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의원
몸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일 년 전 어느날, 저는 지인의 소개로 한 한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의사 선생님은 물으셨죠.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자유를 획득했다는 징표는 무엇인가?─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니체전집 12>, 책세상, 251쪽
녜, 물론 무술, 뭐 이런 것 잘 하는 무인 곽원갑 같은 강함을 원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박카스 뚜껑 하나도 제대로 따지 못하는 저의 저질 체력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유자차 병 뚜껑을 시원하게 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남들은 더워서 어쩔 줄 모르는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다니는 저의 몸뚱아리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봄, 여름, 가을의 추위 정도는 견딜 수 있는 몸이 되고 싶었습니다. 생수병 뚜껑도 못 따서 혼자 있으면 물도 못 마시는 저의 생활 패턴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영원히 의존적인 신체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녜, 혼자 설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지금이라도 혼자 힘으로 설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강해져야 했고요. 한여름에 맘껏 반팔을 입기 위하여, 박카스 뚜껑을 잘 따기 위하여…! 그리하여,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기 위하여 저는 강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니체도 '자유정신'을 이야기하며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가장 강한 독립성에 대한 시험이다.─니체, 『선악의 저편』
#2. 고미숙 선생님 강의(『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후 질의응답 시간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든 남자. 이어지는 질문은 바로 여자친구에 관한 것이었죠.
"제 여자친구는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기분이 좋았다가, 금방 나빠지고 그래요. 왜 그럴까요?"
여자친구의 '감정상태'를 묻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고미숙 선생님의 대답은 다름 아닌 '몸'이었습니다.
"당신 여자친구의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 몸부터 제대로 만들어 놓아라."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비밀인 드래곤볼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렸었더랬지요.
녜, 요것은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출간기념 강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책을 제대로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표지에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이라는 말이 써 있기도 합니다. 고미숙 선생님은 그만큼 몸의 문제를 치열하게 생각하신다는 거겠죠.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에로스)을 감정적인 문제로 생각하지만 답은 '몸'에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가 유독 짜증을 많이 내는 날, 잘 생각해 보면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 몸의 어느 한 구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두통, 치통, 생리통이 심한 날, 우리는 우리 몸이 안 좋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지 않던가요? 하하, 그렇습네다! 몸과 마음은 따로 노는 게 아니랍니다.
가장 중요한 척도는 몸이 외부와 어떻게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몸은 본래적으로 안팎이 열려 있고, 따라서 관계를 떠나 홀로 고립된 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情)을 제대로 보존하려면, 억압도, 과잉도 아닌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달려 있다.─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영화 「행복」속 한 장면. 폐가 좋지 않아 장기 요양 중인 여자 주인공은 하루를 충실히 살아 간다. 그녀는 자신에게 내일이 올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에 살던 남자 주인공은 매일 아침에 하는 체조가 귀찮기만 할 뿐이다.
#3. 자기 몸에 테러하는 사람들
여성의 美에 대한 추구인지 뭔지, 요즘 여성들은 겨울에도 짧은 치마에, 얇은 옷은 기본이고, 몸의 혈액순환장애를 촉진하는 '스키니'(전문용어로 쫄바지인가요..-_-?)를 즐겨 입습니다. 하이힐은 뭐, 빼 놓으면 섭하죠. 이 하이힐 때문에 종아리 근육과 발가락들은 평상심을 잃어가고(..응?), 삐뚤어져만 가고, 계절을 망각한 여성들의 옷차림 때문에 우리 몸은 사시사철 자살공격을 받습니다. 테러죠. 그래서 고미숙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은 몸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하다. 특히 여성들은 외모와 몸매 말고는 자신의 신체에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오직 타인의 시선을 위해서 존재하는 몸이라고나 할까(참 희한한 이타주의^^). 그러다 몸이 아프면 의사한테, 마음이 아프면 심리상담사 혹은 종교에 의탁해 버린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몸매 따로, 건강 따로. 한마디로 몸을 갈기갈기 해체해 놓고 있는 셈이다."
옷이랑 하이힐로 자기 몸에 테러하는 여성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여성뿐 아니라 현대인은 모두 자신의 몸에 무지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죠. 자기에게 뭐가 나쁘고, 어떤 기운을 피해야 하고, 어떤 기운을 보강해야 하는지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제가 제 몸을 간수하려면 양기(陽氣)를 보존해야 하는데 빨빨거리면서 양의 기운을 다 분출해 버리는 바람에, 생수병 하나도 제대로 따지 못하는 의존적 신체가 되어 버렸지요.
아, 녜, 뭐, 이제부터는 제 몸을 잘 알고 또 잘 지키려고 애는 쓰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결론은, 저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모두 자기 몸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고,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너무나도 무감하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도 외부(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예로 저는 10년째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몸이 어떻게 왜 안 좋은 것인지 알지 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병원에서 그런 건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 뭐예요=_=;;) 에 그러니까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몸매가 아니라 몸을 생각하고, 건강과 마음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덜 불행한 것, 덜 고통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존재가 통째로 자유의 시공간을 향해 달려가는 것. 존재와 외부 사이에 공감의 지대를 확장해 가는 것, 그것이 생리를 소통시키는 일이자 좋은 관계를 위한 윤리적 실천이다.
-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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