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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별자리서당

우주전쟁, 별을 탐하라!

by 북드라망 2012. 5. 24.
스타워즈, 별들의 제국

손영달(남산강학원 Q&?)

왕의 남자는 누구? -유가 VS 방사

천문(天文)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쓰인 문헌은 전국시대 말에 저술된 『여씨춘추』이다. 그것이 체계화된 이론, 명실상부한 천문학의 체계로 정립된 것은 사마천 『사기』의 「천관서」에서다. 때는 한무제의 집권기로 B.C. 100년경의 일이다. 중국의 천문학은 『여씨춘추』와 『사기』의 사이, 즉 진의 천하 통일과 이어 들어선 한제국의 시기를 거치며 무르익었다. 이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중국의 천문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여불위.『여씨춘추』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빈객 3000여 명으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이 책에 담도록 했다. 여기에 한 글자라도 더 보탤 수 있는 자에겐 천금을 준다고 선언할 만큼 그는『여씨춘추』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진시황 때 만들어졌다.



물론 이 당시의 천문학은 우리와 전혀 다른 감각의 것이다. 하나의 별이 몇 억 광년 떨어져 있으며 무슨 성단에 속하느냐, 그 당시엔 이런 건 별로 관심거리가 못 됐다. 그들은 천체학적인 정보보다는 하늘이 어떻게 인간과 연결되는지를 궁금해 했다. 『여씨춘추』에서는 “하늘에는 구야(九野)가 있고, 땅에는 구주(九州)가 있다”고 해서, 아홉으로 나뉜 하늘과 땅이 풍기(風氣)의 교류로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사마천의「천관서」에서는 별자리 체계를 보다 완벽한 짜임새로 정립함과 동시에, 풍(風)과 기(氣)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우주의 음악적 리듬인 율(律)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천문학은 바람과 음악의 천문학인 셈이다. 이 주제는 살짝 미뤄두자. 오늘 살펴볼 것은, 이 시기 중국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하는 것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선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국시대(기원전5~3세기)로부터 진한시대에 이르는 오백여 년은 중국의 과학기술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그 밑거름을 제공한 건 전국시대 제후국들 간의 피 말리는 경쟁이었다. 당시 군주들은 보다 부강하고 화려한 도시를 가지고자 하는 경쟁의식에 불타고 있었고, 이는 건축술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기술 발달을 추동했다. 여기서 천문학은 당대의 기술발달이 집약적으로 모아진 분야였다.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나름의 우주탐사대(?!)를 꾸렸다.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 혹은 ‘개도국’ 딱지를 면해 보려는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이 하는 것처럼, 당대의 제후들은 서로를 견제하듯 하늘에 관한 지식을 쌓아 갔던 것이다. 우주가 정치적인 각축의 장이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다 진에 의해 최초의 통일 제국이 등장하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자라고 있던 여러 분야의 학문과 기술들이 왕성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짧았던 진의 역사 후에 들어선 한 제국은 기술 발달에 있어 보다 건실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등에 업고 등장한 신흥세력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방사(方士)다. 방사란 역법과 술수에 능통한 이들로, 요즘 말로 치면 점술가 또는 연금술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불치의 병을 고치고, 사물과 사건을 투시해서 보며,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등 보통사람들은 범접하지 못한 신이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을 서둘러 포섭하려 했고, 방사들 역시 보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 황제의 눈에 들려 애썼다.

방사들이 마구잡이로 남용하던 영적인 기운은 사실 말하자면, 은나라의 제사장이던 유가의 선조들이 보유한 능력이었다. 이들은 거북과 소의 뼈를 구워 점을 쳤고,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들에 의해 나라의 중대사이던 제의가 집행되었다. 하지만 과거 은나라의 샤먼으로서 가졌던 영적인 ‘원천 기술’을 잃어버린 채로, 허울뿐인 옛 전통만을 들먹이는 유가들은 갈수록 찬밥 신세로 밀려날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유가들이 원래는 샤먼집단이었다고? 죽음을 관장하고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유학자들. 어째 오묘하게도 잘 어울리는 듯하다.^^



