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는 공자와 논어 ②
『춘추』(春秋)라는 책이 있습니다.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 공자가 지었다(述)고 알려져 있습니다. 『춘추』는 『시경』, 『서경』, 『주역』, 『예기』 등과 함께 유학에서는 경전(經)으로 대접받는 책입니다. 나이를 물을 때,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라고들 하잖아요? 그 말의 연원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담고 있는, 시간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그게 자연스레 나이를 가리키는 관용어가 된 건데, 제가 왜 이런 얘길 하냐 하면, 이 『춘추』라는 책에서 공자 관련 기록을 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공자의 아버지 기록입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이름을 숙량흘이라고 합니다. 직업이 무사(武士)였어요. 직업 군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본 어떤 책에서는 숙량흘의 싸이즈가 230cm 정도였다고까지 추정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건강한 장수인 숙량흘과 공자 부자에게서 우리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단연 남다른 신체입니다.
저는 지금 공자님의 노골적인 육체미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왜? 공자와 『논어』를 이해하고 읽기 위해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믿)는 공자와 『논어』의 이미지를 좀 세탁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처럼 특정하고 사실상 고정된 방식으로 유학을 받아들인 경우에는 더욱더 말이죠. 무슨 말이냐면, 우리 조선에서 오백 년간 유학의 나라를 지켜왔다고 하는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유학의 나라였다기보다 특정한 안경-렌즈로 유학을 본 나라를 진행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특정한 안경-렌즈를 저는 주자 렌즈라고 부릅니다. 물론 주자는 동아시아 고금을 통틀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학자입니다. 그래서 사실 주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게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영광을 오로지한 만큼 짊어져야 할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중국 유학사에서 공자 맹자로 대표되는 고대 선진 유학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일관되게 이해하려는 흐름을 송대 이후의 유학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자로 대표되는 선진 유학도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유학에 대한 렌즈를 바꿔 끼다.
저는 공자를 만나보기 전에는, 아니 『논어』를 공부하기 전에는, 공자와 동아시아 고전 등에 관한 지독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만나보지도 않고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제 편견을 공유할 수 있는지 한 번 들어봐 주세요. 읽어보지도 만나보지도 않은 공자를 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 하면, 순전히 주워들은 풍월로 ‘공자님은 뭐 잘 모르긴 몰라도 핵심은 인(仁)에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인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풀면 ‘어질다’ 정도이거나 혹은 한자어 그대로 인자하다 정도이지요. 그러니까 공자님은 인자함을 갖춘 분이야. 인자함이 뭔데? 어진 거니깐 그냥 좀 심하게 이해심이 넓고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주는 뭐 그런 거? 실제로 『논어』에서 인이 언급되는 대목이 백 번도 넘습니다. 이것도 책에 따라 107번이라는 책도 있고, 109번인가 뭐 그런 책도 있고, 아무튼 다르기도 합니다. 왜 다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는 안 세어봤어요. 그러니까. 실제로 공자가 인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확인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공자님이 중국 사람이고, 중국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옛날 중국 대인들은 나이가 들어 풍채가 넉넉해지면 배가 좀 여유 있게 나오고(포대화상 생각해보세요, 예전 금복주라는 소주에 있던 신선하고요) 그런 인물이 떠오릅니다. 키는 당연히 좀 작달막하겠지요. 인자하시다고 하니깐 아마도 만면에 웃음을 항상 띠고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해 줄 것 같은 멋진 할아버지! 저는 이렇게 공자를 이미지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책에서 만나게 된 공자는 이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제가 생각하고 있던 공자님은 알고 보니 KFC 할아버지였어요. 그런데 공자는 그런 분이 아니었죠. 생각해보세요. 키가 210cm라니! 아버지가 직업군인인 분의 아들이니 신체도 건장했을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그러니 사실 공자를 만세의 스승이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스승이라고 말들 하는데, 이게 수사가 아닌 거죠. 무슨 말이냐면 공자는 일단 당연히 우러러볼 수밖에 없어요, 공자를 만나면, 기본적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 듯 쳐들어야 하는 겁니다. 즉 우러러봐야 하는 겁니다.(^^) 좀 더 막 나가 볼까요. 저는 공자님이 노(魯)나라에서 일종의 랜드마크였을지도 모르겠다, 뭐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곡부(曲阜) 사람들이 이러는 거죠. “우리 내일 만나서 점심이나 먹자고!” “좋지, 언제 어디서 만날까?” “음... 해가 니구산 동편 위로 여섯 치쯤 떠올랐을 때, 음... 공자 있는 데서 보면 좋겠네.” 그만큼 공자는 대충 어디서든 다 보인다는 거죠. 제가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진지하게 들으시면... (^^) 제가 막 당황합니다.
자, 제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중언부언하고 있는데요, 사실 핵심은 간단합니다. 그건 공자의 이미지를 지금 깨셔야 한다는 거예요. 유학에 대한 이미지를 깨셔야 된다는 거예요. 동아시아 고전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관념을 깨야 <논어>가 보이고, 공자가 보이고, 나아가 이런 것들을 가로지르는 고전 인문학이 재미있어 진다고요. 이게 기본서거든요 <논어>와 공자는. 근데 이것들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굉장히 완고한 습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간해선 깨지기가 쉽지 않아요, 그게.
