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조국과 민족의 짙은 그늘

by 북드라망 2017. 5. 2.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조국과 민족의 짙은 그늘



'민족'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근·현대의 모든 신화들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식민지 40년의 집단 기억이 없다면 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나에게 주는 뉘앙스는 아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이름으로 가해진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을 떠올려 보면 자연스럽게 민족의 일원이기를 거부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 짙게 배어버린 비탄과 연민 속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개념과 정서 사이의 균열이 이른바 '역사'를 대하는 내 의식의 기반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나는 잘 울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야기'에 이입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를 (지어낸) 이야기로 전제한 상태에서 읽고, 보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지어내지 않은 이야기를 볼 때면 자주 울게 된다. 


박도흥은 조선에서 하도 멸시받고 자라 일본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많이 걱정했다. 게다가 그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일본어에 아주 서툴렀다. 배치된 부대에서 조선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이 바로 알려졌다. 신고하거나 명령을 받들 때 '니토헤이 보쿠 도 코(이등병 박도흥)' 라고 큰 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명령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짓을 하니 부대 안에서 완전한 왕따 신세가 됐다.

- 김효순,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2009, 서해문집, 51쪽


박도흥은 1944년 8월에 징집되어 일본 홋카이도 북부에 배치되었다. 그에게는 1939년부터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되었던 '창씨개명'의 압력이 가해지지 않았다. 힘있는 가문의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죽으러 가는' 징병제도는 가장 '하잘 것 없는 존재'인 그를 가장 먼저 데리고 갔다. 학교마다 일본어로 수업을 하던 시대에 학교에 가본 적이 없어 일본어를 배우지 못한 그가 '명령'조차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행동을 할 때의 그 심정이 너무 막막하고 무서워서 나는 울었다. 이 아픔은 '민족의 아픔'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징병되어 관동군에 있었던 박정의는 일본이 항복하면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시베리아에서 3년여 간 포로 신분으로 강제노역을 한 뒤, 귀환선을 타고 1948년 북한의 흥남부두에 들어온다. 북한은 그와 남쪽이 고향인 다른 포로들을 38선 이남으로 내려보낸다. 


다음날 새벽 여관에서 마련해준 도시락을 들고 한탄강을 건넜다. 한참 가니 논 끝자락에 초소가 보였다. 가까이 가니 녹색 코트를 입은 사람이 혼자 있었다. 박정의가 다가가서 "동무, 38선이 어디요"하고 묻자 "뭐, 동무? 이 새끼가"라는 거친 욕설이 바로 되돌아왔다. 그제야 38선을 무사히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같은 책, 27쪽


박정의는 일자리를 찾아 떠난 만주에서 징병되었다. 그리고 패전 후 시베리아로 갔다. 그리고 다시 북한으로, 다시 '손을 든 채' 38선을 넘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이동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동무'와 '이보시오'로 갈라지는 분단선 양쪽의 차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갈라졌는지 안다고 하여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갈라지기 전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에게 분단선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말이 통하지 않는 곳,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혹한의 '타지'에서 돌아와 보니, 조국은 나에게 간첩이 아니냐고 묻는다. 곧이어 터진 전쟁은 그렇게 돌아온 이들을 다시 '군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민군으로 혹은 국군으로. 심한 경우에는 국군이었다가 인민군으로, 그 반대의 경우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읽는 내내 나는 민족과 조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나의 민족과 나의 조국은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국과 민족과 그 역사를 내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혼이 비정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읽은 것이 어떻게 소화가 되어 '민족'을 향한 내 관념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이다. 다만, 지금은 안타깝고 가여워서 마음이 쓰릴 뿐이다.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36쪽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10점
김효순 지음/서해문집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