우리 유가가 달라졌어요

유가들의 서글픈 상황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중 「봉선서」에는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은 제국의 통일 과정에서 노나라의 유생 30명을 데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까다롭고 시시콜콜 말이 많았다. “전하~ 봉선의 기본은 옛 사례를 따르는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산을 훼손하지 않게 수레바퀴에 쿠션을 충분이 깔아줬고, 자리를 잡을 때는 먼저 청소를 하는데, 깔개는 반드시 벼의 줄기를 써야 하며……” 뭐 이런 식이다. 때문에 진시황은 옛날 얘기하기 좋아하는 유가보다는 앗쌀하면서도 유스풀한 방사들을 반겼다. 급기야 봉선의례가 있을 때는 유가를 제외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진시황이 태산에 올랐다가 산중턱에서 폭풍우를 만나 큰 나무 아래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생들은 배척을 받아 봉선 의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진시황이 폭풍우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다.

─사마천 지음, 『사기』,「봉선서」

‘오메 꼬신 거!’ 하고 혀를 차는 유가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불행히도 유가들의 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 무제(武帝). 그는 진시황에게 뒤지지 않을 야망의 소유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열망에 사로잡혔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진시황과 닮은 점이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올드한 유가들은 잘나가는 방사들에게 밀려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불똥은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가계로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봉선의례에 따를 당하는 불운을 겪은 것이다. 대대로 천문과 역사를 담당해 온 전통 있는 가문에 지울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사건이었다. 그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아들 사마천에게 이런 유언을 남긴다.

우리 조상은 주 왕조의 태사였다. 아주 오랜 상고시대에는 천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다가 중간에 와서 쇠퇴해졌는데 나에게 와서 유업이 중단될 수야 있겠느냐? (중략) 지금의 천자는 한 왕조의 대업을 계승하여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하였으나 내 거기에 수행하지 못했으니, 이는 아! 나의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사마천 지음, 『사기』,「태자공자서」


『사기』는 아버지의 한 서린 유언을 이어받아 완성한 사연 있는 저작인지라, 이 책의 곳곳엔 방사에 대한 적대감이 묻어나 있다. 그런가 하면 방사들에 치여 하향일로를 걷고 있던 유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전에 공자가 주나라의 천명사상을 수용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면, 당대의 유가들은 라이벌 방사들의 주력무기인 역법(자연학)을 대폭 수용한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초기 유가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철저하게 현실 정치 지향적이던 그들은 예법의 수호에 골몰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유가들이 그동안 배척해 오던 음양오행론이나 점성술 등 우주론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가들의 우주론이 방사들과는 정반대의 맥락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정치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유가들은 우주의 순환적 질서에 주목했다. 그들은 현실 정치가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를 이어받길 기대했다. 군주의 사사로운 야망에 의해 정치질서가 전횡되는 일이 없도록 완벽한 질서 속에 조직된 관료 조직을 꿈꾼 것이다. 권력에 편승하고자 했던 방사들과 반대로 우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중국의 천문학이 이론적으로 확립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라는 자신들의 정치관을 그대로 하늘의 질서에 투영시켰다. 별자리들은 천자를 상징하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엄정한, 너무나도 엄정한 질서를 띤 채 정렬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의 관직에 대응되어 한자리씩 벼슬을 하고 있다. 이 체계는 초기의 세팅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로 후세에 계승되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천문학이 그만큼 뛰어난 수준에 도달했다는 얘기도 되지만 천문학이 국가의 비호 아래 오래 안락한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도 된다. 


북극성. 이렇게 밝으니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군주에 비유될 법도 하다. 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들은 움직인다. 별들의 중심!


이쯤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천체를 연구하는 요즘식의 천문학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별은 그저 별일 뿐, 그것을 별자리로 묶는 것은 인간의 해석방식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하늘을 해석했고, 그 이해방식은 역사의 격절점마다 각축을 벌이며 변화했다. 천문학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시대마다 온갖 세계관들이 각축을 벌여 온 포연 없는 전쟁터라 할 수 있다.

