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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별자리서당

우리가 누구인지, 별들에게 물어봐~

by 북드라망 2012. 4. 26.
하늘의 무늬를 읽다

손영달(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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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은 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가

‘서울 밤하늘이 되살아났다!’ 얼마 전 서울 시정을 보도하는 기사에 나붙은 기사다. 매연과 먼지로 뒤덮인 서울 하늘. 희뿌연 빌딩의 경계 너머로 별을 잊고 산지 십 수 년이 넘은 오늘, 명절 귀경길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었던 밤하늘의 별이 다시 돌아왔다. 현란한 도심의 조명 속에서도 고개를 들면 이따금 별이 빛나고 있다. 되살아 난 서울 하늘, 돌아온 밤하늘의 별들. 하지만 우린 이미 별과 동떨어져 살아온 지 오래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때와 방위를 읽던, 정화수 한 사발에 하늘의 별들을 담아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을 빌던 옛 삶의 방식은 이미 잊힌 지 오래. 신문과 인터넷에는 매일 그날의 별자리 운세가 올라오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별자리에 얽힌 신화를 즐겨 읽는다. TV에서는 별들의 탄생과 죽음, 충돌과 폭발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건 단순한 우주 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별은 문화 콘텐츠, 그것도 별로 돈 안 되는 시들한 장사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아련한 곳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늘의 별과 함께 살아온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서 삶에 절실한 문제들을 구했다. 요즘 사람들 마냥 재미 삼아 멋 삼아 하늘을 본 게 아니었다. 지구로부터 몇 억 광년씩 떨어져 있는 별들이 우리에게 뭘 얼마나 제시해 주겠냐 싶지만, 인간이 하늘에서 얻은 것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씨앗이 되는 실로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런 인간과 별의 첫 인연은 머나먼 옛날, 인류가 문명의 첫 걸음을 내딛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직립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땅에 붙박여 네 발로 기던 인간이 두 손을 박차고 일어나 두 다리로 우뚝 섰다. 그 도도한 포스를 풍기기 위해 인간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허리 디스크라든지, 하지정맥류라든지 이런 게 다 직립에 따른 질병이란다. 땅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소화를 주관하는 토기(土氣)가 부족해져 소화기능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 중한 것들을 포기하면서 인간이 쟁취한 것이 있으니, 곧 대지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다.

우선, 인간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와 물건을 만들었다. 신이나 할 법한 창조행위를 자기 손으로 직접 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두 손으로 만들어 낸 도구들은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다음에 기술할 변화에 비하면 사소한 성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인간이 직립을 통해 얻은 보다 근원적인 소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이 획득한 것은 하늘과 통(通)하는 능력이다.

오롯이 솟아오른 머리는 한층 더 하늘과 가까워졌고 그만큼 하늘을 닮아갔다. 어느 순간 인간은 자신의 머리가 둥글고 빛나는 천체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와 달이 세상을 밝히듯 인간에게도 밝은 빛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건 앎의 빛, 어둠과 무지를 몰아내는 인식의 힘이다. 그 밝음으로 인해 암흑 속에 가려져 있던 세계의 실상이 드러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눈에 들어 온 건 하늘 아래 어딘가에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다. 눈앞에 펼쳐진 건 천차만별의 세계상, 무시로 변화하는 복잡다단한 모습들이다. 최초로 앎의 눈을 뜬 인류의 앞에 펼쳐진 광경, 그건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세계의 불가해함,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내던져 있다는 느낌. 인간은 자기가 내던져진 이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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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하던 우주. 이 그림은 우주가 곧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일까. 뱃살 대신에 박혀 있는 별들, 롱다리, 롱팔. 우주는 완벽한 비율을 가진 몸매를 자랑한다.^^ 사람들은 이 비율 혹은 질서를 우주에서 발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그리하여 인간은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하늘의 거대한 빛들을 향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을 궁구한 끝에 답을 얻었다. 하늘에서 모종의 법칙들을 발견해 낸 것이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이 세상이 자신들이 손으로 만들어 낸 도구들보다 훨씬 정교한 짜임 속에 운행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인간 역시 그 운행의 일부라는 것. 하늘아래 외따로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흐름과 함께하고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변화무궁한 세상에서 질서를 발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소득이었다.

