같은 것으로, 하나의 신화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부족민들에게 삶의 방향과 윤리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북아메리카에는 다음과 같은 신화를 믿는 부족이 여럿 있다고 하지요. 옛적에 맹수였던 들소는 ‘뼈만 남은’ 채로 인간을 잡아먹곤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후에는 사람들의 주된 먹이가 되었다고요. 신화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들소가 인간의 처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기를 원했다. 이 처녀는 한 인간 집단 내의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어떤 남자가 가시 있는 나무에 찔리고 나서 낳은 딸이었다. 반(反)인간적 자연(가시있는 나무)와 인간적 반(反) 자연(남성의 임신)의 부정적 결합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들은 딸을 들소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선물로 들소 몸의 각 부분을 대신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 주었다. 전쟁 때 쓰는 머리관은 척추, 수달의 표피로 된 화살통은 가슴 쪽의 피부, 직조 모포는 배, 끝이 뾰족한 화살통은 위, 털구두는 신장, 활은 늑골 등. 들소는 아내를 갖게 되면서 남자들의 사회에 빚을 지게 되었고, 해마다 그들에게 자기 고기를 값을 의무를 받게 되었다. 

   

몸을 들소의 결혼 선물로 주는 인간, 그 몸으로 다시 은혜를 갚는 들소! 들소 한 마리를 먹기 위해 이토록 재치있고 풍요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다니요! 이 신화의 세부 속으로 들어가면 부족민들의 우주관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주 안에 모든 것은 비교불가능한 고유함을 갖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동등한 지위를 서로 누립니다. 둘째, 이 우주 안에는 가끔 모순이 발생합니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동식물들이 등장하거나 자리값 사이의 중복이나 충돌이 일어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반인간적 자연과 인간적 반자연의 출현으로서의 딸입니다. 그런데 이 모순이 발생한 것은 모두 우연으로 그 어떤 선험적 이유도 이 발생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입니다. 셋째! 이 모순으로 인해 동식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동물-들소가 인간-딸과 결합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이탈하고 싶다는 것, 인간-남자들이 딸을 사랑하지만 인간사 안에 그녀를 둘 자리가 없다는 것, 이 두 가지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결혼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기서도 들소와 인간들 간의 욕구는 다른 존재와의 새로운 관계를 여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확장하고 싶어하는 것으로서 대등하게 다루어집니다. 원시부족민들에게 결혼이란 상호 대등한 자들의 집단 내 자리 교환이군요.  

   

넷째, 이 결혼의 결과 들소와 인간 사이에는 하나의 윤리적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자연종의 사회와 사회집단의 세계와의 사이에 논리적 대응관계”(『야생의 사고』, 174쪽)를 세움으로서이며, 그 관계 자체가 호혜를 의미합니다. 인간-딸에게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준 감사의 선물로 뼈밖에 없는 들소에게 살을 주고, 들소는 아내를 준 처가에게 다시 자기 살로서 답례합니다. ‘고기는 들소에게서! 아내는 인간에게서!’라고 하는, 차이나는 역할에 따른 상보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지요. 이 역할은 대등한 동시에 대칭적입니다. 여기서 살은 결혼을 통해 의미적 전환을 이룹니다. 이제 인간을 잡아먹었던 들소는 처가 사람들을 무례히 해칠 수 없게 되겠지요. 인간 또한 사위 혹은 손자-들소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주 안에서 인간을 먹는 들소와 들소를 먹는 인간 사이에 하나의 예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신화를 따르는 부족이라면 들소를 사냥한 뒤에는 반드시 결혼을 축하하며 들소에게는 다시 살을 선물하는 공희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이 들소 혼담 신화 읽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수렵인들이 들소를 먹기 위한 정당성 획득을 위해 이야기를 짓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들소와 인간의 친연성도 아닙니다. 이 신화를 떠받들고 있는 것은 하나의 부족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윤리의 틀을 도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주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 함께여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이며, 그때 부족민들은 동식물과 자신들 사이에 어떤 위계도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조건들이란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천연조건이란 인간의 생활양식과 기술적 능력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것을 규정지으며 특정한 방향으로 이용함으로써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은 그 자체로는 모순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가해지는 특정한 인간 활동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모순이 생긴다. 또 어떤 환경이 가지는 특성이란 그 주민의 활동이 어떠한 역사적 기술적 형태를 취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또 한편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는 환경이 인간적인 수준에까지 높여지면서, 비로소 이해 가능하게 되는데 그 관계는 여전히 사고의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은 그 대상을 결코 수동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그것을 개념화한 후 다시 골고루 혼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그 체계는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며 상황이 같다고 하더라도 체계화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 것이다. 만하르트와 자연주의 학파의 잘못은 신화가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자연현상이라고 믿었던 데에 있다. 오히려 자연현상이란 신화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실―자연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논리체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제3장 변환체계」,『야생의 사고』, 163~164쪽)

 

레비 스트로스가 신화로 본 수렵민들의 우주론은 창조주를 갖지 않습니다. 목적도 없습니다. 부족민들은 오직 자신들의 사고 실험(토테미즘)을 통해 전체 질서의 밑그림을 그려갑니다. 신화는 사회와 자연을 각각 혹은 함께 설명하는 최종 논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고 실험 속에서 매번 전체화된 우주의 질서를 체감했습니다.   