공자와 『논어』에 대한 이미지를 깨부수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들, 즉 공자에 대한 연구자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제가 단언할 수 있어요. 공자를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사마천의 <사기>에 실려있는 공자를 피해갈 수 있는 연구자는 절대 없습니다. 여기에 실린 기록들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는 다를 수 있지만, 이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안에 버젓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마천이 이렇게 써놓고 있어요. “공자는 9척 6촌이었고, 키가 큰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 정도 쓰여 있으면 어느 정도의 진실은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일단 신체사이즈가 보통사람보다 발군이었다. 이게 첫 번째 포인트인 겁니다. 그런데 그냥 키만 컸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제가 볼 때 공자의 신체적 능력은 상당히 과소평가되어 있는 것일 수 있어요. 거꾸로 굉장히 강력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게 공자를 이해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어야 한다, 이겁니다. 왜? 아니 어떻게? 아버지 숙량흘이 무사 출신이에요. 키가 공자보다 더 크고 직업도 전쟁터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전쟁-기계인 분이잖아요. 이게 보통 신체였겠느냐는 거죠. 역시 반응이 미지근하네요. 좋습니다. 그럼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공자의 신체 능력을 간접적으로 상상해보도록 하죠. 19금 버전으로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공자를 낳을 때. 비화에요. 첫 번째 부인에게서 숙량흘은 아홉 명의 자식을 봅니다. 숙량흘, 굉장하신 분이죠? 부인이 더 대단하다고요? 예, 뭐 그건 그렇네요. 하여튼 두 분 다 대단합니다.(^^) 저는 지금 공자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는 집안인지를 설명해 드리는 중에 있습니다. 자칫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숙량흘은 아홉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전부 딸만 낳았습디다. 역시 보통 분이 아니셨던 거죠.^^ 그래서 숙량흘은, 아니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던 아버님 숙량흘은 두 번째 부인을 얻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1남 1녀를 낳았어요. 벌써 자식이 몇 명입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공자님 아니세요. 공자는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드디어 세 번째 ‘여인’에게서 숙량흘은 공자를 낳습니다. 사실 숙량흘의 이 위대한 육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공자는 존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세 번째 여인에게서 공자를 낳을 때의 숙량흘의 나이입니다. 그 당시 숙량흘은 69세인가 70세인가 그랬어요. 다시 한 번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공자님이 이런 집안 자식이에요. 안 씨 집안의 딸이었던 공자 어머님은 그때 당시 나이가 고작 열다섯 살이었어요. 놀라셨죠? 요즘 같으면 법에 걸려요. 제가 지금 농담을 던지듯 가십처럼 말씀드리고 있지만, 저는 공자의 이 육체성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일부러 괄호치고 별것 아닌 것처럼 외면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을 분명하게 전제하는 데서 유학에 관한 공부가 흥미로운 시선을 얻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공자의 육체성에 주목하라!
이번엔 좀 다른 예를 봐 볼게요.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479년까지 73년을 살았습니다. 당시로선 꽤 장수한 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자가 칠십 생애 가운데서 후반부에 해당하는 55세가 되던 해에 자기 나라인 노나라로부터 추방에 가까운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배경은 좀 복잡한데, 어쨌든 정치적 좌절이 되어 외국 생활을 하게 된 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의 망명객으로 떠돌았거든요.
이때부터 공자님은 무슨 일을 하냐 하면, 68세가 되는 해까지 햇수로 14년간, 이웃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이력서를 계속 내고 다니셨습니다.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위해서. 자, 나이를 한번 보세요. 55세에서 68세면 요즘으로 쳐도 만만한 나이는 아니에요. 근데 이 나이에 자기 나라를 떠나서 말이죠. 이 중국이란 나라는 한 나라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하나의 우주입니다. 물론 공자님이 떠돌던 시기의 중국이 지금의 중국과 영토 면에서 차이가 크다고 해도,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 년 전입니다. 요즘처럼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고속철도가 있는 것도 아니죠. 걷거나 수레를 타거나 뭐 그런 겁니다. 그렇게 14년을 돌아다녔다는 말입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고요.
자, 이런 대목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들어야 할까요? 즉 이런 장면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무리 봐도 그건 공자의 놀라운 체력이에요. 근데 이런 건 아무도 안 봐주죠. 안 봐주는 건 고사하고 그렇게 보면 공자를 굉장히 속되고 타락되게 그리는 것인 양 여기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래서 보통 이런 걸 되게 도덕적으로 해결합니다. ‘공자께서 세상을 향한 열정과 의지와 높은 도덕적 책임감으로 천하를 주유하셨다.’ 땡땡땡... 투비컨티뉴드! 왜 그럴까요? 공자에 대한 이미지, 유학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도덕주의적인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한테는. 그래서 이런 걸 굉장히 정신주의적인 것으로. 공자님의 강력한 의지와 정신력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어떤 이런 도덕성이, 14년 동안 천하를 구제하기 위한 열정이, 14년을 돌아다니게 했다는 거예요. 네, 맞지요, 맞고말고요. 당연히 그러셨겠죠. 그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그런데 말이어요. 그런데 말이죠. 이 남다른 체력은 어디 갔느냐고요? 저는 차라리 공자님의 의지를 포기할지언정, 체력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웃음) 아니 저는 만일 둘 중 하나라면 일단 이 점이 더 중요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리스 (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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