성서 신화를 보면 태초의 인간 아담이 뭇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는 대목이 나온다. 태초의 인간이 한 일이 왜 하필 이름 짓기였을까? 이름 짓기란 일종의 질서화이다. 대상을 호명하면서 규정짓고 분류하고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이름은 한 존재를 지시하는 부차적인 기능에 국한된다. 하지만 아담의 이름 짓기에는 남다른 것이 있었다. 그가 세상 만물들에 붙인 이름은 마구잡이식 넘버링이 아니라 사물의 구체적인 모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 같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름처럼, 이름이란 낱낱의 사물들의 개별적 본질을 꿰뚫어야 했다. 가장 구체적이면서 본질에 부합하는 이름, 그것은 그 존재를 현실로 불러들이는 마법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마르셀 그라네는 이름을 뜻하는 글자 명(名)과 생명과 운명을 뜻하는 글자 명(命)이 같은 발음, ming이라는 데 주목한다. 이름은 대상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는 신의 숨결이이며, 이름 짓기는 세상을 창조하는 신의 사역에 버금가는 행위다. “이름을 말하는 것은 곧 존재를 취하는 것이자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짐승은 자신들을 명명할 줄 아는 자의 지배를 받는다.”* 하늘을 올려 보기 시작한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광대한 하늘에 이름을 붙임으로 우주를 살아있는 질서로 재창조했다. 앞으로 이어질 하늘 이야기에는 이런 고대인들의 기쁨이 묻어나 있다.

*마르셀 그라네,『중국사유』, 한길사, 57쪽

우주의 질서가 곧 나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늘에서 어떻게 질서를 발견해 냈을까? 밤하늘의 별자리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시사철 변함없이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별이 있으니, 바로 북극성이다. 이 별은 천변만화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축이 있음을 알려줬다. 한편 하늘 위의 태양의 위치는 매순간 달라진다. 하지만 태양은 제멋대로 뜨고 지는 게 아니라 나름의 질서 속에 운행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동쪽의 지평선에서 떠오른 태양은 서쪽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 이 두 가지 규칙을 통해 인간은 광활한 대지에 방위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북극성은 우리에게 북쪽을 알려주며 태양은 나머지 동 · 남 · 서의 방위를 일러준다. 때문에 끝없는 사막 속에서도 빽빽한 삼림 속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늘은 우리에게 사방위(四方位)의 공간을 제시해 준 것이다.

한편 하늘은 인간에게 시간의 주기가 있음을 일러주기도 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간이란 무차별한 날들의 연속인 듯 여겨지지만, 하늘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도 분명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인간은 분명한 시간의 주기를 읽어냈다. 해가 뜨고 지면서 세상에 하루가 생기며 달이 차고 기울면서 한 달이 생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의 길이와 밤하늘 별자리의 변화는 태양과 별의 운행이 일 년의 주기를 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늘을 보고 시간의 질서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시간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순환 · 반복 한다는 것이다. 달의 운동에 따라 흘러가고 되돌아오는 조류의 흐름이 생기는 것처럼, 시간의 변화도 흘러가는가하면 회귀하는 순환의 질서에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이 고대인들이 하늘에서 얻은 시간에 관한 지식이었다.

하늘을 통해 인간은 인식의 기본 골격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확립한 셈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이 우주의 질서정연한 흐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무수한 천체들이 이루는 조화와 협력의 하모니, 그 힘을 빌려 인간은 세상과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 경이로운 짜임 안에 있다고 느낀다. 나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천체의 운행과 함께 한다는 생각. 별들이 질서와 조화를 잃지 않고 제 경로를 유지하듯 인간의 삶도 그러하길 바랐다. 하늘아래 덩그러니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 고대인들은 하늘을 보고 나를 봤으며, 자신을 그런 우주적 존재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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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해와 달, 별 그리고 인간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시간을 읽고 공간을 기획했다. 해가 어느 자리에 오느냐에 따라 땅을 갈아업기도 하고 추수를 하기도 했다. 반대로 어떤 꽃이 고개를 드는 순간 하늘엔 어김없이 어떤 별이 지나간다. 시공간은 하나다. 그리고 순환한다.