 

 

오늘날의 토테미즘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인간은 자연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대상화될 수가 없습니다. 자연에 대해 우리는 종종 인간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천연의 숲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렇게 추상화된 자연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일 뿐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실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이웃의 개와 도로의 들고양이, 계절따라 피는 풀꽃들입니다. 그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은 아파트 안 도로만 걸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스팔트 위로 비죽이 솟아 나온 잡풀 하나도 얼마나 우리 마음을 치고 가나요? 작은 풀들은 차만 다닐 수 있다고 내리 찍은 도로 위의 인간중심주의를 도발합니다. 물론 무심한 발길에 스러지고 말며 삶의 무참함을 깨닫게도 해주지요. 이런 존재적 운명에 대한 통찰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도 풀 한 포기가 갖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둘의 마주침이 만든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 만남이 있기 전에도 있은 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유한 일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자연을 순진하다고 말하는 문명인의 입이나, 자연 안에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수렵민의 눈이나 모두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에게는 추상적 자연과 개체적 나라는 상식이 전제되어 있고, 후자에게는 구체적 자연과 관계적 나라는 사고가 발달해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후자를 그들의 신화를 통해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화의 핵심 사고법을 토테미즘이라고 명명했지요.  

   

토템이란 말은 북아메리카 그레이트 레이크 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알곤킨어를 쓰는 오지브와족의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토테만ototeman이라는 말은 “그는 나의 일가친척이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집단적 외시 체계로서, 동식물의 종들을 강세부여함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차이화를 꾀하고 타 부족과의, 타 동식물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생각 방식입니다. 동식물을 기호로 삼아 부족의 범위를 한계 짓고 자연 안에서 그 부족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려는 시도인 것이죠. 선택된 동물은 흔히 “가장 아름답고, 가장 친근하고, 가장 무시무시하고, 가장 공통적인 혹은 가장 습관적인 사냥감”이었습니다(레비 스트로스,「토템환상」,『오늘날의 토테미즘』, 33쪽) 

   

토테미즘은 우선 가장 외경의 대상이면서도 가까이 해야만 하는 대상을 집단의 표상으로 쓰면서, 그 동식물과의 관계(신화 안에서의 혼사)를 중심으로 부족 사회의 일상 리듬을 조정하고 세부 윤리를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토템과 인간의 자연적, 심리적 경계를 흐리지 않기 위해 다양한 금기를 토템을 수용하는 인간에게 걸어 놓습니다. 곰부족은 곰을 먹지 않는다의 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곰과의 관계에서 문화적 조정에 들어간 부족이 실제의 곰을 먹지 않음으로써 곰은 다른 부족들의 먹이가 되는데, 곰을 먹은 부족은 그 자연종적 ‘먹음’ 때문에 현실의 곰 부족과 어떤 채무관계를 갖게 됩니다. 이들은 그 곰 부족에게 곰 고기 대신에 생선이나 다른 육류를 선물할 의무를 지고 때로는 그 의무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실제적 혼인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자연종을 토템으로 만듦으로써 다른 부족과의 호혜 관계가 만들어지는 셈입니다. 그래서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최대한의 조합은 양자의 상호보완성의 충족”(『야생의 사고』, 176쪽)이 됩니다.

 

자연적 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계이든 문화적 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계이든 토템적 표현은 결국 어떤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이행할 수 있는 부호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표현이 왜 행동원칙을 수반하느냐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우선 적어도 토테미즘 또는 그렇게 불리는 현상은 표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기호 사이의 양립과 비양립의 규칙을 세우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행위양식을 금지하고 명령하는 하나의 윤리적 기초가 된다.(「제3장 변환체계」,『야생의 사고』, 166쪽)

 

토테미즘은 단순한 음식 금기와는 구별됩니다. 토테미즘이 체계의 이행 즉, 자연종과 인간종 사이의 관계 맺음에 목적을 둔 우주론의 사고방식이라면 음식 금기란 그 부족 내에서의 어떤 역할에 따른 음식에 대한 강세부여의 차원에 머물거든요. 예를 들면 은뎀부족의 주술사는 주로 점치는 일을 하는데 두족류(頭足類)의 살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두족류의 표피에 불규칙한 무늬가 있는데, 그것을 먹으면 점술 능력이 흐려져 문제에 잘 집중할 수 없게 되니까요. 같은 이유에서 그는 얼룩말도 먹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술사에게는 어두운 빛깔의 털을 가진 동물은 통찰력을 흐리게 하므로, 뼈가 예리한 종류의 생선은 예지 능력의 기관인 간을 찌를지도 모르므로, 미끈한 잎사귀를 가진 몇몇 종류의 시금치는 주술 능력을 그의 몸 밖으로 빼내버릴지도 모르므로 금지됩니다. 이 모든 금지는 역할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 신화 전체의 체계를 좌지우지하는 결정적 변수는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토테미즘이나 음식 금기 모두, 그가 어떤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지에 대한 철저한 탐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를 따라가다보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연이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사람과 사물, 동식물을 바라보는 훈련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우주 안에 독아적 존재가 되어 빌게뇽처럼 고립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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