중국 천문학의 ‘거의 모든 것’

사마천의 「천관서(天官書)」는 중국 천문학의 ‘거의 모든 것’,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알파와 오메가’ 격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천관서(天官書)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의 별자리를 왕실의 관부(官府)에 대응시켜 이해하는 게 특징이다. 왕실에서 편찬된 후대 천문지들은 대개 이 글의 포맷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사마천은 여기서 중국 천문학의 유래에 대해 적고 있다. “사람이 생겨난 이래 군주가 태양과 달, 별자리를 살피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중략) 우러러 하늘에서 별자리의 모습을 살피고, 고개 숙여 땅에서 만물의 모습과 생태를 본받는다.”(사마천, 「천관서」)

중국 천문학이 확고한 왕실 천문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사마천 당시의 일이지만, 멀리 주(周)나라 이전부터 사람들은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 그 시절 천문은 국가학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원시적 우주 종교의 한 형태였다. 사마천의 말처럼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천문은 존재했었다는 것!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인간사와 우주의 질서를 연관 지어 이해하려 했다.

이때 왕(王)이란 존재는 그 한자의 모양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늘·땅·인간을 하나로 아우르는 존재다. 하지만 패권의 시대를 지나면서 당대의 유가들은 야망에 불타는 군주가 얼마나 혼란과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유가들은 자신들의 과제를 우주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주제 속에서 찾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은 ‘우주론적 유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마천과 동시대인인 동중서(董仲舒)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질서가 부조화의 길에 들어설 때 하늘은 인간을 일깨우려 한다고 생각했다. 천자가 천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 하늘은 재이(災異)를 내리며, 반대로 군주에게 덕(德)이 충만할 때 하늘은 복을 내린다. 이게 그 유명한 천인감응론으로, 그의 영향은 사마천의 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최선은 덕을 닦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하늘에 제사를 올려 사악한 것과 재앙을 없애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방법이란 것은 없다.”(사마천, 「천관서」)

사마천을 위시한 사관(史官)들은 왕실의 역사가이자 점성술사였다. 이들은 제왕에게 천명을 예고하고 해석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왕은 이들의 말에서 자신의 덕과 정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이들은 자칫 이탈하기 십상인 인간의 질서를 우주의 조화로운 하모니에 대응시키려 노력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문명과 우주가 조화 속에 하나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천지인 삼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천인감응론은 여기에 큰 공헌을 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천문학은 확고한 국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양의 천문학에는 ‘개인’이 없다. 이점이 서양의 천문학과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고대의 중국이 개인의 삶이 무시된 시대였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천지인이 하나라는 이들의 인식은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단일한 주체나 개인을 상정하지 않게 했다. 하나의 사회 질서 속에 포함된 한에서의 인간 혹은 주체를 말했던 것이다. 사회의 조화를 무시하고 개인의 안명을 구하는 무리들은 그 시대의 방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덕적인 지탄을 받았다. 중국인들에게는 그만큼 질서와 조화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체계는 곧 우주 질서를 일종의 축약판으로 재창조하는 것이었고, 천자는 곧 우주 질서의 안배자로 여겨졌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역사 속의 나’ 혹은 ‘우주 속의 나’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첨성대는 신라시대의 천문대다. 어떻게 하늘을 관찰했는가. 저기 돌로 만들어진 기둥 안에 들어가서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 봤을까? No, no~. 첨성대는 제일 꼭대기에 커다란 그릇을 올려놓고 그 안에 물을 채워서 하늘을 관찰했다. 물에 비친 하늘의 모습을 들여다봤던 거다. 거기엔 들여다보는 사람도 비춰진다. 그것이 우주 속의 나였을까.



처음 공부하는 이들에게 이 점은 중대한 비호감 요소로 다가올 수 있다. 청와대에 취직이라도 된다면 모르겠다만, 이 시대에 대체 왕실 천문학은 해서 뭣하겠는가!(이것... 혹시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룩한 문명의 질서를 우주의 리듬에 일치시키려는 유가들의 뭉클한(!) 낙관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 또, 온통 점술 일변도인 오늘의 별자리점 말고, 몸과 국가와 우주가 어떻게 하나의 질서로 관통되어 있는지를 읽었던 고대인들의 혜안을 느껴볼 수도 있다.(너무도 대인배적인 그들!) 그런 점에서 동양천문학은 몸과 우주에 관한 ‘중국 사유’의 원천 기술을 보유한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하늘을 질서화 했는지를 잘 보면 몸이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별자리 서당과 함께 더디고 난해한 길을 함께 걸어 봅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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