천문, 하늘의 무늬 읽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제기된 숙제가 있다. 바로 언젠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기원전 3천 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바빌론의 길가메시 신화는 인간의 가멸성에 절망한 길가메시가 영원한 삶을 얻으려 저승에 다녀오는 이야기다. 중국의 시황제는 영생을 위해 세상의 명약을 다 구해 먹었고, 그의 제국인 진의 역사 또한 영원하길 꿈꿨다. 인간은 실로 오랜 시간 이 문제를 두고 괴로워한 셈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오래전, 문명 이전에 이미 제시됐었다. 하늘을 보고 삶의 의미를 찾았던 고대인들은 거듭되는 생사의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우주의 기본 요건임을 알았다. 하늘 위의 천체도 생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천체의 탄생과 죽음이야말로 이 세상에 시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우리에게 예수의 생일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마스는 실제 예수라는 인물의 생일이 아니라 바빌론 지역의 태양 부활 축제였다. 동양의 절기로 치면 동지. 이날은 태양의 남중고도가 가장 낮아지는 날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그림자와 낮의 길이가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한다. 고대인들에게 이 날은 묵은 태양이 죽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날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환호 속에 새 태양을 반기며 죽음은 곧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생사의 반복이 곧 우주의 시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늘을 보고 자신을 살폈던 고대인들, 그들은 천문현상에서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아우르는 우주의 공통적인 운명을 읽었다. 인간을 포함한 뭇 존재들은 이런 우주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났기로서니 이런 우주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 삶과 죽음이란 생명이라면 모름지기 겪어야 할 우주의 섭리이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향한 질주는 인간에게 파멸을 선사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중하며 자기의 본 모습을 살피게 했다. 하늘은 인간에게 그가 처한 운명의 좌표를 일러준다. 그렇기에 인간은 부단히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며 주어진 명命을 살펴 살아가야 한다. 이는 고대사회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윤리론이다. 그 언저리에는 어김없이 천체의 운행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고대의 우주론이 있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우주론을 "천문(天文)"이라 일컬었다. 『설문해자』에 문(文)이란 한자를 풀이하기를 “문이란 물상의 근본이다(文者物象之本)”라고 했다. 상(象)이란 이미지나 조짐, 기미처럼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비가시적인 흐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 문이라는 것은 현상에 내재하는 물(物)과 상(象)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흐름들을 단칼에 포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문이라 하면 눈에 보이는 천체의 운행뿐 아니라 그것들이 수반하는 조짐이나 기미 등 미세한 기운의 변이마저 다잡는 개념이다. 이를 예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의 무늬’ 읽기 정도가 될 것이다. 이는 현대의 천문학(astronomy)이 천체의 객관적인 물리만을 추구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다. 한 설명에 따르면 동양의 천문이란 현대의 천체학(astronomy), 점성학(astrology), 우주론(cosmology), 재이학(disaster)에 해당하는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라 한다.* 고대의 천문이 이렇듯 광범한 영역을 넘나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폭넓은 제반의 영역을 살피는 데 소요되었음을 보여 준다. 인간 역시 우주의 질서에 공명하는 소우주이기에 우주의 운명이 어느 주기에 와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의 질서를 읽어 삶의 절실한 요구들을 충족시키려 했던, 우주의 운행과 부합하는 삶을 살려 했던 고대인들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별자리서당과 함께 동양천문에 나타난 고대인들의 사유를 따라가 보자.

*김일권,『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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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루카치는 별들에게 길을 묻던 시대는 끝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서야 다시 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어긋남이 어떤 유쾌한 이야기들을 전해줄 것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커밍 쑨~~^^

별,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언젠가 집안 행사로 굿 하는 자리에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당의 구송을 듣고 있는데, 낯익은 구절이 귀에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각항저방심미기두어여허위실벽…” 바로 동양 별자리 28수의 이름입니다. 아직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동양 별자리의 흔적을 조우한 셈입니다. 순간 뭐랄까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마주한듯한 전율이 온몸에 일더군요.

사실 동양 천문은 고사 직전의 학문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문은 국가의 중차대한 정책결정에 소요되던 분야였습니다. 고대의 역사가인 사관(史官)은 동시에 천문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역사의 변모를 점쳤지요. 여기에는 한 나라는 일종의 소우주로서 전체 우주와 감응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인간사에 벌어지는 사건은 천체가 운행하며 이루는 오묘한 변화에 맞물린다는 것이죠.

옛 사람들은 이렇듯 완전 소중한 별자리들에 한 자리씩 벼슬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선지 그에 얽힌 이야기들도 몹시 점잖습니다. 쫓겨난 신이 인간을 꼬시고, 발칙한 영웅들이 신에게 도전장을 전쟁을 벌이는 그리스 식의 현란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는 여기 없습니다. 별자리 이름이 관직명이기 때문에 한자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천문 이야기는 더더욱 시들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늘 땅 인간이 하나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의 세계관이 녹아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전혀 다른 방식의 생각들이 가득하지요.

<별자리서당>에서는 한 물 간 동양 천문 이야기를 리라이팅 합니다. 거대한 빙하 아래 얼어붙어 있는 고대인들의 지혜가… 부디 낚아 올려 졌음 좋겠네요.^^; 격주 목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중국사유 - 10점
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한길사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 10점
김일권 지음/예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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